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유럽의 할머니

정준극 2009. 10. 15. 12:44

세계의 빅토리아여왕 - 2

 

처녀시절의 빅토리아

 

[유럽의 할머니]

18세의 젊은 처녀 빅토리아가 대영제국의 왕위에 오른 때에는 이미 영국에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던 시절이었다. 종전의 왕권(王權)과는 달리 국왕의 정치적 권력은 상당한 제한을 받았으며 수상의 자문에 의해서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여왕은 대영제국의 군주로서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빅토리아여왕은 외교에 뛰어났다. 특히 유럽 왕실들과의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어 선린을 다지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빅토리아여왕은 아홉 자녀를 두었으며 손자들은 42명이나 되었다. 빅토리아여왕은 이들의 결혼을 모두 직접 주선하였다. ‘너는 이 집으로 시집가고 너는 저 집의 딸을 아내로 마지해라! 응?’하면 아무도 이의를 내세우지 못했다. 그리하여 영국 왕실의 자녀들이 유럽의 전역에 흩어져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했다. 이로써 빅토리아여왕은 ‘유럽의 할머니’(The Grandmother of Europe)라는 별명을 듣게 되었다. 빅토리아여왕은 하노버(Hanover)가문으로서는 영국에서 마지막 군주가 된 인물이며 그의 아들 에드워드7세는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Saxe-Coburg and Gotha) 가문에 속하였지만 명칭이 너무 길었던지 왕위에 오른 후에 윈저가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빅토리아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7세는 윈저가문의 시조가 된다.

 

빅토리아여왕과 가족들의 나들이. 버킹엄궁에서. 왼쪽에서 두번째 어른이 남편 알버트. 오른쪽 끝이 큰 아들 에드워드

 

빅토리아는 1819년 5월 24일 켄싱턴궁(Kensington Palace)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 빅토리아의 할아버지인 조지3세가 대영제국의 군주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지3세의 장남으로부터 3남에 이르기까지 세 아들은 결혼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다음 왕위 계승권자는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4남 에드워드였고 그 다음이 새로 태어난 빅토리아였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불행하게도 빅토리아가 두 살 때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어린 빅토리아는 머지않아 할아버지 조지3세가 세상을 떠나면 세 명의 삼촌에 이어 4번 타자의 왕위 계승권자가 된다. 그런데 둘째 삼촌인 요크공작은 빅토리아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해당이 안되므로 결국 왕위 계승권자 1위는 큰 삼촌인 황태자(Prince Regent), 2위는 셋째 삼촌인 클래런스 공작(Duke of Clarence), 3위는 어린 빅토리아, 4위는 빅토리아의 다섯째 삼촌인 쿰버랜드 공작(Duke of Cumberland and Teviotdale)으로 서열이 매겨졌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할아버지 조지3세가 이윽고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의 큰 삼촌이 조지4세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고 이어 셋째 삼촌이 윌리엄4세로서 왕위에 올랐으나 역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순서에 입각하여 18세의 일반적으로 생긴 빅토리아가 대영제국의 국왕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런던 버킹엄궁 앞 광장의 빅토리아여왕 기념상

 

빅토리아는 태어난지 꼭 한 달 후에 켄싱턴궁에서 캔터버리대주교의 개인적인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알렉산드리나 빅토리아(Alexandrina Victoria)라고 했다. 알렉산드리나는 러시아황제인 알렉산더1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어머니 빅토리아공주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러시아황제 알렉산더1세는 빅토리아의 대부(代父)로서 세례식에 직접 참석하였다. 빅토리아가 셋째 삼촌인 윌리엄4세의 뒤를 이을 왕위계승자로 리스트에 올랐지만 당시에는 어린이가 국왕이 되는데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만일 빅토리아가 18세의 성년이 되기 전에 국왕이 된다면 즉, 현재의 국왕인 윌리엄4세가 빅토리아가 18세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다면 관례에 따라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을 두기로 했다. 영국의회는 이러한 섭정제도에 대한 법안을 1830년에 통과시켰다. 즉, 셋째 삼촌인 윌리엄4세가 국왕으로 등극하고 어린 빅토리아가 다음 왕위계승자로 리스트에 오르던 바로 그 해에 섭정법(Regency Act)을 만들어 통과시킨 것이다. 섭정 후보자로는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젊은 과부 빅토리아(켄트공작부인)가 지명되었다. 윌리엄4세 국왕은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 즉 자기의 제수(弟嫂)를 싫어하였다. 바람만 피우고 너무 못되게 굴어서였다. 그래서 윌리엄4세는 평상시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슨 수가 있더라고 빅토리아가 18세가 될 때까지는 살 것이다. 그래야 빅토리아의 어머니가 섭정을 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과연! 윌리엄4세는 빅토리아가 18세가 되던 해인 1937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18세로서 당당히 성년이 된 빅토리아가 대영제국의 새로운 군주로서 대관식을 갖게 되었으니 어머니 빅토리아(켄트공작부인)는 섭정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빅토리아여왕의 대관식. 빅토리아가 18세 때였다. 웨스트민스터사원. 당시는 아직 미혼. 대영제국의 막강한 군주가 미혼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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