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아일랜드의 연가

정준극 2009. 10. 15. 12:50

세계의 빅토리아여왕 - 7

 

부군 알버트공과 함께

 

[아일랜드의 연가]

젊은 여왕은 아일랜드를 깊이 사랑하였다. 여왕은 휴가를 아일랜드의 한적한 시골인 킬라니(Killarney)에서 자주 보냈다. 줄리우스 베네딕트 경의 오페라 '킬라니의 백합'(The Lily of Killarney)의 배경인 킬라니는 던로(Dunloe)호수가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아일랜드도 빅토리아 여왕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1845년, 아일랜드에는 저 유명한 ‘감자 마름병’이 휩쓸어 그후로부터 4년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 수백만명의 아일랜드 인들이 기아를 이기지 못하여 목숨을 잃었으며 수백만명이 미국 등지로 고향을 등지고 이민의 길을 떠났다. 이를 ‘대기근’(Great Famine: 아일랜드어로는 Gorta Mor)이라고 부른다. 빅토리아여왕은 사재 2천 파운드를 털어 아일랜드의 굶주린 백성들을 돕기로 했다. 그런데 오토만제국의 술탄인 아브둘메시드1세(Abdulmecid I)가 기아에 떨고 있는 아일랜드에 무려 1만 파운드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여왕보다 다섯 배가 많은 금액이었다. 빅토리아여왕은 오토만제국에게 1만 파운드는 너무 과하니 1천 파운드만 보내라고 요청했다. 세상에 참 별난 요청도 다 있었다. 술탄은 빅토리아 여왕이 그렇게 요청하니 어쩔수 없이 1천 파운드만 보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 척의 배에 식량을 가득 실어 아일랜드로 급히 보냈다. 이소식을 들은 여왕은 영국해군에게 술탄의 배들이 아일랜드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라고 지시하였다. 빅토리아가 잠시 정신을 딴곳에 두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어 술탄의 선박들은 아일랜드의 드로게다(Drogheda)항구에 도착하여 식량을 모두 부려놓고 떠난 후였다. 나중에 아일랜드 백성들은 여왕의 처사를 알고 '저 여자가 우리 여왕 맞아?'라면서 대단히 섭섭하게 생각했다. 여왕의 실수는 모두 러셀 수상이 보좌를 잘못 했기 때문이었다. 러셀이 비난을 받았다.

 

1845-52년의 아일랜드 대기근을 기념하는 조각작품들

                       

1849년 여왕은 아일랜드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하였다. 아일랜드의 영국총독인 클래렌든 경(Lord Clarendon)이 영접했다. 클래렌든 경은 여왕의 방문을 통해 기아에 허덕이는 아일랜드의 실상이 더욱 자세하게 알려지게 되기를 바랐다. 물론, 아일랜드의 정치적인 현실에 대하여도 런던의 정치가들이 좀 더 이해를 높이게 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여왕이 감자위기에 올바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주민들은 여왕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아일랜드 국수주의자들도 전당대회에서 ‘하나님이여 우리의 여왕을 도우소서’(God Save the Queen)를 부르며 막을 내릴 정도였다. 4년후인 1853년, 여왕은 더블린을 다시 방문하였다. 이번에는 아일랜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더블린엑스포를 개막하기 위해서였다. 개막식에서 여왕은 엑스포 설계자인 존 벤슨(John Benson)에게 기사의 작위를 수여하였다. 1백만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였다.

 

아일랜드 대기근 시절의 어떤 어머니와 아들. 대기근 기념관의 모형.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여왕이 아일랜드를 거의 찾지 않았다. 마치 아일랜드에 대한 흥미를 잃은듯 했다. 혹자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연맹(Dublin Corp)이라는 단체가 왕세자 에드워드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이후에는 왕세자(Prince of Wales)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의 결혼을 축하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또 그 이후에는 이들 부부에게서 태어난 알버트 빅토(Albert Victor: 1864-1892) 왕자의 탄생을 축하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왕이 아일랜드를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1900년이었다. 당시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화란 이민자들과 제2차 보어전쟁(Boer War: Boer는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을 치루고 있었다. 여왕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군대에 입대하여 줄것을 요청하기 위해 아일랜드를 방문했다. 하지만 아일랜드 사람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한편, 아일랜드 국수주의자들은 아더 그리피트(Arthur Griffith)의 지도아래 반영국 기구를 조직하였다.

 

 빅토리아여왕 대관식 기념 주화. 세명의 여신들이 빅토리아에게 왕관을 헌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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