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5-1]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7세

정준극 2009. 10. 15. 13:10

[참고자료 5-1]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7세

(Edward VII: King of the United Kingdom and the British Dominions and Emperor of India)

 

옛날 일은 모르겠지만 근세에 들어와서 가장 오랫동안 왕세자 노릇을 하다가 국왕이 된 인물은 누구일까? 만일 이런 질문이 나온다면 대답은 단연 영국의 에드워드7세이다. 무려 60년 동안 왕세자로 지내다가 왕이 되었다. 태어나서 환갑을 맞이할 때까지 왕세자로만 지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오랜만에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왕좌에 올랐다. 빅토리아여왕은 18세의 처녀로 대영제국의 국왕이 되었고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63년만에 아들인 에드워드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근대역사를 보면 빅토리아여왕보다 더 오래 군주에 머물렀던 인물이 있기는 있다. 오스트리아제국(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이다. 무려 68년을 황제로 있었다. 말이 68년이지 그건 정말 예외적인 재직기간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유일한 아들로서 황위 계승서열 영순위인 루돌프 황태자가 어린 애인과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그런데 루돌프가 자살한 진짜 이유는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아무리해도 돌아가시지 않으니까 ‘아, 나는 언제까지 황태자인지 뭔지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나?'라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이윽고 지쳐서 자살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대관식 복장의 에드워드7세.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께서 하두 오래동안 왕관을 쓰고 계시는 바람에 에드워드는 늙어서야 겨우 왕관을 물려 받을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무려 60년동안 왕세자의 신분으로 지냈다.

 

그건 그렇고, 에드워드는 1901년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이 돌아가시자 그제서야 대영제국의 국왕 겸 인도제국의 황제가 되어 1910년까지 재직했다. 60세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왕세자(Prince of Wales)의 타이틀에서 벗어나 고작 9년을 재직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일설에 의하면 자꾸 대머리가 되어가는 에드워드는 평소에 ‘에이구, 우리 어머니는 언제나 요단강을 건너가시나? 건강이 나빠질 기색이 통 안보이니, 나 원 참!’이라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충분히 그럴수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현존하는 군주로서 가장 오래동안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은 태국의 푸미볼 국왕일 것이다. 2009년으로서 어언 60년 통치를 기록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영국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이다. 1952년에 여왕이 되었으므로 2009년으로서 57년째 군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다보니 영국의 왕세자인 챨스(한국명: 철수)도 자꾸 늙어만 간다. 챨스는 2009년으로서 61세가 된다. 그동안 다이아나와 이혼하고 카밀라라는 웬 말같이 생긴 여인과 재혼하였다. 챨스는 1952년에 왕세자의 위치가 되었으므로 오늘날 까지 무려 47년을 왕세자(Crown Prince)로서 자리를 꾸준히 지키고 있다. 아무튼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장수하는 바람에 60세에 가서야 겨우 왕위를 이을수가 있었다. 이제 에드워드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살펴보자.

 

군주들의 모임. 왼쪽부터 에드워드7세, 장차 군주가 될 손자인 조지5세, 아들인 에드워드8세, 삼촌인 조지4세

 

[윈저왕조의 시조]

에드워드7세(1841-1910)는 1901년 1월 22일부터 1910년 5월 6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영제국 및 영연방 국왕 겸 인도 황제로 이름을 떨치던 인물이다. 그는 영국의 군주로서는 처음으로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왕조를 개설했다. 그전까지는 하노버왕조였다. 아무튼 에드워드로부터 아버지의 가계를 이어받아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라는 긴 이름의 왕조를 열어나갔다. 그러다가 후임자인 조지5세가 ‘작세...’가 너무 길어서 외지도 못할 지경이라고 하면서 간단히 윈저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로부터 윈저왕조는 오늘날의 엘리자베스2세 여왕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별 탈이 없는한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이다.

 

리스본의 에드워드 파크.

