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3-2]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

정준극 2009. 10. 15. 13:07

[참고자료 3-2]

빅토리아여왕의 부군 알버트공

 

[혁명무풍지대 영국]

1848년에 접어들면서 유럽에서는 백성들에 의한 혁명이 마치 무슨 유행이나 되는 것처럼 온 지역에 퍼져 나갔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유럽 본토의 이곳저곳에서 혁명이 잦자 걱정이 많았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자녀들이 결혼해서 살고 있는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나 군주들이 쫓겨나는 예상 외의 일도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륙에서 떨어져서인지 신통하게도 영국에서는 혁명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가 없었다. 물론 간헐적으로 몇십명이 모여 ‘자유를 달라!’느니 하면서 시위를 하기는 했지만 ‘여왕은 물러나고 아울러 여왕의 남편도 물러나라!’와 같은 시위는 일체 없었다. 아마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등 날씨가 항상 나쁘니까 밖에 나와서 시위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알버트는 자유진보적이고 계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노예제도 완전폐지 운동에 적극 나섰던 것은 좋은 보기였다. 런던에서 혁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자 알버트는 오히려 자기의 개혁생각을 하나 둘씩 실천하기 시작했다. 우선 캠브릿지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자 교과를 대폭 개편하여 현대사와 현대과학에 대한 과정을 강화하였다. 1851년에 하이드파크에 새로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에서 열린 대전시회(Great Exhibition)는 알버트가 총책임을 맡은 것으로서 미술을 제품생산에 접목시킨 특별한 이벤트였다. 말하자면 제대로된 산업디자인의 효시였다. 알버트는 1843년부터 영국미술가협회의 회장을 지냈으므로 그때의 경륜이 큰 도움이 되었다.

 

하이드파크의 크리스탈팔레이스에서 열린 대전시회 오프닝. 1851년이면 우리나라에서 대원군이 바야흐로 아들을 임금으로 앉히고 세도를 잡기 시작한 해이다.

 

대전시회는 대성공이었다. 1851년 5월 1일 빅토리아여왕이 오픈했다. 사람들은 새로 지은 수정궁(Crystal Palace)과 온갖 새로운 산업제품을 보러 몰려들었다. 영국의 일각에서는 대전시회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았었다. 유럽대륙, 특히 프랑스로부터 혁명과 진보사상이 대전시회를 계기로 물밀듯이 몰려들면 걱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알버트의 생각은 달랐다. 영국의 국위가 격상되고 세계의 산업을 선도하자면 이러한 대전시회는 반드시 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전시회로서 18만 파운드라는 이익금이 생겼다. 알버트는 이익금으로 켄싱턴 남부에 넓은 땅을 매입하여 학교와 문화시설을 건설했다. 그중의 하나는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이었다. 알버트가 새로 넓은 땅을 구매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을 ‘알버토폴리스’(Albertopolis)라며 빈정댔다.

 

빅토리아-알버트 박물관(미술관)

 

[9명의 자녀]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는 20년 결혼생활에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도 아무래도 첫째 딸을 가장 사랑했다. 첫째 딸은 살림밑천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첫 딸의 이름도 빅토리아였다. 첫째딸 빅토리아가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자와 결혼하여 프러시아로 떠났을 때 알버트는 '딸 자식은 기를 것이 못 돼!'라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알버트와 빅토리아의 큰사위인 프리드리히는 독일제국의 황제 및 프러시아 국왕이 된지 99일 만에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창 때에 청상과부가 된 빅토리아에 대하여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은 물론이지만 아버지 알버트도 연민의 정을 쏟지 않을수 없었다. 알버트는 큰 아들인 에드워드에게도 각별한 애정을 주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다른 일에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에 알버트는 아버지로서 종아리를 들고 에드워드를 훈계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자녀에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알버트가 큰 딸과 큰 아들에게 많은 정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다른 자녀들에게 소홀히 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자상한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돌보아 주었으며 때로는 친구 이상으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었다.

 

빅토리아 여왕이 첫딸 비키(빅토리아)와 함께 즐거운 한때. 얼룩 송아지?

 

[말년]

알버트는 1860년에 며칠 동안 고향인 독일의 코부르크를 다녀온 일이 있다. 어느날 말 네필이 끄는 마차를 타고 어디를 가던중 갑자기 날씨가 나빠져서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번개가 치니까 말들이 놀라서 어쩔줄을 모르고 무조건 앞으로 달렸다. 마침 저 앞에는 기차길이 있었고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다른 마차가 있었다. 알버트의 마차는 철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와 충돌하였다. 알버트는 마차에서 본능적으로 뛰쳐나와 다행히 목숨을 건질수 있었지만 여러 군데에 큰 상처를 입었다. 충돌 때문에 말 한필이 죽었다. 나중에 알버트는 큰 딸 빅토리아에게 ‘이제 죽을 날이 가까운 모양이야’라고 말하면서 그날의 사고를 예사롭지 않게 생각했다. 이듬해인 1861년 알버트의 장모, 즉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과 어머니 켄트공작부인은 처음 상당기간은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둘도 없는 모녀사이가 되어 지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빅토리아여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식음을 전폐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일체의 공식 활동을 접어두고 오로지 애도의 심정으로만 지냈다. 알버트는 비록 코부르크에서의 사고 때문에 몸이 아프고 더구나 지병인 위장장애가 있어서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심에 빠져 있는 빅토리아여왕을 대신하여 대부분의 공무를 수행하였다.

