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여왕: 빅토리아

[참고자료 7] 빅토리아여왕의 둘째 딸 알리스 공주

정준극 2009. 10. 15. 13:23

[참고자료 7]

빅토리아여왕의 둘째 딸 알리스 공주

(Princess Alice: Alice Maud Mary)

 

알리스공주와 자녀들 

 

[엘리자베스2세의 부군인 필립공의 증조할머니]

알리스공주(1843-1878)는 빅토리아여왕의 셋째 자녀이며 딸로서는 둘째이다. 알리스공주는 엘리자베트2세 여왕의 부군인 필립공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부군인 필립공은 아주 멀기는 하지만 친척관계이다. 알리스는 1843년 버킹엄궁에서 태어났다. 이름을 알리스라고 지은 것은 빅토리아여왕을 도와 수상을 맡고 있는 멜버른경(Lord Melbourne)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멜버른 수상과 알리스라는 이름은 무슨 특별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날 빅토리아여왕이 멜버른 수상에게 영국의 이름 중에서 어떤 이름이 가장 마음에 드느냐고 묻자 멜버른 수상은 알리스라는 이름이 가장 사랑스러운 이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둘째 딸에게 알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알리스의 어릴 때 풀 네임은 알리스 모드 메리였다. 모드(Maud)는 마틸다(Mathilda)의 앵글로-색슨식 이름이다. 알리스가 세례 받을 때에 대모가 소피아 마틸다였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여 모드라는 이름을 추가하였다. 소피아 마틸다는 조지3세의 조카딸이었다. 알리스의 풀 네임에 메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숙모인 메리공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알리스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부군인 필립공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사진은 1952년 엘리자베스2세의 대관식 후 왕실마차를 타고 여왕과 함께 버킹엄으로 향하고 있는 필립공.

 

[착하고 영리한 공주]

빅토리아여왕은 어느 틈에 아이가 셋이나 되자 버킹엄궁에는 아이들 방이 부족하여 다른 집을 하나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빅토리아여왕은 앞으로도 계속 자녀가 생길 것이므로 여러 아이들이 뛰어놀고 공부도 할수 있는 넓은 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44년 와이트섬(Isle of Wight)에 있는 오스본 하우스(Osbourne House)를 별장으로 구매하였다. 빅토리아의 자녀들은 오스본 하우스에서 생활중심의 교육을 받으며 지냈다. 예를 들면 집안 관리하기, 요리하기, 정원 가꾸기 등은 기본이었으며 심지어 목수일도 배웠다. 빅토리아와 알버트는 자녀들이 왕자와 공주로서 자라는 것보다는 평범한 가족의 일원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그래서 알리스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평상복을 입혔으며 아무런 장식도 없고 가구도 별로 없는 검소한 방에서 자도록 했다. 아이들의 침실은 난방이 거의 되어 있지 않아 추웠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불평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알리스는 마음씨가 여렸으며 남을 도와주기를 즐겨했다. 11살 때에는 어머니 빅토리아여왕과 함께 크리미아전쟁의 부상자들을 위로하러 자주 병원을 방문했다. 그로부터 알리스는 ‘언아더 나이팅게일’라는 별명을 들었다. 알리스는 외할머니인 켄트공작부인이 노쇠하여 병석에 눕자 간호를 자청하였다. 켄트공작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빅토리아여왕은 크게 상심하였다. 이때에도 알리스는 상심한 어머니와 매일을 함께 지내며 보살펴주었다. 알리스는 아버지 알버트가 심한 와병 중에 있게 되자 며칠이나 병상 옆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1861년 12월 14일 알버트가 세상을 떠나자 왕궁은 또다시 깊은 슬픔에 빠져 들었다. 이때에도 알리스는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의 개인비서 역할을 하며 어머니를 극진히 도와주었다. 아무튼 효녀 심청이었다.

 

엄마 닮았네. 알리스공주

 

[독일 루이스왕자와 결혼]

아버지 알버트가 돌아간지 1년후인 1862년, 알리스는 중매에 의해 독일 헤쎄- 라인공국의 루이스왕자(1837-1892)와 결혼했다. 루이스는 헤쎄-라인공국의 루이스3세 대공의 조카이며 헤쎄-라인공국의 왕세자인 샤를르의 아들이었다. 결혼식은 와이트섬의 오스본 하우스에서 거행되었다. 알리스는 결혼후 헤쎄-라인공국의 다름슈타트(Darmstadt)에 가서 살았다. 알리스와 루이스는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알리스는 어머니 빅토리아여왕으로부터 혈우병 인자를 물려받았으며 이를 다시 자기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알리스는 부상병들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그리하여 1866년의 독-오전쟁에서는 부상병들을 위한 알리스부인연맹(Alice-Frauenverein)을 결성하여 간호원들을 훈련시키고 실제로 병원을 돕는 일을 추진했다.

 

[자녀들에 대한 헌신적인 간호]

알리스의 남편인 루이스는 헤쎄- 라인공국의 군주였던 삼촌이 세상을 떠나자 대공의 자리를 이어 받아 군주가 되었다. 알리스는 대공부인이 되었다. 당시 독일에서는 장질부사가 유행하여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었다. 알리스의 가정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이 병에 걸려 쓰러져갔다. 딸 마리가 목숨을 잃었다. 또 다른 딸인 엘리자베트도 위험하였으나 다행이 알리스의 헌신적인 간호로 살아났다. 하지만 알리스는 자녀들을 간호하느라고 너무 애를 써서 그만 자신이 장질부사에 걸리고 말았다. 알리스는 1878년 12월 14일, 아버지인 알버트의 기일에 세상을 떠났다. 알리스의 시신은 다름슈타트 교외에 있는 헤쎄 왕가 영묘에 안장되었다. 알리스가 세상을 떠난지 4년후인 1882년, 다름슈타트에는 알리스공주기념병원(Princess Alice Memorial Hospital)이 설립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