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6] 빅토리아여왕의 큰 딸 빅토리아

정준극 2009. 10. 15. 13:18

[참고자료 6]

빅토리아여왕의 큰 딸 빅토리아(비키)

(The Princess Victoria, Princess Royal)

 

빅토리아여왕과 앨버트공은 슬하에 9남매, 즉 4남 5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첫째가 딸인 빅토리아였다. 비키(Vicky)라는 애칭의 빅토리아는 훗날 독일제국의 황비(황제의 부인) 겸 프러시아왕국의 왕비가 되었다. 남편인 독일황제 프리드리히3세(프레데릭3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빅토리아공주라는 호칭보다 남편의 이름을 붙여서 카이저린 프리드리히(Kaiserin Friedrich: 프리드리히 황비)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려졌다. 비키와 프리드리히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 빌헬름(Wilhelm), 즉 빅토리아여왕의 첫 외손자인 빌헬름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독일 황제가 되었다. 빌헬름은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였고 이후 히틀러가 등장하여 제3제국을 출범시켰다. 비키의 아들 빌헬름은 2차대전 중인 1941년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알버트공과 어린 비키(빅토리아)

 

[첫딸은 살림밑천]

비키(빅토리아공주)는 1840년 11월 21일 버킹엄궁에서 태어났다. 빅토리아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앨버트 에드워드왕자는 이듬해인 1841년 태어났다. 앨버트 에드워드왕자는 먼훗날 에드워드7세로서 대영제국의 국왕이 되었다. 비키의 교육은 부모가 직접 맡았다. 가정교사로 있었던 레젠남작부인(Baroness Lehzen)이 비키의 외할머니, 즉 빅토리아여왕의 어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을 비방하는 등 문제를 일으켜서 비키의 아버지인 앨버트공이 과감하게 해임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앨버트는 레젠남작부인이 비키를 가정교사로서 대단히 부적당하며 비키의 안전을 맡길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어린 비키는 동생 앨버트 에드워드와는 달리 성격이 어른답고 똑똑했다고 한다. 비키는 다섯 살 때에 읽고 쓰기를 마쳤다고 한다. 비키는 어릴 때부터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배워 나중에는 유창하게 말하고 쓸수 있었다.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프랑스인, 독일인 보모로부터 배웠다. 이밖에도 과학, 문학, 라틴어, 역사를 공부했고 아버지 앨버트공으로부터는 정치와 철학을 배웠다.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과 엘자 공주의 결혼식 장면. 이 때에 연주되었던 축혼가는 빅토리아 공주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의 결혼식에서 연주되었고 그후로부터 축혼가를 신부입장시에 연주하는 것이 세계적인 유행이 되었다.


1851년, 비키는 10세의 어린 소녀 때에 장차 남편이 될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윌리엄(프리드리히 빌헬름: 1831-1888)왕자를 만났다. 프레데릭은 비키보다 꼭 열 살 많았다. 프레데릭은 부모와 함께 빅토리아여왕과 앨버트공의 초청으로 대박람회에 참석키 위해 런던을 방문했었다. 당시 20세의 프레데릭은 아버지인 빌헬름왕세자에 이어 프러시아 왕위계승서열 두 번째였다. 어린 비키와 청년 프레데릭은 의기상통하여 눈빛만 보고 서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4년후인 1855년 프레데릭이 무슨 마음을 먹었던지 다시 영국에 와서 발모랄(Balmoral)성을 방문했을 때 약소하나마 약혼식을 거행했다. 비키는 14세였고 프레데릭은 24세였다. 결혼식은 3년후인 1858년 1월 25일, 날씨는 좀 추웠지만 하여튼 성제임스궁의 왕실교회에서 만조백관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신랑신부는 서로 사랑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런던과 베를린의 유대강화라는 데에 더 의미가 있는 혼사였다. 정치적 의미를 둔다면 영국의 영향을 받은 프러시아가 주축이 되어 통일되고 자유스러운 독일을 지향하게 된 계기였다고 볼수 있다. 또 한가지 비키의 결혼과 관련해서 기억해야할 사항은 비키와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결혼식에서 신부입장할 때에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축혼가(진심으로 인도하소서)가 연주되었고 그로부터 세계 모든 곳에서 바그너의 축혼가가 결혼식에서 연주되는 관습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비키는 바그너의 음악을 대단히 좋아해서 바그너가 런던에 와서 연주회를 가지면 만사 제쳐놓고 참석하였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긴 빅토리아여왕의 큰 딸 비키(빅토리아)

 

[비스마르크와의 의견차이]

결혼한지 3년 후인 1861년 1월, 프러시아의 국왕이던 프레데릭 윌리엄4세(프리드리히 빌헬름4세)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는 후사가 없기 때문에 남동생이 빌헬름1세로서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비키의 시아버지, 즉 비키의 남편인 프리드리히의 아버지였다. 이 바람에 비키의 남편인 프리드리히는 예상대로 왕세자가 되었고 비키는 왕세자비가 되었다.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된 프리드리히와 비키는 영국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프러시아의 수상이던 유명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는 완전히 생각이 달랐다. 권력으로서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왕세자 프리드리히 부부와 철혈수상 비스마르크는 자주 의견충돌을 빚었다. 심지어 프러시아정부의 사람들은 비키와 프리드리히가 영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믿었다.