 

서양사를 보면 간혹 어떤 나라에서 어떤 양반이 오랫동안 군주로서 재직하면 그 시기를 특징하는 사조 또는 패션이 생기게 되어 이를 해당 군주의 이름을 따서 아무개 풍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다. 어렵게 설명했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예를 들어 빅토리아여왕의 시대에 유행했던 모든 스타일이나 풍조는 빅토리아풍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빅토리아풍(또는 빅토리아시대)은 도덕성을 강조한 시대였다고 할수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9년밖에 재직하지 못했지만 에드워드의 경우에도 에드워드 시대(또는 에드워드풍)라는 호칭이 부여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려시대, 조선시대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에도 에도시대니 메이지시대니 하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얘기가 곁길로 흘러갔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에드워드 시대는 19세기를 털어버리고 새로운 20세기에 들어선 중요한 시대였다. 기술의 진보와 사회의 변화가 예견되었던 시기였다. 에드워드시대에 비행기가 뜨기 시작했으며 사회주의가 문을 두들기기 시작했고 노동운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유럽의 맹주들, 특히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와 친선을 도모하여 사소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1차 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사전에 막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한편, 에드워드는 영국해군 함대의 현대화에 주력했고 육군 의무대를 개혁하는 등 군(軍)의 현대화와 조직개편에 큰 힘을 쏟았다. 이로 인하여 에드워드 치하에서의 영국군은 다른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조직적으로 현대화되어 있었다.

 

말년에 발모랄성에서의 에드워드7세. 이 사진은 사진애호가인 알렉산드라 왕비가 황송하게도 손수 촬영하신 것이올시다. 이것도 사진이라고 찍었나?

 

에드워드는 1841년 11월 9일 버킹엄궁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여왕과 부군 알버트공 사이에서 태어난 두 번째 자녀였다. 하지만 아들로서는 첫 번째였다. 에드워드는 태어나자마자 콘월공작(Duke of Cornwall) 및 로트세이공작(Duke of Rothesay)의 칭호를 받았다. 그리고 아버지 쪽의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 왕자라는 타이틀도 이어받았다. 이어 며칠 후에는 영국 왕세자(Prince of Wales)의 타이틀을 받았으며 또 다시 체스터경(Earl of Chester) 및 더블린경(Earl of Dublin)의 타이틀을 받았다. 작위를 추가하는데 따라서 영지도 넓어졌다. 에드워드는 아버지 쪽인 작손공국의 후계자로서도 서열에 올라 있게 되었지만 이를 나중에 남동생인 알프레드에게 이양함으로서 자기의 권리는 포기하였다. 에드워드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는 설명을 생략코자 한다. 한가지 곁들이고자 하는 것은 빅토리아여왕과 부군 알버트공의 자녀교육은 상당히 서민적이고 검소했다는 점이다. 옷도 일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입히고 잠도 난방이 덜된 추운 방에서 자도록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반학교에서처럼 시간을 짜서 엄격히 공부를 시켰으며 만일 공부에 게으르다든지 또는 결석하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다.

 

에드워드가 알렉산드라와 결혼식을 올린 버킹엄궁전

 

1860년 에드워드는 대영제국의 왕위계승자로서는 처음으로 북미를 순방하였다. 에드워드가 19세의 청년때였다. 에드워드는 천성적으로 유머감각이 있었으며 활동하는 것도 지나친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보헤미아식의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에드워드는 캐나다의 몬트리올(몽헤알)에서는 생로랭(St Lawrence)강을 가로지르는 빅토리아교의 준공식에 참석했다. 오타와에서는 신축되는 의사당의 정초를 놓았다. 에드워드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블론딘(Blondin)이 외줄을 타고 폭포위를 건너는 것을 관람하였으며 미국 제임스 부캐넌(James Buchanan) 대통령의 초청으로 워싱턴을 방문하여서는 3일동안 백악관에서 체류했다. 에드워드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의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헨리 롱펠로우, 랄프 에머슨, 올리버 홈스와 같은 문인들을 만났으며 뉴욕에서는 1776년 이래 처음으로 삼위일체 교회를 방문하여 왕실가족들을 위한 기도회를 가졌다. 4개월에 걸친 에드워드의 북미 방문은 대성공이었다. [계속]

 

멜버른의 퀸 빅토리아 파크에 있는 에드워드7세 기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