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강화-인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정준극 2009. 10. 18. 05:13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

Sudoguksan Museum of Housing and Living

 

인천 동구 송현동 소재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전경. 무슨 배처럼 생겼다.

 

인천 동구에 송현동이란 마을이 있다. 동인천역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고개마을이다. 글자그대로 보면 솔재(松峴), 즉 소나무가 많은 고개마루의 마을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송림산(松林山) 또는 만수산(萬壽山)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곳이다. 소나무는 십장생에 속하기 때문에 만수산이라고 그랬던 모양이다. 지금은 소나무는 커녕 가로수도 제대로 없다. 인천이 개항이 되자 외국인들이 조선에서 돈벌이를 하기 위해 많이 들어와 살았다. 주로 일본과 중국사람들이 오늘날의 중구(특히 전동)에 대거 살았다. 인천과 서울간에 철도가 놓이게 되자 이번에는 철도노동자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어 지냈다. 이들은 철도공사 연변에 임시로 살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기찻길 옆 오막살이여서 마을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던중 원래 인천에 살던 사람들이 지금의 인천역 일대의 중구에서 밀려나 갈곳을 찾던 중 솔재마을이 만만하여 몰려 와서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그 많던 소나무들을 베어내고 허름하나마 집들을 지어서 살았다. 얼마후 사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황해도에서 피난 나온 사람들이 인천으로 몰려와서 그저 판자집이라도 지을만한 곳이 있으면 염치불구하고 보금자리로 삼았다. 그런 판자촌으로는 송현동이 제일 만만했다. 이미 판자집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들어서 있기 때문에 옆에 하나 더 짓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명후 산업화가 진행되자 이번에는 시골에서 항구도시 인천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았다. 집을 지을 형편들은 안되니까 주로 월세 집을 구해서 살았다. 송현동은 가장 인기가 있던 곳이었다. 인천에서 방하나의 월세가 가장 쌌기 때문이었다. 송현동은 이미 고개마루까지 수많은 임시 가옥들이 빼곡히 들어선 한심한 곳이 되어 있었다. 한때는 3천 가구 이상이 살았다고 한다.  

  

수도물도 귀하던 시절엔 새벽에 수도물 나오는 시간에 물지게를 짊어지고 수도물 파는데 가서 돈을 주고 물을 사서 먹었다. 물받는 사람들이 많아서 한참이나 줄을 서야 했다. 학생들은 학교 갈 시간이 다가와서 빨리 물을 길어가고 싶어했다. 물을 길어가야 어머니가 밥을 지을 것이고 밥이라도 한술 먹고 가야 공부하는데 허기가 지지 않았다. 아무튼 기다리는 동안은 심심하지만 캄캄한 새벽이라서 멍하니 있을수 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살면 고개마루이기 때문에 낮은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보다 휘영청 달을 더 가깝게 볼수 있었다. 그래서 달동네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또 다른 의미로는 달달이 세를 내는 월세방이 많기 때문에 달동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런 주장도 있다. 시내에서 살던 서민들은 도시계획 때문에 살던 곳에서 쫒겨나 정부가 정해준 변두리의 언덕받이에 천막을 치고 살았다. 밤에 천막 안에 누우면 구멍이 뚤린 천정을 통해 달이 보였다. 그래서 달동네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에 달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텔리비전 드라마와 영화가 나오게 되자 달동네라는 단어는 어려운 집들이 잔뜩 모여 있는 산동네의 대명사가 되었다. 서울의 봉천동은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그래도 단캉 방이지만 보통 집에서는 볼수 없는 TV가 있다. 브라운관 형식의 초창기 TV로서 여닫는 문이 달린 것이었다. TV위에는 신랑신부 목각인형이 놓여 있다.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그냥 사는 부부에게는 그나마 어울리는 장식품이었다. 이 집에는 전화기도 있다. 그리고 자개로 만든 화장대와 옛날 반닫이 같은 함도 있다. 그리고 이 집은 벽지나마 제대로 발랐다. 잘 사는 집이다. 남자의 남방도 깨끗하고 비싸보인다. 여자의 몸뻬이 치마는 당시에 유행하던 꽃무늬 디자인이다. 집에서 화초 하나라도 기를 형편이 아니므로 옷이나마 꽃무늬들을 사서 입었다.