 

여왕 즉위 골든 주빌리의 빅토리아여왕

 

[방탕한 아들]

1861년 여름,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아들 에드워드가 군복무를 하고 있는 아일랜드 소재의 쿠라 캠(Curragh Cam) 섬을 방문하였다. 이때의 환영 파티에서 아들 에드워드는 마침 공연차 파티에 참석한 아일랜드 출신의 여배우 넬리 클리프든(Nellie Clifden)을 만났다. 두 사람은 단번에 사랑인지 뭔지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황태자와 여배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이미 그해 봄에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약혼까지 한 처지였다. 아무튼 얼마후에 에드워드와 넬리인지 뭔지 하는 여배우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사실을 안 아버지 알버트는 아들 에드워드에게 '창피해서 못 살겠으니 제발 넬리라는 여배우와의 관계를 청산하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아버지 알버트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청개구리와 같았다. 에드워드는 이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는 아들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 알버트는 어쩔수 없이 특단의 조치를 취하여 에드워드를 캠브릿지대학교로 보내 공부를 계속하도록 했다. 이 일로 인하여 알버트는 속이 매우 상했고 아울러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럴 즈음에 알버트의 사촌인 포르투갈의 페드로5세 국왕이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알버트와는 가깝게 지내던 사촌이었으므로 알버트의 슬픔은 컸다. 그럴 때에 외국 신문에 영국의 황태자인 에드워드가 아직도 아일랜드의 여배우인 넬리 클리프든과 보통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기사가 났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다음 왕위 계승자인 에드워드의 스캔들 때문에 영국 왕실이 망신을 당하게 되어 충격을 받았다. 아무튼 아일랜드는 영국이 통치하는 촌스러운 곳인데 아일랜드 출신의 배우라니 도저히 수준이 맞이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해 12월, 알버트는 장질부사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 폐의 기능까지 망가져 있었다. 알버트는 그로부터 며칠 후, 며칠 후... 1861년 12월 14일 윈저성에서 요단 강을 건너갔다.

 

 

에드워드는 마침내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 결혼하였다. 오른쪽 사진은 에드워드와 섬싱이 있었던 아일랜드의 여배우 넬리 클리프든. 공주도 그런대로 예쁘게 생겼지만 넬리는 정말 멋있는 여인이었다. 게다가 여배우였으니 에드워드 앞에서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이예요?'라면서 눈물을 흘리는 연기 쯤은 문제도 아니었을 것이다.

 

[빅토리아의 상심]

여왕의 상심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빅토리아여왕은 남편 알버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었다. 처음에는 알버트에 대하여 미지근하게 생각했던 국민들도 알버트를 크게 동정하고 존경을 보냈다. 그로부터 빅토리아여왕은 알버트를 애도하기 위해 평생을 검은 상복만 입고 지냈다. 그래서 빅토리아여왕의 후반기 사진은 모두 검은 상복을 입은 것 뿐이었다. 빅토리아여왕은 윈저성과 버킹엄궁전, 그리고 알버트가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마련한 오스본 하우스(Osborne House)의 알버트가 사용하던 방은 평소처럼 그대로 보존토록 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빈방이었지만 매일 아침마다 세면용 더운 물을 가져다 놓도록 했으며 하얀 침대 시트를 매번 새로 갈도록 했다. 빅토리아여왕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했으니 참으로 대단하기는 대단한 순애보였다. 알버트의 사후, 빅토리아여왕은 더더구나 일체의 공식 행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거의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해마다 여름 한철에 BBC 프롬스가 열리는 로열 알버트 홀

                 

알버트의 시신은 임시로 윈저성의 성조지 채플에 안치하였다가 1년후에 프로그모어(Frogmore)의 장엄한 영묘로 이전하였다. 알버트의 석관은 훗날 빅토리아여왕이 합장될수 있도록 규모를 크게 만들었다. 이 석관은 화강암 한 덩어리로 만든 것으로 영국에서 가장 큰 석관이라고 한다. 알버트는 자기의 사후에 자기를 기념하는 건축물이나 기념상을 일체 세우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을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영국의 전역뿐만 아니라 영연방의 여러 곳에 알버트를 기념하는 건축물과 기념상이 세워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오늘날 세계적 연주회장인 로열 알버트 홀(Royal Albert Hall: RAH)이다. RAH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알버트와 빅토리아가 사후 안치되어 있는 프로그모어의 왕실 영묘

 

[알버트 추모의 열기]

 

아프리카의 알버트호수(Lake Albert), 캐나다 사스카치완 주의 프린스 알버트 시, 왕립예술가협회가 수여하는 알버트 메달 등은 모두 알버트를 기려서 붙인 명칭이다. 영국 육군 중에서 4개 연대가 알버트의 이름을 따서 부대명을 붙였다. 프린스 알버트 직속 제11경기병 연대, 프린스 알버트 경보병 연대, 프린스 알버트 근위기병 연대, 프린스 콘소트 소총여단 이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는 햄프셔어(Hampshire)의 알더쇼트(Aldershot)이란 곳을 개발하여 수비대 마을로 만들었다. 알버트는 이곳에 ‘프린스 콘소트 도서관’을 건립했다. 이 도서관은 아직도 마을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콘소트는 군주의 배우자를 말하지만 앞으로 어떤 직책을 가질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알버트는 독일로부터 영국에 최초로 크리스마스트리를 도입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