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서울대성당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Seoul Cathedral - Anglican Church of Korea
장림교회(將臨敎會)를 아시나요? 오늘날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성공회 서울대성당의 첫 이름이다. 1890년 영국의 챨스 존 코르프(Charles John Corfe)신부가 조선에 정식으로 파견되어 목회를 시작할 때에 지금의 성공회 서울대성당 자리에 있던 작고 낡은 한옥에 십자가를 세우고 장림교회라고 불렀다. 따라서 장림교회야 말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공회 미사를 드린 교회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대한성공회라고 부르지만 초창기에는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라고 불렀다. 게으른 탓에 깊이 조사하지 못하여 당장은 조선종고성교회라는 말이 어떤 연유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1890년은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해이다.
서울시내 한복판에 이런 멋있는 서양건물이 있다는 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우리는 보통 성공회 서울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며 영어로는 Seoul Cathedral - Anglican Church of Korea이다. 우리는 보통 Cathedral을 대성당이라고 번역하는데 성공회에서는 주교좌(主敎座)라고 번역했다. 성공회 서울성당은 시청 앞에서 광화문 네거리로 가는 중에 프레스 센터 건너편 쪽, 영국대사관 옆에 있다. 거리에서 떨어져 있기 때문에 큰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잠시 안으로 들어가면 웅장하고 화려한 성당건물이 안전에 전개되어 바야흐로 커다란 감동을 준다. 성당과 함께 성가수녀원 및 주교관이 있다. 성가수녀원과 주교관, 교무국 건물은 모두 옛 한옥이어서 운치가 있다. 만일 한옥을 허물고 빌딩을 짓는다면? 볼품 없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제발 한옥들을 철거하지 말기를 기도한다. 서울 성공회 성당 주변은 서울 시내의 한복판에도 이런 조용한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한적한 분위기여서 산책 삼아 들려보아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성당은 언제나 개방되어 있어서 수녀님의 친절한 안내를 받을수 있다. 말로만 듣던 성공회에 대한 역사와 성당건물과 교리에 대하여 많이 배우는 관람이다.
성공회 서울 주교좌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우리나라에 영국 성공회가 들어온 역사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강화 편에서 성공회 강화 성당과 온수리 성당(성안드레성당)을 소개할 때에 일차로 설명한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나라 성공회의 연혁을 짚어 보는 것은 복습을 위해서나 장래의 지식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므로 다시 간략히 정리해본다.
- 영국 성공회가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와 선교한 것은 1885년이다.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J. R. 울프 신부가 부산에 와서 2년간 열심히 선교를 했으나 힘들어서 돌아갔다.
- 그후 본격적인 선교는 1890년 영국해군의 종군신부인 챨스 존 코르프(Charles John Corfe)신부가 조선에 정식으로 파견되고부터였다. 그가 고요한 신부이다. 우리나라 성공회의 역사에서 잊지 못할 분이다. 한편, 조마가 신부는 서울을 중심으로 수원, 인천, 강화에서 선교와 함께 병원, 고아원, 인쇄소를 차려 백성들을 구제하고 선도하였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성공회 성당은 강화읍 관청리에 세운 강화읍성당이다. 1900년에 세웠다. 본당은 노아의 방주를 닮은 장방형의 바실리카 스타일이다. 온수리의 성안드레성당은 1911년에 완성되었다.
- 1914년 강화도에 성공회산학원을 설립하여 조선인 신부들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1915년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김마가라는 사람이 신부로서 서품되었다. 당시에는 성미가엘신학원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구로구 온수역 인근에 있는 성공회신학대학의 전신이라고 생각된다. 1925년에는 수도자를 위한 성가수녀회가 서울 성당을 건축하는 경내에 설립되었다. 1926년에 서울 성당이 완공되었다.
- 1931년에는 C. 쿠퍼(고요한) 신부가 주교로 취임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곤경을 겪다가 결국은 추방당하였다.
- 1965년 대한성공회는 서울, 대구의 양대 교구로 분할하고 이천환(李天煥) 신부가 한국인으로서는 첫 주교로서 성좌에 올랐다. 1974년에는 대전교구에서 부산교구가 분할되었다. 이것이 약소하나마 필자의 자료에 의해서 정리한 대한성공회의 걸어온 발자취이다.
사제관과 그 뒤편의 성가수녀회
필자가 성공회 서울성당을 처음으로 구경 갔던 것은 아마 1970년대 초반이라고 생각되는데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방한하여 서울성당에서 연설을 한다기에 갔었던 것이다. 그때 통역은 고려대의 김진만 교수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4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캔터베리 대주교의 설교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 날리는 만무하고 그 분의 이름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성공회 본부라고 하는 서울 성당을 처음 방문했으 때의 인상은 ‘아니, 별로 크지도 않고 장식도 없네!’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캔터베리 대주교의 강연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어서 발 디딜 틈도 없었으므로 성당 내부를 찬찬이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그 다음에 갔었던 것은 성공회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가 아들의 결혼식이 이 성당에서 열리므로 오라고 해서 안가볼수도 없고 하여 잠시 갔던 일이었다. 그후로는 특별히 볼일이 없어서 도무지 재탐방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가 근자에 남느니 시간이어서 마치 오래 미루어 놓았던 숙제를 마친다는 기분으로 탐방하게 되었다.
