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5-3] 에드워드7세

정준극 2009. 10. 15. 13:16

[참고자료 5-3]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7세

 

[세기적 돈 후안]

빅토리아 여왕의 큰아들인 에드워드는 누구를 닮아서인지 카사노바였다. 친하게 지내던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황태자와 비슷한 실력이었으며 스페인의 전설적인 돈 후안(Don Juan)과도 막상막하의 입장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에드워드와 염문을 뿌린 여인은 줄잡아 55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는 이름만 대도 당장 누구인지 알수 있는 여인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예를 들면 여배우 릴리 랭트리(Lillie Langtry), 나중에 윈스턴 처칠의 어머니가 된 레이디 랜돌프 쳐철(Randolph Churchill), 데이지 그레비유(Daisy Greville), 워위크백작부인(Countess of Warwick), 유명한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 역시 여배우인 알리스 케펠(Alice Keppel), 가수인 호르텐제 슈나이더(Hortense Schneider), 고급 창녀인 줄리아 바루치(Giulia Barucci), 부유한 사회운동가 아네스 카이저(Agnes Keyser) 등이다. 이밖에도 또 누구와 은밀하게 염문을 뿌렸는지는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안다는 것이다. 이렇듯 '돈 조반니'에 버금하는 여인행각을 지낸 것은 왕세자로서 너무 오래 있기 때문에 짜증이 나서 그랬다는 설명이다. 왕실의 체통이 있어서 에드워드로서도 바람을 필 때에 가급적이면 알려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사회가 가만두지 않았다. 거의 날마다 신문에 에드워드에 대한 스캔들 가십이 실렸다. 그럴때마다 빅토리아여왕은 '내가 너무 오래 살아서 그래!'라면서 한숨만 땅이 꺼질 듯 내쉬었다. 나중에는 시녀들이 빅토리아여왕에게 아예 신문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대의 명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에드워드와 약간의 염문이 있었다.

 

[챨스 모던트경의 이혼소송]

1869년, 유명한 의회 의원인 챨스 모던트경(Sir Charles Mordaunt)이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은 모던트경에게 부인이 저지른 불륜의 상대방이 누구인지 이름을 제시하라고 했지만 모던트경은 끝내 이름만은 밝히지 못하겠다면서 버티었다. 하지만 이혼재판을 하는 중에 에드워드가 증인으로 채택되어서 상대방이 에드워드였다는 추측이 당장 나돌았다. 에드워드는 모던트경이 의회에 출석하고 있는 중에 그의 집을 몰래 찾아가서 모던트부인과 은밀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불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을 완강히 거부했다. 법원으로서도 에드워드가 모던트 부인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를 삼지 않았지만 이로 인하여 왕실의 명예가 크게 실추된 것만은 틀림없었다. 에드워드의 마지막 정부인 알리스 케펠에 대하여는 에피소드가 많았다. 알리스 케펠은 런던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불릴만큼 뛰어난 미모와 센스있는 지성의 여인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아들 에드워드의 또 다른 스캔들 상대방이라고 짐작되는 알리스 케펠을 무척 미워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하는 얘기에 따르면 빅토리아여왕은 임종을 앞두고 아들의 정부인 알리스 케펠을 불러 손을 붙잡고 지금까지 자기가 그를 미워했음은 본의가 아니므로 다 이해하여 달라고 간청했다는 것이다. 이 얘기는 아마 알리스 케펠이 일부러 부풀려서 만들어낸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아무튼 에드워드와 알리스 케펠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가십도 나왔다고 할수 있다. 또 다른 얘기에 의하면 알리스 케펠이 빅토리아여왕을 만나기는 했는데 에드워드의 요청에 의해서 만났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알리스 케펠은 감히 여왕에게 ‘저는요 아무에게도 손해를 준 일이 없습니다. 왕자님과 저의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I never did any harm, there was nothing wrong between us. What is to become of me?)라고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와의 결혼식

 

[알리스 케펠과 카밀라 파커 보울스]

알리스 케펠의 증손녀 중 하나가 얼마전에 챨스 왕세자와 재혼한 카밀라 파커 보울스(Camilla Parker Bowles)이다.  챨스로 말하자면 에드워드의 고손자가 되니 두 사람의 인연은 대를 이어 물림이 된 모양이다. 소문에 따르면 카밀라의 할머니인 소니아 케펠(Sonia Keppel)이 에드워드와 알리스 케펠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이다. 물론 케펠 측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소니아 케펠의 아버지는 조지 케펠이며 소니아가 아버지 모습을 쏙 빼 닮았으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에게는 분명히 사생아들이 있었겠지만 그는 유능한 바람둥이 답게 단 한명도 자기 아이라고 받아들인 일이 없다. 나중에 에드워드와 정식으로 결혼한 알렉산드라는 에드워드의 외도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했다고 한다. 

