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18세에 여왕에 즉위

정준극 2009. 10. 15. 12:46

세계의 빅토리아여왕 - 4

 

[18세에 여왕에 즉위]

빅토리아는 1837년 5월 24일에 18세가 되었다. 어머니의 보호를 겸한 간섭도 끝났다. 때를 맞추어 약 한달 후인 6월 20일 삼촌인 윌리엄4세가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였다. 빅토리아는 하루 아침에 대영제국의 여왕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아침 6시에 엄마가 깨워서 일어났다. 캔터베리 대주교와 코닝엄 경(Lord Conyngham)이 찾아와서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간단한 가운을 걸치고 거실로 갔다. 코닝엄 경은 삼촌인 윌리엄4세가 그날 새벽 2시 12분에 세상을 떠났다고 엄숙하게 보고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나에게 경의를 표하며 처음으로 '여왕폐하'라고 말했다. 나는 마침내 여왕이 되었다.”라고 썼다. 대관식은 이듬해인 1838년 6월 28일 거행되었다. 빅토리아는 영국의 군주 중에서는 처음으로 버킹엄궁전에 거처하였다.

 

대관식에서의 빅토리아여왕

 

1714년 이래 영국의 군주는 하노버(Hanover)왕조 출신이었다. 하노버왕조는 살리법(Salic Law)에 의해 여자는 왕위 계승자가 될수 없었다. 빅토리아가 여왕이 되자 더 이상 하노버왕조를 이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노버왕조의 가계는 조지3세의 다섯째 아들, 즉 빅토리아의 다섯째 삼촌인 쿰버랜드 공작이 이어 받았다. 쿰버랜드 공작은 어네스트 아우구스투스1세(Ernest Augustus I)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빅토리아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아 자녀가 없기 때문에 다음 왕위계승자는 어네스트 아우구스투스에게 돌아갔다. 1840년 빅토리아의 첫 자녀가 태어나자 다음 왕위계승자의 지위는 자연히 새로 태어난 아이, 즉 큰 딸 빅토리아에게 돌아갔다. 빅토리아여왕의 장녀 빅토리아공주는 훗날 독일제국의 황비 및 프러시아 왕비가 되었다.

 

빅토리아여왕과 큰 딸 빅토리아(비키)공주. 비키는 나중에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와 결혼하였다

 

빅토리아가 여왕에 즉위할 때에 정부는 위그당(The Whig)이 집권하고 있었다. 위그당 출신의 수상인 멜버른 경(Lord Melbourne)은 아직 정치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빅토리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빅토리아도 멜버른 경을 전적으로 신임하여 의존하였다. 빅토리아가 멜버른 수상에게 너무 의존하기 때문에 항간에서는 빅토리아를 ‘미시스 멜버른’(Mrs Melbourne)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불행하게도 멜버른 내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 특히 식민지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여 인기가 떨어졌다. 위그당의 반대당인 토리(Tory)당과 일부 급진주의자들은 서로 연합하여 하원에서 자메이카 독립헌법을 중지하는 법안의 통과를 방해하였다. 이에 타격을 받은 멜버른 수상은 빅토리아가 즉위한지 1년후인 1839년에 수상직을 사임하였다. 빅토리아는 토리당을 대단히 증오하였다. 빅토리아는 멜버른 수상이 사임하자 주로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드1세 국왕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레오폴드1세의 부인은 빅토리아의 사촌인 샬로테 공주였으나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벨기에의 레오폴드1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 레오폴드2세로서 벨기에의 국왕이 되었다. 빅토리아는 레오폴드2세와도 자주 연락하며 자문을 구하였다.

 

빅토리아가 여왕이 즉위한 당시의 수상인 멜버른 경. 빅토리아여왕에게 좋은 자문원이었다.

 

멜버른 경이 사임하자 빅토리아는 어쩔수 없이 토리당의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에게 새로운 내각을 구성토록 위임하였다. 그러한 때에 빅토리아는 이른바 ‘침실 위기’(Bedchamber Crisis)로 알려진 사건으로 정치적인 난관을 겪게 되었다. 당시에는 집권당이 궁중에서 여왕(또는 왕비)의 시중을 드는 귀족여인들을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다. 위그당이건 토리당이건 시종부인들을 선발할 때에는 그 남편들이 당에 얼마나 충성하였는가를 중요하게 보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종부인들은 거의 모두 위그당 사람들의 부인들이었다. 필 경은 집권하자마자 궁중의 시종부인들을 토리당 부인들로 교체코자 했다. 이에 대하여 빅토리아는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빅토리아는 지금까지 함께 했던 시종부인들이 단순히 형식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들이라고 간주했다. 필 경은 여왕과 마찰이 있으면 내각을 구성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필 경은 멜버른 경이 다시 돌아와 수상직을 맡도록 했다.

 

멜버른경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로버트 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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