 

비키가 프리드리히와 약혼한 발모랄 성

 

19세기에 독일은 통일로 향하는 세 번의 큰 전쟁을 겪었다. 1864년의 프러시아-덴마크 전쟁(Prussian-Danish War), 1866년의 오스트리아-프러시아 전쟁(Austro-Prussian War), 1870-71년의 프랑스-프러시아 전쟁(Franco-Prussian War)이었다. 비키와 남편 프리드리히는 이들 전쟁의 와중에서 처세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비키가 프러시아의 입장에 서지않을수 없게 되자 비키는 다른 형제들과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남동생인 앨버트 에드워드(영국 왕세자)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9세 국왕의 큰 딸인 알렉산드라공주와 결혼했다. 그러므로 영국으로서는 덴마크를 동정하지 않을수 없는 입장이었다. 세 차례의 전쟁은 프러시아를 주축으로 한 북독일연맹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1871년 1월, 승전한 북독일연맹의 대표들은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모여 새로운 연맹인 독일제국의 출범을 선포하고 독일황제(Deutscher Kaiser)로서 프러시아의 국왕인 빌헬름1세를 선출했다. 비키의 시아버지였다. 그로부터 비키의 남편 프리드리히는 프러시아의 왕세자로 있으면서 독일제국의 황태가가 되었고 비키는 황태자비가 되었다.

 

말년의 비키. 책이나 조용히 읽으면서 지냈다.

 

[카이저린 프리드리히]

그로부터 17년후인 1888년, 빌헬름1세가 세상을 떠나자 순서에 입각하여 비키의 남편이 프리드리히3세로서 독일황제가 되었으며 또한 프러시아의 국왕이 되었다. 그때에 프리드리히는 58세의 할아버지 수준에 들어와 있었고 비키는 48세의 중년의 대열에 들어와 있었다. 그러는 중에 프리드리히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후두암이 도졌다. 프리드리히는 독일황제 겸 프러시아 국왕의 자리에 오른지 99일 만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비키를 카이저린 프리드리히(Kaiserin Friedrich: 프리드리히 여제)라고 불렀다. 한편, 비키의 주변 사람들은 비키를 엥글랜더린(Die Engländerin)이라고 불렀다. 비키의 선조들을 따져보면 독일계통이지만 사람들은 비키가 영국에서 왔다고 하여 ‘영국여자’라고 불렀던 것이다. 실제로 비키는 어릴 때부터 독일어를 잘 했지만 집에서는 영어만 사용했다. 홀로된 비키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의 근처에 있는 크론버그(Kronberg) 언덕에 프리드리히스호프(Friedrichshof)라는 저택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남편 프리드리히를 기념하여 세운 집이었다. 비키의 아들이 빌헬름2세로서 새로운 황제에 올랐다. 평소에 비키와 아들 빌헬름은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관계가 어려웠다. 비키는 자유주의자였으며 아들인 빌헬름은 전체주의자였다. 그러나 비키가 정치 라인에서 물러나자 빌헬름은 어머니 비키가 더 이상 정치적으로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아주 호의적이 되었다. 비키는 베를린에 여자고등학교와 간호원 훈련소를 건립했다. 예술적인 소양이 풍부했던 비키는 여러 예술활동을 후원하였다. 1872년 베를린에서의 산업미술전시회는 비키가 주관한 것이었다.

 

빅토리아의 시아버지인 프러시아의 빌헬름1세

 

[유방암으로 고통받음]

비키는 1899년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을 만나기 위해 발모랄 성으로 가서 며칠 쉬는 중에 몸이 좋지 않아서 용한 의사를 찾아갔더니 유방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부족한 것이 없는 독일황제 및 프러시아 국왕의 어머니요 대영제국 빅토리아여왕의 큰 딸인 비키가 유방암이 말기에 이르도록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이후 날이 갈수록 비키의 통증은 말할수 없이 심해졌다. 그래서 발모랄에 있는 시종들의 방은 비키의 방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도록 했다. 비키가 통증을 이기지 못하여 지르는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얼마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수술을 할수 없을 정도가 되어 하루하루를 그저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면서 지냈다. 그리하여 비키는 유방암 말기로 진단을 받은지 3년후인 1901년 8월 5일 프리드리히스호프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이 운명한지 3개월 후였다. 비키의 유해는 베를린 부근의 포츠담에 있는 프리덴스키르헤(Friedenskirche: 공원묘지교회)의 영묘에 남편 프리드리히와 함께 나란히 안치되었다. 프리드리히와 비키는 슬하에 8남매를 두었다. 그중 두 살때에 죽은 지기스문트와 11살 때에 죽은 발데마르(Waldemar)도 포츠담의 영묘에 함께 안치되어있다. 지기스문트는 빅토리아여왕의 첫 번째 손자여서 빅토리아여왕은 그가 태어났을 때 무척 기뻐했었다.

 

비키의 남편 프리드리히(훗날 독일제국 황제 및 프러시아 국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