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2]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

정준극 2009. 10. 15. 13:02

[참고자료 2]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빅토리아 공주)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는 독일 작세-코부르크-잘펠트(Saxe-Coburg-Saalfeld) 공국의 빅토리아 공주이다.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이름도 빅토리아이고 빅토리아여왕의 첫딸 이름도 빅토리아이다. 이른바 ‘빅토리아 3대’이다.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의 풀 네임은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Mary Louise Victoria: 1786-1861)이다.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조지3세의 넷째 아들 에드워드(켄트공작)는 워낙 늦게 결혼했다. 50세가 넘는 노총각이었다. 노총각에게 시집올 처녀는 마땅하지 않았다. 노총각에게는 과부가 제격이라는 속담이 있듯 켄트공작 에드워드에게는 마침 적당한 과부가 하나 나타났다. 남편과 사별한 독일 작세-코부르크-잘펠트 가문의 빅토리아 공주였다. 독일 라이닝겐(Leiningen) 공국의 셋째 왕자인 칼(Carl)과 결혼하였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하였다. 하지만 남편과의 사이에는 이미 두 아이가 있었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과부가 된 빅토리아 공주는 32세 때에 영국왕실로부터 중매가 들어와 에드워드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때 에드워드는 51세였다. 신랑과 신부의 나이 차이는 19년이었다. 하기야 왕족간의 결혼에서 나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출신 성분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하여 빅토리아여왕은 아버지가 52세에 본 늦둥이 딸이되었다. 애가 둘이나 딸린 독일의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로서는 아예 수절하고 살까라고 생각하다가 영국으로부터 중매가 들어오자 팔자나 한번 고쳐 볼려고 청혼을 승낙하였는데 딸이 여왕이 되었으니 과연 팔자를 고쳐도 크게 고친 셈이었다. 대영제국을 무려 63년이나 통치한 위대한 군주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메리 루이스 빅토리아)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1786년에 태어났다. 아버지인 작세-코부르크-잘펠트 공국의 군주 프란츠 안톤(Franz Anton)과 어머니인 로이쓰-에버스도르프(Reuss-Ebersdorf)공국의 아우구스타(Augusta)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7남매 중 네 번째 자녀였다. 독일에는 공국, 자치국, 자유도시 등이 수없이 많아서 왕족들도 수없이 많았다. 길을 가다가 '아이구, 왕자님!'이라고 소리치면 한꺼번에 몇명씩이나 뒤를 돌아다 본다는 것이 독일이었다. 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독일어로는 마리아 루이제 빅토리아) 공주는 17세 때인 1803년에 라이닝겐 공국의 칼 왕자와 결혼했다. 칼(Carl) 왕자도 실은 한번 결혼했던 훌륭한 경력이 있는 양반이었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하여튼 칼 왕자는 자기의 숙모인 로이쓰-에버스도르프의 헨리에타(Henrietta)와 결혼한바 있었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홀아비가 된 칼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다가 1814년 남편 칼 왕자가 세상을 떠나자  졸지에 과부가 되었다. 그래서 수절이나 하며 살려고 하다가 영국의 노총각으로부터 중신이 들어왔던 것이다. 영국의 노총각인 에드워드로 말하자면 영국 왕위 계승서열 3번이었다. 에드워드 왕자와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 공주는 1818년 5월 29일 독일 코부르크의 에렌부르크(Ehrenburg)에서 1차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어 7월 11일에는 영국 서리(Surrey)의 큐 궁전(Kew Palace)에서 2차 결혼식을 올렸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켄트공작부인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아직도 젊은 나이의 켄트공작부인은 자녀 생산능력이 있어서 결혼한지 1년후인 1819년 5월 24일에 빅토리아여왕을 생산하였다.

