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21세에 외사촌과 결혼

정준극 2009. 10. 15. 12:49

세계의 빅토리아여왕 - 6

 

성제임스궁 왕실채플에서의 결혼식. 사람들은 '신랑 참 잘 생겼다'라고 말하였다. 그럼 신부는?

 

[21세에 동갑의 외사촌과 결혼]

여왕과 알버트 공은 1840년 2월 10일 런던 성제임스궁전(St James's Palace)의 왕실채플(Chapel Royal)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기의 결혼식이었다. 신랑신부 모두 21세 때였다. 국민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진정으로 축하하였다. 빅토리아는 결혼식 때에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그 이전에는 신부들이 주로 자기의 옷 중에서 색깔과는 관련없이 가장 좋은 옷을 입었다. 신부가 하연 드레스를 입는 전통은 빅토리아로부터 시작되었다.

 

결혼 후 알버트 공은 여왕의 동반자로서 뿐만 아니라 수상인 멜버른 경을 대신하는 여왕의 정치자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젊은 커플은 행복했다. 하지만 시련도 있었다. 결혼한 그 해 늦가을, 빅토리아는 남편 알버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중 18세의 에드워드 옥스퍼드(Edward Oxford)라는 청년이 여왕을 암살하기 위해 권총을 두발이나 쏘았으나 다행히 맞추지 못했다. 옥스퍼드는 반역죄로 처형될 뻔했으나 정신이상자로 인정되어 석방되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첫 딸인 빅토리아는 그해 11월 21일 태어났다.

 

존 프란시스라는 청년(왼쪽 끝)이 빅토리아여왕을 저격코자 권총을 쏘고 있는 장면

 

그로부터 2년 후인 1842년 여름, 빅토리아여왕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또 다시 두 번이나 있었다. 첫 번째는 5월 29일 성제임스공원에서였다. 빅토리아여왕이 마차를 타고 가는데 존 프란시스(John Francis)라는 청년이 피스톨을 발사한 사건이었다. 범인은 즉각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범인 프란시스는 종신 유배되었다. 당시에 유배라는 것은 미국이나 호주의 감옥으로 보내져서 죽도록 노동하는 것이었다. 프란시스에 대한 선고공판 바로 다음 날인 7월 3일, 이번에는 존 윌리엄 빈(John William Bean)이라는 청소년이 여왕을 총으로 살해하려고 했다. 첫 번인인 옥스퍼드가 무죄로 방면되자 '그럼 나도!'라면서 고무되어 범행을 기도했다고 한다. 존 윌리엄 빈의 처사는 마치 장난과 같았다. 총에 탄환이 장전되지 않고 대신 종이와 담배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왕을 살해하려는 의도 때문에 사형을 당할수 있었다. 알버트공은 장난으로 그렇게 했는데 사형을 시킨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회가 새로운 반역법(Treason Act 1842)을 통과시켜 주기를 바랐다. 새로운 법에 의하면 만일 국왕을 위험한 무기로 공격한다면 8년간의 징역과 매질을 당하도록 하였다. 존 윌리엄 빈은 18개월간 징역에 처해졌다. 그는 채찍으로 매질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추후로는 누구든지 반역법에 해당될 때에 채찍을 맞도록 했다.

 

대관식 후의 빅토리아

 

로버트 필경이 구성한 내각은 얼마후 이른바 ‘옥수수법’(Corn Laws)으로 인하여 정치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옥수수법’은 영국 내의 농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외국으로부터의 농산물 수입을 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보수적 성향의 토리당원들은 ‘옥수수법’의 폐지를 반대했다. 하지만 일부 토리당원과 위그당원들은 폐지를 지지했다. 이러한 분란으로 인하여 필 경은 1846년 사임하였다. 존 러셀(John Russel) 경이 그 자리를 맡았다. 러셀내각은 비록 위그당이었으나 여왕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했다. 빅토리아여왕은 특히 외무장관인 파머스튼(Palmerston) 경을 싫어하였다. 파머스튼 경은 간혹 내각이나 수상, 또는 여왕과 아무런 상의 없이 단독으로 외교적인 문제를 협의하였다. 1849년, 빅토리아여왕은 파머스튼 외무장관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여왕도 알지 못하는 중에 파머스튼이 다른 나라의 군주에게 공식적인 특사를 파견했기 때문이었다. 파머스튼 경은 1851년에야 사임하였다. 그 해에 파머스튼은 나폴레옹의 쿠테타에 대하여 수상과 사전협의도 없이 영국정부가 승인한다고 발표함으로서 수상과 여왕의 체면을 손상시켰었다.

 

외무장관이던 파머스턴 경

 

존 러셀경이 수상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에도 몇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여 여왕을 곤혹케 했다. 1849년에는 아일랜드의 윌리엄 해밀튼(William Hamilton)이라는 청년이 마차를 타고 가던 여왕에게 권총을 쏜 사건이 발생했다. 물론 여왕은 무사했다. 해밀튼은 직장을 잃고 불만에 싸여 있었다. 해밀튼은 1842년의 반역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 최고 7년의 유배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그 다음해인 1850년, 또 다른 여왕살해 기도가 있었다. 정신이상이 있다고 생각되는 퇴역군인 로버트 페이트(Robert Pate)가 마차를 타고 가던 여왕에게 달려들어 지팡이로 여왕의 머리를 내려쳤다. 여왕은 머리에 타박상을 입었다. 페이트는 정신이상을 입증하지 못했다. 페이트는 7년의 유배지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빅토리아의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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