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5-2]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7세

정준극 2009. 10. 15. 13:11

[참고자료 5-2]

빅토리아여왕의 아들 에드워드7세

 

[넬리와의 스캔들]

영국에 돌아온 그는 영국 육군에서 복무하기를 원했지만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에 일반병으로 들어갈수 없었다. 그러던차에 혼담이 살살 들어왔다. 1861년 9월, 에드워드는 독일을 방문하였다. 목적은 군대 훈련시찰이었지만 실제로는 덴마크의 알렉산드라공주와 선을 보기 위해서였다. 빅토리아여왕과 알버트공은 덴마크 왕실의 알렉산드라공주가 인물도 좋고 성격도 좋아서 대단히 참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실상 며느리로 삼기로 결심하였다. 에드워드는 알렉산드라를 유서 깊은 슈파이어(Speyer) 시에서 만났다. 에드워드의 누이로서 당시 프러시아의 황태자비인 빅토리아가 어머니인 빅토리아여왕의 은밀한 지시를 받아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젊은 덴마크의 공주는 에드워드에게 대단히 좋은 인상을 주었다. 두 사람은 만나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졌다. 결혼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영국에 돌아온 후에 에드워드는 어쩐 일인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는 제쳐놓고 느닷없이 플레이보이로서 행세가히 시작하였다. 아마 어머니에 대한 '이유없는 반항'인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아일랜드에서 군사훈련을 참관하게 되었다. 이때 넬리 클리프튼(Nellie Clifton)이라는 여배우를 알게 되었다. 실은 에드워드의 동료들이 넬리를 에드워드의 텐트에 몰래 숨겨 놓는 깜짝 쇼를 연출했던 것이다. 이후 넬리는 에드워드의 공공연한 정부(情婦)가 되어 아예 막사에서 함께 지냈다.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이런 사실을 외국 신문을 통해서 알게 된 아버지 알버트는 노발대발했다. 온 유럽이 에드워드와 덴마크 공주인 알렉산드라와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알고 있는 터에 그런 스캔들이 일어났으니 화가 치밀지 않을수 없었다. 알버트는 아들 에드워드를 곧바로 캠브릿지대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토록 했다. 고향인 코부르크를 방문했다가 마차 사고로 부상을 당한데다가 지병인 위장병까지 도진 알버트는 결국 에드워드의 스캔들이 세상에 알려진지 단 2주 후인 12월에 사랑하는 아내 빅토리아여왕과 아홉자녀를 남겨둔채 세상을 떠났다. 빅토리아여왕의 상심은 말로 표현할 정도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빅토리아여왕은 이후 평생 동안 검은 상복을 입고 남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당연히 아들 에드워드 때문에 남편 알버트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믿어 에드워드를 미워했다. 빅토리아여왕은 에드워드에 대하여 ‘밥맛이 떨어지는 녀석이다. 경솔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지각이 없고 책임감도 없다.’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다. 빅토리아여왕은 큰 딸 빅토리아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드워드를 보면 치가 떨린다. 보기도 싫다’고 썼다. 물론 빅토리아여왕의 말년에는 에드워드가 마치 ‘돌아온 탕자’처럼 잘못을 뉘우치고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보필하였고 빅토리아도 에드워드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처럼 과거를 모두 용서해 주었다.

 

상복을 입은 빅토리아여왕이 병중인 아들 에드워드를 방문하는 그림

 

[덴마크공주와 결혼]

남편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된 빅토리아여왕은 만사가 다 허망한듯 공식생활 일체를 뒤로하고 은둔의 생활로 들어갔다. 알버트가 세상을 떠난 직후, 빅토리아여왕은 에드워드에게 장기 중동출장을 명령했다. 에드워드는 영국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이집트, 예루살렘, 베이루트, 다마스커스, 콘스탄티노플 등을 방문하였다. 런던에서는 에드워드가 출장에서 돌아오는 대로 알렉산드라 공주와의 약혼을 발표하는 것으로 착착 준비가 진행되었다. 드디어 1862년 9월 9일 좋은 날을 택하여 두 사람의 약혼식이 벨기에의 라켄(Laeken)에서 거행되었다. 영국과 덴마크의 중간지점이었다. 이어 이듬해인 1863년 3월 10일 두 사람의 결혼식이 윈저성의 성조지채플에서 거행되었다. 에드워드가 21세였고 알렉산드라는 18세였다. 신랑신부는 런던에 말보로 하우스(Marlborough House)라는 저택을 마련하여 살았고 노포크(Norfolk)에는 규모가 큰 시골별장을 두었다. 에드워드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놀던 가닥이 있어서 화려한 생활을 즐겨했다. 거의 날마다 파티의 연속이었다.

 

캐나다 할리팍스의 타운홀에 있는 알렉산드라공주 흉상.

 

에드워드와 알렉산드라의 결혼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측도 있었다. 잘 아는 대로 빅토리아여왕을 비롯한 영국의 왕가는 독일 계통이었다. 빅토리아여왕의 부군인 알버트공도 독일 계통이었다. 당시 독일은 덴마크와 영토문제로 사이가 아주 나빴다. 덴마크가 독일 영토였던 슐레스비히(Schleswig)와 홀슈타인(Holstein)을 점령하여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에드워드의 부인이 된 알렉산드라의 친정아버지가 덴마크의 왕이 되었다. 독일은 그 틈을 타서 덴마크를 공격하여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독일에 합병하였다. 빅토리아여왕으로서는 약간의 갈등에 싸이게 되었다. 사랑하는 큰 딸이 중간에 서서 중매하여 미우나 고우나 장차 국왕이 될 에드워드의 부인이 된 알렉산드라를 생각하면 덴마크 편을 들어주어야 겠지만 영국 국민들의 친독일적 정서를 생각하면 무작정 덴마크의 입장만을 옹호할 형편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빅토리아여왕이 할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며느리 알렉산드라가 혹시라도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뿐이었다. 이후 빅토리아여왕은 아들 에드워드의 가정생활에 대하여 간섭하기 시작했으니 예를 들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도 빅토리아여왕이 모두 결정했다.

 

1891년 에드워드의 가족. 왼쪽부터 알버트 빅토왕자, 모드공주, 부인 알렉산드라, 에드워드, 루이제공주, 조지왕자, 빅토리아공주. 자녀들은 아주 그럴듯하게 잘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