 

조지 헤이터(George Hayter)경이 그린 켄트공작부인

 

그러나 무슨 운명이 그런지 결혼한지 2년후인 1820년 남편 에드워드가 갑자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감기가 폐렴으로 악화되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그의 아버지인 조지3세가 세상을 떠나기 몇일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하늘도 무심했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재혼한지 2년만에 또 다시 남편을 사별하게 되자 앞이 약간 캄캄했다. 화장실에 가서 혼자 킥킥거리며 웃었는지는 모르지만 겉으로는 대단히 슬퍼했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어린 딸 빅토리아를 데리고 독일의 코부르크로 돌아가려고 했다. 코부르크에는 그가 편하게 지낼수 있는 성이 있었다. 그리고 첫 남편인 라이닝겐 왕자가 남긴 토지에서 수입도 그런대로 있으므로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한편, 세상 떠난 남편 에드워드는 사방에 빚만 가지고 있었으며 수중에 가진 돈은 한푼도 었다. 다만 영국의 데본에 작은 집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다. 공주가 살기에는 너무 초라한 집이었다. 게다가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영어를 몰랐다. 하녀들이 통역을 주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자기에 대하여 무어라고 지껄이는 소리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었다. 그런데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는 가만히 생각하니까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영국에 버티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왕위계승문제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잘만하면 자기가 낳은 빅토리아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던 것이다.

 

빅토리아의 아버지 에드워드 왕자

 

[친정오빠 벨기에왕 레오폴드의 지원]

남편 에드워드의 위로는 세명의 형이 있었다. 가장 큰 형인 프레데릭이 조지3세의 뒤를 이어 조지4세로서 국왕이 되었다. 그런데 큰형 조지4세는 물론이려니와 둘째 형 요크공작도 마나님들로부터 아무런 후사를 얻지 못하였다. 더구나 그들은 이제 나이가 너무 많아서 자녀의 생산에 능력을 발휘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젊었을 때부터 뛰어난 돈환이어서 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별거에 들어간지 오래였다. 두분 마나님도 이미 할머니의 나이였다. 게다가 둘째 형인 요크공작은 골골해서 언제 요단강을 건널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셋째 형인 클래렌스공작의 사정도 어둡기만 했다. 결혼한지 벌써 십여년이 지났는데 자녀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잘만하면 빅토리아도 차기 왕위계승자로서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메리 루이스 빅토리아(켄트공작부인)는 자기의 어린 딸에게 도박을 걸기로 결심했다. 독일의 친정에 가서 숨죽이고 사느니보다는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는 영국의 왕위계승에 운명을 걸기로 한 것이다. 빅토리아는 아버지인 에드워드(켄트공작)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계승 서열 제3위에 올라서게 되었다. 영국의 의회도 그러한 관계를 확인했다. 딸 빅토리아의 왕위 계승 서열이 높아지자 영국 정부는 켄트공작부인과 빅토리아가 켄싱턴궁의 방 몇 개를 사용할수 있도록 허락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결혼을 주선한 벨기에의 레오폴드1세 

 

켄싱턴궁에는 가난한 왕족들이 여러명 함께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훗날 대영제국의 군주가 되었으며 인도의 여제가 된 빅토리아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영국정부는 켄트공작부인에게 최소한의 생활경비만을 지급하였다. 남편 에드워드가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던 것이다. 켄트공작부인의 생활비는 친정오빠인 레오폴드 왕자가 많이 도와주었다. 레오폴드(레오폴드1세)는 나중에 벨기에국왕이 된 사람이다. 1831년 조지4세가 세상을 떠났다. 서열에 따라 빅토리아의 셋째 삼촌인 클래렌스공작이 윌리엄4세로서 국왕이 되었다. 그런데 윌리엄4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이제 너무 늙어서 앞으로 자녀를 가질 가능성도 없었다. 일단은 빅토리아가 다음 왕위후계자의 서열에 오르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차기 왕위계승자의 생활비를 외국사람(벨기에의 레오폴드)이 지원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부는 빅토리아에게 전보다 훨씬 많은 생활비를 지급하였다.