 

개화기의 인천이 근대도시로서 발전을 거듭하자 식수공급이 큰 숙제로 남게 되었다. 인천의 물은 수량도 부족하려니와 짠물이 많아서 식수공급에 어려움이 있었다. 서울에서 물을 끌어다 쓰기로 했다. 일제는 수도관 공사를 시작하고 지금의 송현동 고개마루에 수도국(水道局) 건물을 지었다. 그래서 이 고개마루를 수도국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인천의 명소 달동네가 생겨서 수도국산 달동네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떤 사람들은 수도국산이라는 이름이 도무지 낯설어서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라며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오호라, 수도인 서울의 인근에 있는 국산(國産) 달동네를 말하는가 보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국산 달동네가 있고 수입 달동네가 있다는 발상은 납득하기 어렵다. 또 어떤 양반은 '수도국 산달동네'라고 주장했다. 산에 있는 달동네라는 그럴듯한 설명이었다. 모두 '수도국산'이라는 단어가 생소해서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수도국산은 일제 시대에 수도국이 있던 산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아무튼 이곳 송현동 수도국산에 동구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달동네 박물관을 거창하게 지었다. 아주 건물이 그럴듯하며 부지도 넓다. 야외극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마침 필자가 그곳을 방문한 날에는 야외무대에서 동구가 주최하는 무슨 가요무대 같은 공연이 있었다. 무명일 것 같은 나이 지긋한 아줌마 가수들이 나와서 마이크를 붙잡고 목이야 터져라고 뽕짝을 불렀다. 주변 아파트에서  소란하니 제발 중지해 달라는 민원이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더구나 학생들의 시험기간이어서 한 낮에 확성기를 틀어 놓고 뽕짝을 불러대는 소리에 공부를 못할 지경이니 축제고 나발이고 그만 두어 달라는 민원이 있었으나 동구가 예산을 들여 준비한 행사이므로 한시간만 참아 달라는 사회자의 안내였다. 이것이 구청행정의 현장이었다. 그런 행사를 할 돈이 있으면 가로등이나 하나 더 설치하면 얼마나 좋으랴!

 

제4회 인천광역시 동구 문화예술인 총연합회 예술제라고 한다. 관중들이 없어서 썰렁했다. 확성기 소리만 귀를 울린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로부터 소름때문에 시험준비하는 아이들이 공부를 못하므로 중지해 달라는 민원이 들어왔다고 한다. 예산을 들여서 계획한 이른바 예술제였다. 한시간만 참아 달라는 사회자의 멘트였다. 어떤 중년분이 '이러니 공무원들이 욕을 먹지!'라고 중얼거리며 지나갔다.

 

이촌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박물관 소개 행사에 갔다가 인천 천막(부스)에서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 대한 팜플렛을 접하고 궁금증이 나서 전철을 타고 동인천 역에서 내려 송림로타리를 거쳐 언덕위의 박물관을 방문해 보았다. 팜플렛에는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이리라. 엊그제 같은 1970년대의 달동네인데 어느덧 타임머신을 타고 가야할만큼 먼 과거가 되었나 싶어 씁쓸했다. 아무튼 1970년대의 송현동 달동네의 모습을 최대한으로 재현해 놓았다. 대부분 한국인들이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갖은 고난을 견디며 살던 현장이었다. 더운물 찬물이 끊이지 않고 나오며 평면 TV를 비롯한 온갖 전자제품이 자리 잡고 있는 오늘날의 아파트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나는 생활상을 볼수 있다. 참으로 오늘날의 아이들은 호강에 겨워 제 분수들을 모르니 걱정이다. 그러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미친듯이 쇠고기 수입반대 데모에나 참석한다. 군중심리! 친북좌파!

