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1]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 에드워드왕자

정준극 2009. 10. 15. 13:00

[참고자료 1]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 에드워드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대영제국이 가장 번성하던 시기에 60년 이상을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에드워드왕자이다. 조지3세의 넷째 아들로서 공식 타이틀은 켄트 및 스트라던공작(Duke of Kent and Strathearn)이다.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PEI)는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인 에드워드를 기려서 붙인 명칭이다. 온타리오 주의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군)도 에드워드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온타리오 주의 포인트 에드워드(Point Edward)도 마찬가지이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에 있는 켄트빌(Kentville) 역시 켄트 공작인 에드워드를 기념한 지명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가 있다. 에드워드는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지 만 1년도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 에드워드는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삶을 살았을까?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 켄트공작 에드워드

 

보통 켄트공작이라고 부르는 에드워드는 1767년 11월 2일에 조지3세 국왕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Mechlenburg-Strelitz) 공국의 공주인 샬로테 왕비였다. 에드워드는 넷째 아들이었으므로 다음 왕위계승의 서열에서 동메달도 아닌 제4위였다. 에드워드의 큰 형으로 왕세자(Prince of Wales)인 프레데릭이 왕위계승 서열 1순위였다. 둘째 형인 요크 공작(Duke of York)이 2순위였고 셋째 형인 클레렌스 공작(Duke of Clarence)이 3순위였다. 에드워드는 세명의 형 중에서 둘째 형인 요크 공작과 가장 가까웠다. 하지만 요크 공작은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 에드워드의 상심이 컸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18세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에드워드의 아버지인 조지3세는 에드워드를 독일 괴팅겐대학교에 보내어 훌륭한 학자로 양육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괴팅겐으로 가는 대신에 뤼네부르크(Lüneburg)에 이어 함부르크로 가서 대학에서 정치와 역사를 공부했다. 에드워드는 제네바에 가서 2년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돌아온 에드워드는 지브롤터(Gibraltar)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 보병 소총부대에 대령으로서 파견되었다. 군대에서 에드워드는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병사들에게 매일같이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병사들 사이에서 별로 인기가 없었다.

 

빅토리아여왕의 할아버지인 조지3세의 젊은 시절. 대관식복장을 입고 폼내는 모습

 

지브롤터 주둔의 영국 소총부대는 1791년 5월(비엔나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캐나다로 이동명령을 받았다. 에드워드도 함께 갔다. 에드워드가 24세의 청년 때였다. 2년후인 1793년, 에드워드는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1796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대영제국의 국왕의 동생이므로 벼락진급에 대하여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었다. 1799년 에드워드는 켄트공작으로 서품되었다. 더블린경(Earl of Dublin)이라는 호칭도 함께 받았다. 이어 그해 5월, 대장으로 진급함과 함께 북미의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에드워드는 주로 캐나다 노바스코샤의 할리팍스(Halifax)에 머물렀다. 그는 할리팍스를 영국해군의 우수 군항으로 만드는데 진력했으며 또한 영국을 떠나 멀리 캐나다 동부의 할리팍스에까지 와서 살고 있는 영국인들의 사회적, 문화적 활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캐나다는 에드워드를 캐나다에 영국왕실의 뿌리를 내리게 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간주하였다.

 

캐나다의 할리팍스 전경. 에드워드가 주재하면서 군항으로 발전시켰다.

 

1802년, 에드워드는 35세 때에 지브롤터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에드워드의 임무 중 하나는 그동안 해이해진 영국 주둔군의 기강을 바로 잡고 수비대로서 훈련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에드워드의 군사훈련은 엄격하였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처럼 편하게 놀고먹기만 하던 병사들은 때아닌 강훈련에 반발심이 생겼다. 병사들은 민주노조를 만들어 폭력시위를 하려다가 아직 노조가 발을 붙이지 못하던 시절이므로 노골적으로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폭동은 에드워드가 총독으로 부임한 그해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일어났다. 에드워드가 ‘당신들 이러면 안된다’고 설득하자 폭동은 수그러졌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했다. 해가 바뀌자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둘째 형 요크공작은 곧 에드워드를 런던으로 소환하였다. 에드워드는 상관의 명령이 있었지만 후임자가 올 때까지 런던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였다. 폭동을 진정시키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임무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지브롤터 총독의 직위를 보유하였다. 훗날 에드워드는 육군원수로 승진하고 명예 제대하였다. 그리고 1805년부터는 햄튼(Hampton)궁정 수비대에 형식상 발령되었다. 켄트공작 에드워드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1보병연대의 명예대령이라는 직위를 유지했다.

 

영국영토였던 지브롤터의 유명한 바위산(Rock of Gibraltar). 에드워드는 한때 지브롤터 총독이었다.

 

에드워드는 대단히 늦게 결혼했다. 50이 넘은 때에 결혼했다. 상대는 19세 연하로서 방년 32세인 독일 작세-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공주(1786-1861)이었다. 우리의 주인공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이다. 빅토리아공주는 한번 결혼했던 빛나는 경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같은 경력의 결과로 두명의 자녀를 거느리고 있었다. 한편, 에드워드는 해외근무하기 이전부터 런던에서 염문깨나 뿌리며 살았다. 솔직히 말해서 애인(정부)이 많았다. 에드워드는 런던에서의 경력을 살려서 가는 곳마다 정부를 만들어 놓고 지냈다. 하기야 우리나라 공무원들도 예전에는 지방에 발령받으면 너나 할것 없이 현지처를 두고 지내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사또의 청소년 자제인 이몽룡까지 현지처를 두지 않았던가? 에드워드가 여러명의 애인 중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관계를 맺어온 여인은 아델라이데 두부스(Adelaide Dubus)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델라이데 빅토리아 아우구스타 두부스라는 긴 이름의 딸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딸은 불행하게도 아주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훗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음으로 유명했던 정부는 줄리 드 생 로랑(Julie de St Laurent)이었다. 항간에서는 에드워드가 켄트공작의 작위를 버리고 줄리 드 생 로랑과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었다. 그러나 결혼설은 설로만 끝났다. 아무튼 에드워드는 50세까지 형식상의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왕세자인 큰형 프레데릭의 유일한 딸인 샬로테 공주(Princess Charlotte Augusta of Wales)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다음 왕위계승에 대한 상황이 불투명하게 되었다.