 

[왕실의 불화]

켄트공작부인(메리 루이스 빅토리아)은 켄싱턴궁의 관리원인 존 콘로이(John Conroy)를 개인비서로 삼고 그에게 매사를 의존했다. 콘로이는 아일랜드 출신이었다. 당시 아일랜드 출신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천박하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콘로이의 영향 때문인지 공작부인은 국왕인 윌리엄4세와 사이가 나빴다. 공작부인은 윌리엄4세를 섹스 에니멀이라면서 비난했다. 그러한 공작부인에 대하여 윌리엄4세는 ‘사돈 남 말 하네’라면서 미워하였다. 두 사람의 사이는 치사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그런 중에도 윌리엄4세는 왕위 계승서열이 높은 조카 빅토리아를 무척 귀여워했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윌리엄4세가 빅토리아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공작부인은 윌리엄4세가 켄싱턴궁을 방문했을 때 묵는 방을 자기 방으로 만들어 버렸다. 윌리엄4세는 기가 막혀서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과부가 된 제수씨를 홀대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켄트공작부인은 윌리엄4세의 사생아인 휘츠 클레렌스(Fitz Clarence)를 노골적으로 구박하였다. 혹시나 만의 하나라도 이놈의 사생아가 다음 왕위를 넘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윌리엄4세가 제수(弟嫂)인 공작부인을 얼마나 싫어했는가 하면 1836년의 어느 날 만찬에서 공작부인과 콘로이로부터 또다시 모욕을 당하자 ‘내가 비록 늙었지만 빅토리아가 18세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지 않고 살겠다’고까지 말한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켄싱턴궁과 정원의 빅토리아여왕 기념상

 

콘로이라는 작자는 자기가 공작부인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빽을 믿고 모종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즉, 빅토리아가 18세 성년이 되기 전에 윌리엄4세가 죽어서 국왕이 된다면 섭정이 되어 권세를 누릴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콘로이는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의 개인비서로서 훗날 ‘왕관 뒤의 권력’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콘로이가 예상하지 못한 사항이 있었다. 윌리엄4세가 생각보다 더 오래 살아서 결국은 빅토리아가 18세 성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콘로이는 공작부인을 믿고 빅토리아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모욕적인 언행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빅토리아의 아버지인 에드워드를 ‘여자와 술만 아는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비하한 것 등이었다. 세상에 아버지에 대하여 험담하는 사람을 좋아할 딸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세상 사물을 알만큼 알게된 빅토리아가 콘로이를 멀리하려하자 콘로이는 오히려 빅토리아에게 여왕이 되면 자기를 개인비서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에 공작부인까지 가세하였다. 공작부인은 콘로이를 빅토리아의 개인비서로 임명한다는 명령서를 써와서 빅토리아에게 서명하라고 압력을 넣기까지 했다. 빅토리아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빅토리아는 어머니라는 사람의 주착없는 행태도 싫었고 콘로이라는 어머니의 개인비서는 더 싫었다. 빅토리아는 여왕이 되자 자기의 어머니인 공작부인을 버킹엄궁의 구석진 곳에 격리하여 살게 했다. 얼굴도 마주치기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콘로이는 미국으로 유배했다. 당시 죄수를 미국이나 호주로 보낸다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의 개인비서인 존 콘로이경. 생기기는 멀쩡하게 생겼다.

 

[화해]

얼마후 빅토리아는 앨버트와 결혼하였고 이어 첫 딸인 빅토리아를 낳았다. 빅토리아는 잘 생긴 남편인 앨버트를 무척 사랑하였다. 앨버트의 말이라고 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첫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후 버킹엄궁에 따듯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선 엄동설한과 같았던 빅토리아여왕과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의 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섰다. 켄트공작부인은 딸 빅토리아여왕을 자주 만날 수 있었고 손녀딸인 빅토리아공주를 안아주며 ‘아이구 우리 강아지’라고 말할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는 앨버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앨버트는 따지고 보면 켄트공작부인의 조카였다. 앨버트가 빅토리아의 가정교사인 레젠남작부인(Baroness Lehzen)을 전격적으로 해임한 것은 모녀화해의 신호탄이었다. 레젠남작부인은 오래동안 빅토리아여왕의 가정교사를 해 오면서 켄트공작부인과 콘로이를 비난하는데 앞장 서왔었다.