  

1960-70년대 우리네 집의 부엌이 이러했다. 이 집엔 그래도 연탄재 담는 통이  두 개나 있다. 빨래하는 함석 함지박도 있고. 냉장고가 어디 있는가? 가스레인지가 어디 있는가? 이만한 부엌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비가 오더라도 비닐 우산을 쓰고 마당에서 풍로밥을 지어야 했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정말 너무 고생이 많았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은 지하철 동인천역에서 내려 4번출구로 나와 1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자세한 사항은 동구의 홈피인 www.icdonggu.go.kr/museum을 찾아보면 알수 있다. 입장요금은 어른이 5백원이다. 아마 전시장이 작아서 그만큼 받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데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동구의 공무원 나리들이 발간한 팜플렛을 보니 Sudoguksan Museum of Housing and Living 이라고 써 놓았는데 이건 '아니올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하면 '주택 및 생활 박물관'인데 이건 뉘앙스가 맞지 않는다. 어떤 미국분에게 이러이러한 전시관이라고 했더니 그럼 Incheon Old Days Slum Museum 이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한다. 슬럼이라는 말이 부합하는 것 같았다.

 

방에서는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 앉아 팔각성냥곽을 만들고 있다. 그나마 큰 부업이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계시다. 부엌 살림이라는 것이 광주리와 그릇 몇개이다. 툇마루의 하얀 고무신은 나들이 할 때만 신는 것이다. 누가 집어 갈까봐 잘 간수해야 했다. 학교 선생님을 찾아 뵐 때나 모처럼 신는다. 요강도 보인다. 아침마다 요강 청소가 제일 귀찮은 일이었다. 벽에 차지철씨가 만들어서 돌린 달력이 붙어 있다. 차지철이라면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세도가였다. 그런데 1979년 10월 26일 이른바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때 함께 총에 맞아 죽었다. 권력무상.  

동네 한쪽에서 뻥튀기를 하는 것은 큰 사업이었다. 저런 기계는 아마 우리나라에만 있을 것이다. 달동네 사람들은 저런 뻥튀기가 골목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했다. 골목에서 뻥하는 소리가 나는 것은 그만큼 뻥튀기를 해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이므로 은근히 자랑스럽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서는 파지를 줍는 사람이 열심히 보루바꾸를 챙기고 있다. 보루바꾸는 아마 보드 박스를 그렇게 불렀던 모양이다. 놀면 뭐하나? 그저 무어든지 일을 해야 했다. 그나마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서 새마을 모자와 작업복을 입는 것이 패션이었다. 새마을 마크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것만 해도 큰 벼슬이었다. 

방안의 신문지 벽지는 아무런 흉이 아니었다. 심심하면 신문지의 영화광고만 보고 있어도 시간이 갔다. 외출복을 잘 간수하기 위해 하얀 옥양목 커버를 만들어 씌었다. 누나들이 여학교 가사시간(또는 수예시간)에 Sweet Home 이라고 십자수를 놓은 양복커버는 웬만한 집에는 대강 있었던 귀중품이었다. 나중에 누나가 시집갈 때에는 그것부터 챙겨갔다. 그 옆의 거울은 결혼식 때 친구들이나 동료들이 추렴하여 사준 것이다. 당시에는 결혼식 선물로 거울이 유행이었다. 우선 그다지 비싸지 않으면서도 상당한 생색을 낼수 있는 물건이기 때문이었다. 신혼부부 방에 결혼선물로 받은 거울 하나도 없으면 '아니, 뭐 이래?'라고들 말했다.

송현상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오늘날의 각종 편의점과 비교가 된다. 주류는 소주와 맥주였고 식료는 미원, 간장, 소금, 설탕 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잡화를 백화점의 잡화부에 있는 물건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달동네 집의 안방이다. 역시 무슨 국회의원인지 뭐인지가 돌린 달력이 붙어 있다. 창문은 유리창이지만 우풍이 하도 심해서 비닐을 얻어다가 다시 막아 놓았다. 그래도 이 집은 이부자리와 베개가 반듯한 편이다. 호마이카 반닫이와 미군부대에서 얻은 것 같은 도랑꾸(트렁크)가 놓여 있다. 이사를 자주 다니므로 큰 도랑꾸는 필수였다. 

영어로는 Sudoguksan Museum of Housing and Living으로 되어 있다. 외국인이 얼핏 보면 수도국산 주거 및 생활 박물관으로 생각할수 있다. 달동네는 어디 갔나? 왜 번역을 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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