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3-1]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

정준극 2009. 10. 15. 13:05

[참고자료 3-1]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의 여왕이며 동시에 인도의 여제인 빅토리아! 그의 남편이 독일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가문의 알버트 왕자이다. 알버트공의 풀 네임은 프란시스 알베르트 아우구스투스 챨스 엠마누엘(1819-1861)이다. 아우구스투스라는 단어는 라틴어로서 현명하다는 뜻이지만 로마제국 시대부터 이 단어는 황제에게나 사용하던 것이었다. 알버트는 작손공국(Saxon Duchy)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외사촌이 되는 빅토리아 여왕과 결혼하여 9명의 자녀를 두었다. 처음에 그는 여왕의 남편으로서 아무런 실권도 없이 그저 묵묵한 일상을 보냈으나 나중에는 여왕을 진심으로 도와 국정에 많은 자문을 하였다. 특히 그는 교육제도의 개선, 노예제도의 폐지 등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고 문화예술과 과학의 진흥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하였다. 특히 1851년 런던의 하이드파크에서 열린 대박람회(Great Exhibition)도 그가 실질적으로 주관하여 영국의 국위를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한창 나이인 42세에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은 남편 알버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평생을 애도하며 지냈다. 빅토리아여왕이 평생을 검은 상복을 입고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빅토리아여왕은 하노버 가문이었으나 1901년 세상을 떠나고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국왕에 오르자 그것으로 하노버 가문은 막을 내리고 부계의 원칙에 따라 알버트의 가계를 이은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가문이 시작되었다. 에드워드는 나중에 가문의 명칭을 윈저(Windsor)가문으로 짧게 바꾸었다. 오늘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바로 에드워드7세에 의해 시작된 윈저가문을 이은 군주이다.

 

결혼 직후의 알버트 공. 1842년.

 

알버트는 독일 코부르크 인근의 로제나우(Rosenau) 성에서 1819년 8월 26일 태어났다. 빅토리아여왕은 같은 해 5월 24일에 태어났다. 빅토리아가 태어날 때에 산파였던 여인이 알버트가 태어날 때에도 산파를 맡아 한 것은 또 다른 인연이었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작세-코부르크-잘펠트 공작인 에르네스트3세(Ernest III)이며 어머니는 그의 첫째 부인인 작세-고타-알텐부르크(Saxe-Gotha-Altenburg)의 루이제공주였다. 알버트는 이들의 둘째 아들이었다. 평화로웠던 가정에 파탄이 일어난 것은 알버트의 어머니가 알렉산더 폰 한슈타인백작이라는 사람과 스캔들을 일으키고부터였다. 알버트의 어머니는 이혼당하여 코부르크 궁전에서 추방되었다. 알버트의 어머니는 결국 한슈타인백작과 결혼했지만 그 이후로는 생전에 두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30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버트의 아버지는 자기의 조카이며 알버트와는 사촌간인 뷔르템버그(Württemberg)의 안투아네트 마리공주와 재혼하였다. 알버트의 계모가 된 안투아네트 마리는 전처의 두 아들(에르네스트와 알버트)에게 아무런 관심도 기울여주지 않았다. 알버트는 본(Bonn)대학교에서 법학, 정치, 경제, 철학, 예술사를 공부했다. 그는 피아노를 연주할줄 알았으며 운동도 잘하였다. 특히 펜싱과 승마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만하면 아주 관찮은 청년이었다.

 

알버트공이 태어난 독일 바바리아 지방 코부르크의 로제나우 성(판화)

 

[결혼]