여배우인 알리스 케펠. 현재의 철수와 두번째 부인인 카릴라의 증조할머니가 된다고 한다.

 

[맹장염에서 살아나다]

1901년 1월 22일, 빅토리아여왕이 서거하자 에드워드는 순서에 입각하여 대영제국 국왕 및 인도제국 황제가 되었다. 에드워드가 61세의 노인일 때였다. 대관식은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의 장례식 때문에 이듬해인 1902년 8월 9일에 가서야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주례는 80세의 캔터베리 대주교(프레데릭 템플)가 진행하였다. 대주교는 대관식을 주례한지 4개월 후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원래 에드워드의 대관식은 6월 26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틀전인 6월 24일에 에드워드가 맹장염 진단을 받아 수술을 받느라고 연기할수 밖에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당시 의학의 발달, 특히 마취기술의 발달로 순식간에 수술할수 있었다고 한다. 만일 에드워드가 맹장염이 잘못 되어 요단 강을 건너가게 되었다면 영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질뻔 했다. 아무튼 수술한 다음날 에드워드는 병상에서 일어나 시가를 피웠다고 한다. 2주후에 에드워드는 완전 회복되었다. 주치의였던 프레데릭 트레브스(Frederick Treves)는 대영제국의 왕실을 위한 공로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1846년의 에드워드.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그림

 

[에드워드7세로 즉위]

대영제국의 군주가 된 에드워드는 그의 이름을 에드워드7세로 정했다. 원래 빅토리아여왕은 알버트 에드워드로 부르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아버지 알버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함부로 쓸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냥 에드워드라는 이름만을 사용하겠다고 주장했다. 에드워드7세는 국민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국민들은 아마 너무 오래동안 여왕이 통치하다가 남자 국왕이 등장했기 때문에 반가워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빅토리아여왕은 부군 알버트가 서거하자 상복만 입고 지냈으며 공식 모임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국민들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아버지 알버트가 어렵게 마련한 와이트섬(Isle of Wight)의 오스본 하우스를 별장으로 사용치 않기로 결정하고 국가에 헌납하였다. 에드워드는 왕실의 재정을 단단히 챙겼다. 결과 에드워드는 빚 없이 왕위를 계승한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그에게는 유태인 재정자문관들이 있었다. 유명한 유태계 은행가인 로트쉴트(Rothschild)가족도 에드워드의 친구였다. 당시에는 영국에서 반유태인 정서가 널리 퍼져 있었다. 에드워드는 유태인들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떠들려면 떠들어라’면서 개의치 않았다.

 

에드워드7세

 

[유럽의 엉클]

빅토리아여왕의 자손들, 그리고 장인이 되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국왕의 가족들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그야말로 거미줄 같은 인척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한집 건너 두집이 에드워드의 친척이었다. 만났다하면 사촌이고 조카였다. 예를 들면, 독일황제 빌헬름2세, 러시아의 짜르 니콜라스2세, 헤쎄의 에르네스트 루이스 대공, 작세-코부르크 및 고타의 챨스 에드워드 공작은 모두 에드워드의 조카들이었다. 스페인의 빅토리아 유제니아 왕비, 스웨덴의 왕자비인 마가레트, 루마니아의 왕자비인 마리, 그리스의 왕자비인 소피아, 러시아의 황비인 알렉산드라 훼오도로브나는 에드워드의 조카딸들이었다. 노르웨이의 하콘7세 국왕은 조카이지만 나중에는 사위가 되었고 그리스의 게오르게1세 국왕, 덴마크의 프레데릭3세 국왕은 모두 처남들이었다. 벨기에의 알베르1세 국왕, 포르투갈의 마누엘2세 국왕, 불가리아의 짜르 페르디난드, 네덜란드의 빌헬미나 왕비, 브룬스위크-뤼네버그의 공작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왕자는 모두 사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드7세는 '유럽의 삼촌'이라는 별명을 들었다.