내부 회랑(네이브). 장엄하고 아름답다.
서울성공회성당은 꽤 오래된 건물이다. 1926년에 완성하였으니 어언 80년이 넘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는 4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이 정도의 건물을 하나 지으면서 4년이나 걸렸으니 무던히도 시간을 잡아먹은 셈이다. 아마 물자가 풍족하지 못한데다가 일제의 간섭이 심해서 그랬을 것이다. 설계는 영국인 딕슨이라는 분이 맡았다고 한다. 유럽에 있는 대개의 성당이 그러하듯 서울성공회성당도 원래는 십자가형으로 설계되었다. 전문용어로 설명하지만 십자가의 양 날개인 수랑(트랜셉트)을 두는 디자인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 나라가 처한 여러 가지 사정상 양쪽 수랑과 회중석(네이브와 아일)은 축소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항상 속상하던 터였는데 비교적 근자인 1993년에 원래의 설계도를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 우연찮게 찾게 되어 기쁨으로 가져와서 1996년에 원설계대로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을 보존하게 되었다. 건축학적으로 보면 서울성공회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로마시대의 건축양식과 흡사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에 한국적인 전통의 멋도 잠시 더하였으니 예를 들면 팔작지붕 스타일과 기와이다.
벽에 걸어놓은 14처 그림들
성당 북쪽에 있는 출입구를 통하여 안에 들어가면 입구의 안내책상에 성당안내서가 영어와 한글판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고 방명록도 마련되어 있다. 안내 데스크에 그날 담당은 데레사 수녀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문을 열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유럽의 로마가톨릭 성당이나 러시아의 정교회의 성당에서 볼수 있는 복잡다단함은 없고 그저 정갈하게 정리된 예배당이 눈 앞에 보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유럽의 성당들은 너도나도 하나님께 잘보이기 위해서인지 화려하게 꾸미느라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성당은 오히려 간소하고 정숙해서 더 좋다. 서울 성당의 반구형의 중앙제단에 대하여는 한마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영국의 조지 재크라는 사람이 디자인했다고 한다. 시실리 전통에 따른 제작으로 각석으로 모자이크를 만든 것이다. 상단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Ego sum lux mund)라고 적혀 있다. 가운데에는 다섯명 성자들의 모습이 그려 있다. 성스테파노, 성사도 요한, 성모 마리아, 성이사야, 성니콜라스이다. 다섯 명의 성자들을 모신 데에는 각각 사연이 있지만 지면상 생략코자 한다. 성화 아래에는 Te Deum(테 데움: 천주송가)이 적혀 있다.
중앙의 제단과 성화
파이프 오르간에 대하여도 한마디 남기지 않을수 없다. 영국에서 만든 것으로 1985년에 설치했다. 원래는 십자가의 날개에 해당하는 수랑에 있었는데 현재는 뒤편 2층에 올려놓았다. 20개의 음전(音栓)과 1천4백50개의 파이프가 있어서 마치 하늘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 같다. 회랑이 비교적 넓지 않기 때문에 한번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면 그 소리가 온 성당 안에 가득 넘쳐흐른다고 하니 축복은 축복이다. 지하에 세례자요한 채플(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대한성공회 제3대 교구장인 조마가(趙馬可) 주교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여기에도 오르간이 별도로 있다. 성당 남쪽으로 돌아가면 마치 커다란 타조알처럼 생긴 조형물이 있다. 순교자 기념조형물이다. 김일성에 의한 6.25 남침 때에 믿음으로 성당을 지켰던 여섯 명의 순교자들을 추모하기위한 조형물이다. 그들은 이원창 신부, 윤달용 신부, 조용호 신부의 3인의 한국인과 영국인인 이도암 신부와 홍길로 신부, 그리고 아일랜드 출신의 클라라 수녀이다.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회에 대한 이해가 높지 않다. 가톨릭도 아니고 개신교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회는 결코 색다른 종교가 아니다. 혹자는 영국성공회가 옛날 헨리8세의 억지 결혼을 위해 새단장으로 출범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하, 그런 배경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거야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을 뿐이고 세상이 달라져도 한참 달라진 오늘날에는 세계적인 신앙의 공동체로 발전한 종교단체이다. 그러므로 성공회의 신앙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신앙과 다를바가 거의 없다. 성공회는 오늘날 개신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 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성경과는 거리가 있다. 성공회는 개신교가 채택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믿으며 가톨릭이 기본으로 삼고 있는 니케아신조를 믿고 있다. 성공회는 성서, 이성, 전통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을 통합한 것이라고 보면 될것 같다. 성공회는 세례와 성찬례를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사로 받아들인다.
순교추모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뒤편의 영국대사관, 더 넘어서 덕수궁 중화전화 석조전 서관이 보인다. 영국대사관 앞의 팔각건물은 세실극장이 들어서 있는 건물. (Credit: 부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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