1836년, 알버트는 17세 때에 고모(메리 루이스 빅토리아) 켄트 공작부인의 딸인 영국의 빅토리아공주와 혼담이 오고갔다. 알버트의 삼촌으로서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드가 중매에 앞장섰다. 빅토리아로서 보면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는 외삼촌이며 알버트는 또 다른 외삼촌의 아들이므로 외사촌에 해당한다. 당시 빅토리아는 삼촌 윌리엄4세가 자녀를 생산하지 않는 한 영국의 왕위계승자 서열 1번이었다.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는 여동생인 켄트공작부인(빅토리아의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코부르크 공작과 두 아들을 런던에 초청하라고 제시했다. 목적은 빅토리아와의 혼담을 진행시키기 위해서였다. 영국 국왕으로 빅토리아의 삼촌인 윌리엄4세는 다음 왕위계승자인 빅토리아가 작세-코부르크 가문과 맺어지는 것을 상당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우선 영국의 하노버 가문에 비하여 지체가 낮았을 뿐만 아니라 후보자가 빅토리아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의 조카이기 때문이었다. 윌리엄4세는 켄트공작부인을 여러 이유로 무척 싫어했다. 그래서 윌리엄4세는 조카인 빅토리아를 네덜란드 윌리엄2세 국왕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더와 결혼시키려고 분주했었다.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빅토리아의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은 알버트와의 혼담을 어서 추진하기 위해 알버트 일행을 런던에 급히 초청하였다. 관건은 빅토리아가 쥐고 있었다. 빅토리아도 어머니가 싫기 때문에 어머니 쪽의 사촌과 결혼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결혼식. 제임스궁의 왕실예배당에서 1840년 2월 10일. George Hayter 그림.

 

그러나 빅토리아 공주는 알버트를 만나보고 나자 마음이 바뀌었다. 알버트가 너무 멋있어서 단번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일기장에 ‘알버트는 너무 핸섬하다. 머리칼의 색깔도 나와 같다. 그의 눈은 크고 푸르다. 코가 잘 생겼고 치아가 고른 것이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의 진짜 매력은 그의 말씨이다. 그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면 너무 즐겁다. 너무 좋다. 그런데 네덜란드의 알렉산더는 너무 평범하게 생겼다’라고 쓴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다. 빅토리아는 나중에 큰 외삼촌인 벨기에의 레오폴드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알버트를 주선해 준데 대하여 깊이 감사까지 했다. 빅토리아 공주가 알버트에 대하여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자 두 사람간의 공식 약혼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양가는 곧 성혼이 될 것으로 믿고 준비하였다. 경사났네!

 

그로부터 3년후인 1839년 10월, 알버트는 형 에르네스트와 함께 다시 런던을 방문하였다. 빅토리아는 2년전인 1837년 6월 20일에 여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여왕이 된 빅토리아는 알버트에게 편지를 보내어 앞으로 (여왕의 남편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지도 모르므로 모든 면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줄것을 당부했다. 빅토리아는 이미 알버트와 결혼하기로 결심을 굳혔던 것이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서로 사랑의 마음을 가졌다. 유럽의 왕실들에서는 대부분의 결혼이 정략적이어서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이 통상적이었다. 그래서 이혼도 많았다. 하지만 빅토리아와 알버트의 경우는 정략적이기도 했지만 사랑이 기반이 되었다. 빅토리아여왕은 1839년 10월 15일 자기를 만나러 런던에 온 알버트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형식적으로는 빅토리아여왕이 청혼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알버트의 청혼을 수락한 것이었다. 양가대표는 그해 11월 23일 Privy Council(궁내청과 같은 기구)에 두 선남선녀의 결혼예정을 통보하고 국혼의 준비를 당부했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이듬해인 1840년 2월 10일,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개의치 않고 성제임스궁의 로열 채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알버트는 결혼식을 올리기 며칠전에 영국시민으로 귀화하였다. 영국의회법에 의해 군주의 배우자는 영국시민이어야 했다.

 

대관식후의 빅토리아여왕. George Hayter 그림

 