 

레젠남작부인. 살살거리면서 말을 잘 하게 생겼다.

 

남의 말을 잘할 것 같이 생긴 아니나 다를까 레젠남작부인은 켄트공작부인과 콘로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나팔을 불고 다녔다. 켄트공작부인으로서는 레젠남작부인이 눈의 가시였다. 빅토리아는 첫 딸을 낳은 직후 그러한 레젠남작부인을 남편 앨버트의 권유를 받아 들여 해임하였다. 앨버트는 고모(姑母) 격인 켄트공작부인의 체면을 살려주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수중에 돈이 없어서 쩔쩔매던 켄트공작부인의 사정도 상당히 나아졌다. 앨버트가 은근히 후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켄트공작부인의 재정은 개인비서인 콘로이가 마음대로 주물렀다. 콘로이는 자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돈도 아니면서 돈을 펑펑 썼다. 결과, 켄트공작부인은 쪽박을 차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콘로이가 미국으로 추방되고 딸인 빅토리아여왕의 배려로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의 경제사정은 크게 호전되었다.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고 한다. 생활이 넉넉해진 켄트공작부인은 이 모든 것이 딸을 잘 둔 덕분으로 생각하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이후 빅토리아여왕과 켄트공작부인의 모녀관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가깝게 되었다.

 

[소문]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메리 루이스 빅토리아)과 개인비서인 존 콘로이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것은 소문이라고까지 말할 사항이 아닌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일찍이 빅토리아여왕이 태어난지 1년도 안되어 남편 에드워드를 저 세상으로 보낸 젊은 미망인으로서는 추야장장 독수공방을 이겨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켄트공작부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여권신장주의자 비슷하여서 ‘남자만 바람 피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라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켄트공작부인과 콘로이와의 열애설에 대한 소문은 외국에서도 화제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는 더 고약한 소문이 나돌았다는 것이다. 켄트공작부인이 에드워드와 결혼한 후에도 어떤 제3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지냈다는 소문이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빅토리아여왕도 실은 에드워드의 딸이 아니라 미지의 사나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문은 영국왕실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 아닐수 없었다. 1995년에 말콤 포트(Malcolm Potts)가 쓴 Queen Victoria's Gene(빅토리아여왕의 유전자)이라는 책에 그런 얘기가 자세히 나온다.

 

버킹엄궁전과 광장의 웅대한 빅토리아여왕 기념비.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은 처음에 이곳 버킹엄궁전의 한구석에서 죽어지내면서 살아야 했다. 나중에는 모녀간의 관계가 그 어느때보다도 좋아졌다.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된 배경 중의 하나는 빅토리아여왕과 그 후손들에게서 나타난 혈우병(Hemophilia)였다. 빅토리아여왕 자신과 몇몇 손자들과 손녀딸들에게서 혈우병 증상이 나타났던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데 전문가들이 연구한 결과,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 쪽에서는 혈우병 병력의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독일 작세-코부르크-잘펠트공주)의 쪽에서도 혈우병에 대한 기록이 없다. 남편인 앨버트의 가문에서도 그런 병을 앓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제3자로부터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았다고밖에 볼수 없다는 것이다. 빅토리아여왕 자신도 자기의 혈우병 증상에 대하여 몹시 놀라서 ‘이게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나중에 빅토리아여왕의 손녀와 증손녀들 몇 명은 혈우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의 아버지인 에드워드가 자식을 가질수 없는 상태라는 주장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마담 드 생 로랑(Madame de Saint-Laurent)이라는 여인과 오래동안 동거했었다. 그런데도 자녀가 없었다. 임신을 시킬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얘기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얘기는 무슨 얘기! 그저 소문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프로그모어에 있는 켄트공작부인 영묘. 딸 잘 둔 덕분에 묘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훌륭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