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따라, 추억 따라/서울

세 이방인의 서울 회상

정준극 2009. 10. 30. 21:18

세 이방인의 서울 회상

서울역사박물관 전시회

 

근자에 들어와서 박물관마다 훌륭한 기획전시회를 마련하고 있어서 나처럼 무료한 사람들에게 좋은 정신적 양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마련한 ‘한국박물관 100주년 기념특별전’은 정말 훌륭한 전시회였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박정희대통령 유물-선물전시회’를 개최하여 나도 ‘有備無患’이라는 박대통령의 친필 글씨를 도장으로 만들어 엽서에 찍어주는 것을 한 장 받아 왔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이리자 한복전시회’가 마련되어 아름다운 한복에 대한 놀라운 감동을 주었으며 또 한쪽에서는 독일에 사는 김영자라는 분이 평생을 수집한 세계 각국의 인형을 전시하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동화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게 만들었다. 한편,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특별하게도 ‘세 이방인의 서울 회상’이라는 전시회가 마련되었다. 세 명의 외국인이 일제시대와 해방 후와 1970년대의 어려웠던 시절을 사진으로 남겨 놓은 것을 볼수 있는 귀중한 전시회였다. 귀중한 사진 자료들이 많이 있어서 대단히 가치가 있는 전시회이지만 그보다도 세 사람의 뜨거운 한국 사랑이 사진마다 담겨 있어서 감동을 주는 전시회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팸플릿에 적혀 있는 대로 소개코자 한다. ‘서울회상’이라는 타이틀의 사진전시회는 이미 10월 9일부터 시작하여 11월 8일이면 끝난다. 전시회에는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동영상, 모형, 책자와 같은 전시물들도 있어서 더욱 흥미를 갖게 해주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광화문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잠시 가다가 나오는 경희궁 바로 옆에 있다.

 

고종황제의 국상이 발표된 덕수궁 앞에 백성들이 모여있다. '뭐가 어찌 돌아가는 것인가? 아이고!' 

 

1919년 고종황제의 장례식을 중심으로 당시 서울의 모습을 촬영하여 남긴 분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Taylor)씨이다. UPI의 전신인 UPA의 특파원 자격으로 서울에 머물렀던 분이다. 그는 1919년 3.1독립선언문을 입수하여 통신으로 서방에 알렸으며 일경이 3.1 운동 이후 경기도 제암리 교회에서 민간인들을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참혹하게 죽인 이른바 제암리학살사건을 처음으로 전 세계에 알린 분이다. 그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돕다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서대문형무소가 얼마나 참혹한 곳이었는지는 지금이라도 가서 보면 그 때를 알수 있다.

 

   

앨버트 테일러씨.                                            메리 테일러여사가 쓴 Chain of Amber(호박목걸이)

 

그는 1942년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미국에서 1948년 세상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한국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리하여 현재 마포 양화진의 외국인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누구도 감당하기 어려운 뜨거운 ‘한국사랑’이었다. 테일러씨의 부인과 딸도 참으로 한국을 사랑하였으며 현재 미국에 있는 그의 손자들도 대를 이어 한국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앨버트 테일러씨는 서울의 남산을 중심으로한 파노라마 사진을 최초로 촬영하였다. 그것이 이번에 공개되어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가 남긴 사진들은 대부분 고종황제의 국장 장면이다. 그러한 사진을 통하여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실들도 일깨워 주고 있으니 예를 들면 고종황제의 국장 행렬에 일본 천황과 황후라는 사람이 보낸 의식용 나무(이른바 신수)가 요란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하면 한국의 고관들이 꼴사납게도 일본의 복장을 입고 행렬에 참가 하고 있는 것 등이다. 하기야 공직자들은 영혼이 없다고 하니...

 

일본 천황과 황후가 보낸 신수(神樹)를 메고 가는 행렬. 일본군 장교가 호위하고 있다. 메고가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인것 같다. 일본 옷들을 입었다. 우리나라 국상에 일본 신수가 웬말?

일본 예복을 입은 이왕직 장관. 이건 조선의 국상행렬인가? 아니면 일본식 행렬인가? 매국노들의 행렬인가?

덕수궁의 광명문.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앞에 있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광명문은 덕수궁의 한 쪽 구석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자격루 등을 전시하는 곳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을 통채로 옮긴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것이다.

 

두 번째 사람은 프레드 다익스(Fred Dykes)라는 미군병사이다. 다익스씨는 2차 대전후인 1946년 12월부터 1948년 5월까지 미군정 주둔군의 일원으로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틈나는 대로 서울의 이곳저곳을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동료들과 함께 주머니를 털어 한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었다. 그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간지 60년만인 지난 2005년 다시 서울을 방문하여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고 무척 감격해 하였다. 그는 1940년대 당시를 회상하여 그가 간직하고 있던 서울에 대한 귀중한 사진들을 모두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프레드 다익스씨 

모처럼 휴일에 덕수궁 석조전에 나들이 나온 시민들. 땡볕에 앉아만 있어도 즐거운 나들이여서 집에가서 아이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었다.

해방후 석조전 앞의 미군들. 무얼 구경하고 있을까?

 

세 번째 인물은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 목사님이다. 사회운동가인 노무라 목사님은 일본에서 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여러번 목격하고 자기가 한국인을 위해서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한국인에 대한 봉사활동을 결심하고 1973년부터 1985년까지 무려 50여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여 빈민구호활동을 펼쳤다. 그는 일본이 과거 한국을 식민지로 삼아 잔혹한 통치를 한 것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재일동포들을 차별함을 심히 부당하게 여겨 몸을 아끼지 않고 한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가 남긴 사진들은 주로 청계천을 중심으로한 어려운 시기의 모습으로 2006년 그는 소장품을 모두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는 청계천과 같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한국인들을 보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 있을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노무라 목사님이 한국 어린이를 안고 있다. 

노무라목사님이 찍은 청계천의 봉제공장. 우리의 할머니들, 어머니들이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그래도 부강한 나라가 되어 있으니 사기나 치는 정치가들에 비하면 정말 애국자들이다.

청계천의 봉제공장. 그래도 일을 할수 있어서 즐거웠다. 정치 모리배들은 알고나 있는가? 이들의 고생을!

청계천 판자촌과 화장실. 아침이면 줄을 섰다.  

1960년대 초반만해도 청계천을 이랬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청계천을 정비하여 삼일고가도로를 건설했다.

 청계천 판자촌. 정말 이런데서 살았다. 날마다 식수전쟁이었다. 화장실은 더 큰 문제였다. 외출해서 용무를 보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 큰 효자였다.

이런 천막집에서 살았던 것이 우리의 실정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