알버트는 처음에 영국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었다. 도대체 작세-코부르크 공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인지 모르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독일은 수백 개의 공국으로 갈라져 있었다. 때문에 작손(Saxon)이라는 조그만 공국하나는 대단치도 않았다. 실제로 작세-코부르크 공국(또는 작손공국)은 영국의 1개 지방보다도 영토가 작았다. 반면 빅토리아는 어떠했는가? 대영제국 및 아일랜드의 여왕이며 세계의 수많은 영국 식민지의 수장이 아니던가? 게다가 나중에는 인도의 여제(女帝)로 대관식을 갖기도 했으니 그런 빅토리아와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보다 작은 공국의 둘째 왕자와 결혼하였으므로 알버트에 대한 인기가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알버트가 빅토리아여왕의 남편이 되자 호칭 및 작위 문제로 런던의 정가는 심심치 않았다. 수상인 멜버른경은 여왕이 알버트의 호칭을 King Consort(국왕의 배우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하자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영국의회는 알버트를 상원의 귀족(Peer)으로 삼는 것을 거절했다. 아마 영국의회에 깔려 있었던 반독일 감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알버트가 상원에서 정치활동을 하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멜버른 수상은 소수당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가뜩이나 약체였던 멜버른 내각은 빅토리아의 결혼으로 야당과 국민들로부터 ‘대영제국인데 이게 뭐냐? 알버트 좋아하네! 작센 코부르크가 도대체 어디 쳐박혀 있는 곳이냐? 그것 봐라!’라는 소리와 함께 정치적 위상이 더욱 약화되었다. 야당은 알버트에게 영국의 귀족 작위를 주는 것을 반대했으며 연간 지원금도 과거의 국왕 배우자에게 주던 것보다 적게 책정했다. 즉, 과거에는 1년에 5만 파운드를 지급했으나 알버트에게는 3만 파운드를 지급키로 결정했던 것이다. 알버트는 ‘영국의 귀족 작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로 말씀드리자면 이미 작손공국의 왕자이며 공작에 상응하는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미 요크공작이나 켄트공작보다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지만 솔직히 작손공국에 있을 때보다 지위가 격하되는 것 같아서 섭섭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그게 무슨 죽고 사는 큰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버트는 결혼후 17년간 공식적으로 HRH Prince Albert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857년 아내인 빅토리아여왕에 의해 Prince Consort(군주의 배우자)라는 호칭을 수여받았다.

 

빅토리아여왕의 좋은 자문가였던 수상 멜버른 경

 

알버트는 가장이지만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마음대로 수행할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가사는 가정교사인 레젠(Lehzen)남작부인의 권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버트는 빅토리아가 첫 아이를 임신하자 아이의 장래를 위해 자기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버트는 가정교사(실제로는 집사장보다 더 세력이 컸음)인 레젠남작부인을 내쫓기로 결심했다. 알버트는 레젠남작부인을 ‘못된 용’(House Dragon)이라고 부르면서 싫어하였다. 알버트는 첫 딸 빅토리아가 태어난후 1년이 지난 1841년 마침내 레젠남작부인을 해고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그를 영국에서 영원히 추방했다. 수상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막강했던 레젠남작부인은 영국에서 추방당한 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알버트는 결혼한후 아무런 사회적 직함도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여왕이 임신하자 알버트에 대한 예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알버트가 첫 번째로 맡은 직함은 ‘노예추방협회’의 회장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이미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나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이나 호주에서는 아직도 노예제도가 횡행하고 있어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었다. 알버트는 노예폐지 제도를 지구상에서 영구히 추방하는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860년의 알버트공

 

그후 1841년, 결혼한지 이듬해의 6월 어느날, 알버트는 빅토리아여왕과 함께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다. 그때 웬 청년이 군중 틈에서 뛰어나와 알버트와 빅토리아에게 권총을 두발이나 쏘았다. 다행히 여왕과 알버트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때 알버트는 임신한 여왕을 보호하며 근위병들을 지휘하여 범인을 체포토록 하는등 기민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하여 알버트에 대한 국민들의 인기가 높아졌고 의회로부터도 치하를 받게 되었다. 저격범인 에드워드 옥스퍼드(Edward Oxford)는 정신이상자인 것이 판명되어 방면되었다. 두어달후 영국의회는 ‘1840년 섭정법’(Regency Act 1840)을 통과하여 빅토리아여왕의 사망시 왕위계승자가 성년이 되지 않았을 경우 알버트가 섭정이 되도록 결정하였다. 알버트는 결혼생활 20년 동안에 단 두번 빅토리아와 떨어져 지낸 일이 있으며 그 외에는 언제나 함께 지냈다. 첫번째는 1844년 초에 알버트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코부르크에 갔다가 온 것이었고 두 번째도 무슨 일 때문에 코부르크에 며칠 동안 갔다 온 것이었다. 아무튼 금슬도 그런 금슬이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금슬은 좋았다. 알버트의 활동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의회에 참석하여 의견을 제시한 일도 있었다. 빅토리아가 아들 에드워드를 낳고 왕실의 가계가 단단해 지자 알버트의 지위도 더욱 확고해졌다. 알버트는 여왕의 정무를 자문하고 서류처리를 도와주며 여왕이 방문객들을 접견할 때에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여왕을 대신하여 사절단을 맞이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알버트에 대하여 약간 좋은 뜻으로 ‘우리의 왕이야 왕!’이라고 말했다.

 

말년의 알버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