 

어릴 때 어머니 빅토리아여왕, 아버지 알버트공과 함께. 어머니 옆의 빨간 옷이 에드워드. 오른쪽 끝이 큰 딸인 비키(빅토리아) 공주. 그 옆이 둘째 딸인 알리스

 

[애연가의 죽음]

에드워드는 담배를 즐겨 피었다. 하루에 담배 한 갑과 씨가 12개를 피었다. 빅토리아여왕은 궁정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에드워드는 국왕으로 즉위하자마자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의 금연정책을 폐지하였다. 그래서 에드워드 시대에는 'Gentlemen, You May Smoke'라는 에드워드의 말이 달갑지 않은 의미에서 대유행이었다. 에드워드는 나이가 들자 아니나 다를까 기관지염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에드워드는 1910년 3월, 프랑스의 비아리츠(Biarritz)라는 곳을 방문했다가 그만 쓰러졌다. 에드워드는 런던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몇주일을 머물면서 치료를 받았다. 왕이 아프다는 뉴스는 일체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때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경제관련 법안문제로 복잡했었다. 국민들은 왕이 국내 현안에는 관심이 없고 외국에 나가서 쉬기만하고 있다면서 비난을 퍼붓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4월 말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왕비 알렉산드라는 오빠인 그리스국왕 그레고리1세를 만나러 그리스의 코르푸(Corfu)섬에 갔다가 5월 5일 급히 런던으로 돌아왔다. 알렉산드라가 돌아온 다음날, 에드워드는 심장마비의 증세를 보였다. 왕세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 에드워드에게 자기의 말(馬)인 Witch of the Air(공기의 마녀)가 그날 오후 켐튼 파크(Kempton Park)에서 있었던 경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고 보고했다. 에드워드는 ‘뭐? 네 말이 우승했다고?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후 의식을 잃은 에드워드는 자정쯤에 숨을 거두었다.

 

대서양에 면한 비스케이 반도 갸스콘 지방에 있는 휴양지 비아릿츠. 에드워드는 이곳에 갔다가 쓰러졌다.

 

[장엄한 장례식]

에드워드7세의 시신은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 안치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영국 역사상 유럽 각지에서 왕족들이 가장 많이 참석한 가장 장엄한 것이었다. 에드워드는 죽기 전에 조카인 독일황제 빌헬름2세가 유럽을 전쟁으로 이끌어 가지 않을까하여 걱정했다. 이윽고 에드워드가 세상을 떠난지 4년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비록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선포함으로서 1차 세계대전이 야기되었지만 그 전쟁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국가들과 프랑스-영국이 주축이 된 국가들의 대결이었다. 에드워드의 기념상은 영연방의 여러 곳에 세워졌다. 런던의 워털루 플레이스, 아버딘의 유니온 스트리트, 토론토의 퀸스 파크, 호주령 타스마니아섬의 수도인 호바트(Hobart)의 프랭클린 스퀘어, 멜버른의 퀸 빅토리아 가든, 시드니의 왕립식물원 등에 세워졌다. 1903년 새로 건조한 전함은 킹 에드워드 호라는 이름으로 진수되었다. 영국에서는 여러 학교들과 병원들이 에드워드의 이름을 따서 명칭이 붙여졌다. 인도에는 King Edward Memorial(KEM) 병원이 세워졌고 파키스탄에는 King Edward Medical University이, 서부오스트레일리아에는 King Edward Memorial Hospital for Women이 세워졌다. 리스본의 Pargue Eduardo VII(에드워드7세 공원), 밴쿠버의 King Edward Avenue, 플로리다의 잭슨빌에서 만드는 '킹 에드워드7세 시가' 역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버킹엄궁전에서의 에드워드 장례식. 오른쪽에는 어머니인 빅토리아여왕의 기념상이 서 있다.   

킹 에드워드 담배. 에드워드가 하두 담배를 즐겨 피기 때문에 담배 상표에까지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