 

에드워드와 결혼할뻔 했던 마담 줄리 드 생 로랑 

 

다시 빅토리아여왕의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자. 조지3세에게는 무려 아들 칠형제가 있었다. 1남인 왕세자 프레데릭, 2남 요크공작, 3남 클레렌스공작, 4남 켄트공작인 에드워드, 5남 캠브릿지공작, 6남 쿰버랜드공작, 7남 서쎅스공작이다. 1남 왕세자와 2남 요크공작은 모두 결혼했지만 어쩐 일인지 자녀가 없었다. 조지3세에게는 딸들도 있었지만 이때 쯤하여 딸들은 너무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생산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한편, 6남은 결혼했지만 역시 자녀가 없었다. 7남도 결혼했지만 제멋대로의 결혼이어서 1772년의 왕실결혼법에 의해 무효가 선언되었다. 남은 사람은 3남에서부터 5남까지였다. 2남은 일찍이 세상을 떠나 아예 후보군에서 탈락되었다. 에드워드는 4남이라서 5남보다 더 유리했다. 만일 1남에게 문제가 생기던지(예를 들어서 죽던지) 또는 아무런 자녀도 만들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갈것 같으면 3남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며 만일 3남에게 후사가 없으면 4남인 에드워드가 순서에 따라 왕위계승권자의 서열의 영순위에 오를수 있게 되며 만일 4남인 에드워드가 일찌기 요단강을 건너가면 그의 자녀가 다음 서열이 된다. 미혼의 4남 에드워드는 법적인 결혼을 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리하여 1818년, 에드워드가 51세로서 영국 노총각 협회 회장을 지낼 때에 독일 작세-코부르크-잘헬트 가문의 빅토리아라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19년 훗날 대영제국의 깃발을 전세계에 드높인 빅토리아여왕이 탄생하시었던 것이올시다. 에드워드와 빅토리아는 1818년 5월 29일 독일 코부르크의 에렌부르크(Ehrenburg)에서 1차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어 7월 11일에는 영국 서리(Surrey)의 큐 궁전(Kew Palace)에서 2차 결혼식을 올려 축의금을 거두었다. 고참 노총각과 결혼한 빅토리아공주는 훗날 자기의 딸이 대영제국의 여왕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청장년 시절에 세상열락에 빠져 씀씀이가 커서 빚을 많이 졌다. 주로 집을 얻어 하인들을 두고 별도의 생활을 자주 했기 때문에 빚이 많았다. 에드워드의 빚은 딸 빅토리아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 빅토리가아 자기의 수입에서 조금씩 갚았다. 그건 그렇고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식을 올린 후 그나마 양심이 있어서 경비가 적게 드는 집을 구해 살기로 했다. 한적한 데본(Devon) 해변에 있는 우드브룩(Woodbrook) 집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제 버릇 남 주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듯이 두 부부는 상당기간을 런던에서 지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에드워드는 늙으막해서 딸을 보자 불면 날아갈 것 같아 애지중지하였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어린 딸을 군대의 훈련이나 사열에 데리고 다녔다. 왕실에서는 그런 에드워드에 대하여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옐로우 카드를 몇 번이나 내보였다. 딸 빅토리아도 왕위계승 서열에서 상당히 높은 번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캐나다 할리팍스 시절의 에드워드(잊혀진 왕자라는 별명이 있었다.)

 

에드워드는 1820년 1월 23일에 데본의 우드부르크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신발도 신지 않은채 세찬 바람이 부는 축축한 해변을 오래 동안 산책한 후에 감기에 걸렸다가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숨을 거두었다. 에드워드는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 안장되었다. 아버지 조지3세는 그로부터 6일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빅토리아는 우리 나이로 두 살이었지만 서양 나이로는 1년도 채 안된 때였다. 조지3세가 세상을 떠나자 에드워드의 큰 형인 프레데릭이 조지4세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둘째 형인 요크공작은 조지4세가 국왕으로 있는 중에 세상을 떠났다. 다음 왕위계승자는 셋째 형인 클래렌스공작이 윌리엄4세로서 국왕이 되었다. 윌리엄4세도 자녀가 없었다. 그 다음 순번이 켄트공작인 에드워드였지만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라고 하지만 53세였다. 그래서 그 다름 순번이 에드워드의 유일한 딸인 빅토리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18세에 여왕이 되어 1901년까지 대영제국을 통치하였다. 빅토리아의 자녀들은 유럽 여러 왕실의 사람들과 결혼하여 위대한 ‘빅토리아가족’을 형성하였다. 빅토리아의 딸들은 노르웨이, 그리스, 루마니아, 스페인, 러시아, 독일 공국들의 왕비가 되었고 스웨덴의 경우에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빅토리아는 군주의 딸이 아니라 군인의 딸이었기 때문에 장례식은 군인장으로 치루었다. 빅토리아여왕이 그렇게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여왕 장례행렬. 관의 바로 뒤에는 아들 에드워드7세가 따르며 그 옆에는 외손자인 독일 황제 빌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