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성물들/수의와 겉옷(성의)

토리노에 흘러 들어온 역사

정준극 2009. 10. 30. 22:00

[토리노에 흘러 들어온 역사]

 

어떻게 하여 예루살렘 골고다의 수의가 이탈리아의 토리노까지 흘러 들어온 것일까? 그러나 저러나 다른 곳에서도 예수의 수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가톨릭백과사전을 보면 토리노의 수의처럼 예수의 얼굴 모습이 선명하게 찍혀 있는 수의가 프랑스의 베산송(Besancon), 캬두엥(Cadouin), 샴피에뉴(Champiegne), 사브르가(Xabregas)의 가톨릭교회에도 보관되어 있어서 혼란을 빚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교회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으므로 과연 어떤 것이 진짜인지 구별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한편, 캬두엔의 수의는 코란에도 기록이 나오는데 7세기에 이집트에서 만든 세마포로 알려졌다. 이집트는 7세기에 무슬림국가가 되었으므로 코란의 기록에 타당성이 있다. 그러므로 1세기에 예수를 장사지낼 때에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할수 있다.

 

퀜틴 마치스(Quentin Matsys)의 작품.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수의로 싸고 있다. 모자쓴 남자는 아리마대의 요셉이라고 생각되며 파란 옷을 입은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 그 뒤의 검은 곳을 입은 여인은 성모 마리아이며 예수의 머리쪽에 붉은 옷을 입은 남자는 사도 요한이고 그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니고데모라고 한다.

 

그보다도 성경에 예수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는 두 개가 있다고 되어 있는 것부터 알아보자. 요한복음 20장 6-7절에 보면 베드로와 예수가 사랑하던 제자라고 생각되는 다른 제자 한명이 막달라 마리아의 보고를 받고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6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을 쌌던 세마포(수의: Shroud)가 따로 있고 얼굴을 쌌던 수건(Sudarium: Napkin)이 따로 있었음이 분명하다. 유태인의 장례 관습에 의하면 얼굴은 별도의 수건으로 감쌌는데 이는 시체의 입이 움직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세마포로 만든 수의는 토리노에 있고 얼굴을 쌌던 수건은 스페인의 오비에도(Oviedo)에 있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수건(수다리움)에 대하여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 세마포로 만든 수의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세마포 수의는 13세기에 가서 비로소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종적을 제대로 파악할수 없었다. 다만,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3세기 말에 성지 예루살렘에 가서 여러 성물들을 찾아가지고 돌아 왔는데 그 중에는 성수의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헬레나는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여러 성물 중에서 일부는 로마에 두었고 일부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는 것이며 수의는 행선지가 콘스탄티노플이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러시아정교회 이콘.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장소에 분명하게 두 개의 수의가 놓여 있다. 두 천사가 무덤을 지키고 있으며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몰약을 들고 찾아왔다.

 

[에데싸의 얼굴모습]

여기서 잠시 얘기가 빗나갔다고 생각할수 있지만 ‘에데싸의 모습’(Image of Edessa)이라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에데싸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오늘날에는 터키의 산리우르파(Sanliurfa: 또는 간단히 Urfa)를 말한다. 예수가 활동하던 시절에 에데싸는 오스로에네(Osrohene)라는 도시국가였다. 에데싸의 왕 아브가르(Abgar: 4-50)가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을 때 신하중의 한사람이 유대 땅에서 예수라는 사람이 기적을 행한다고 하니 그를 초청하여 병을 고침이 마땅한줄 안다고 권했다. 이에 아브가르왕은 신하의 편에 편지를 보내어 예수를 간절히 초청하였으나 당시 예수는 일정이 바빠서 에데싸까지 갈 여유가 없기 때문에 아브가르왕의 초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편지를 보냈다. 예수는 편지에서 나중에 제자 한사람을 보내겠다고도 썼다.

 

에데싸의 성수의. 그러나 사이즈가 토리노의 것보다 아주 작다. 하지만 예수의 얼굴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 놓았다.

 

아브가르왕의 나병은 예수의 편지를 받는 순간 이미 고침을 받았다고 한다. 예수가 아브가르왕에게 보내는 편지는 제법 큰 천을 사용한 것으로 나중에 그 천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뚜렷하게 나타나 보였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진짜라면 역사상 예수의 얼굴모습이 프린트된 최초의 것이 된다. ‘에데싸의 얼굴’이라고 부르는 천 조각은 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기록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후 10세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가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의 공격을 받을 때 사라졌으며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후인 18세기에 프랑스의 루이9세가 파리 근교의 생샤펠르(Saint Chapelle)성당에 보관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종적을 알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콘(성화)으로나마 당시의 전설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에데싸의 편지를 맨디라이온(Mandylion)이라고도 부른다.예수가 승천한 이후 72명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다데오(Thaddaeus)가 아브가르왕을 약속대로 찾아가서 많은 사람들을 이교로부터 개종시켰다고 하는 것도 기록에 남아 있다. 팔레스타인 가이라사(Caerarea)의 주교인 역사학자 유세비우스(Eusebius)의 ‘교회의 역사’(History of the Church)에 아브가르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유세비우스의 저서에는 예수가 보낸 편지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없다.

 

‘에데싸의 얼굴’이라는 천 조각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제노아의 얼굴’이며 다른 하나는 바티칸에 있는 ‘성실베스트로의 얼굴’(Holy Face of San Silvestro)이라는 것이다. ‘제노아의 얼굴’은 제노아에 있는 아르메니아교회인 성바르톨로뮤교회에 있다. 일부에서는 ‘제노아의 얼굴’이 ‘토리노의 수의’와 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그건 그냥 가설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제노아의 얼굴’에는 예수의 얼굴만 나타나 있지만 ‘토리노의 수의’에는 한면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다른 면에는 전신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토리노의 성수의는 2006년 예루살렘에서 전시되었다.

 

 이밖에도 성수의에 관한 에피소드는 수없이 많지만 모두 살펴보는 것은 곤란하므로 이 정도로 그치고자 하며 다만, 프랑스에서 성수의에 대한 전설이 많은 것은 한때 교황청이 아비뇽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 또 어떤 고위성직자들은 토리노의 것이 되었든 에데싸의 것이 되었든 천조각에 예수의 얼굴 모습이 프린트되어 있는 것은 모두 믿을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이유는? 성경에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세에는 성서우선주의가 대유행이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와 있지 않는 얘기를 주장하면 자칫 이단으로 간주될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몰아붙이려면 성경에 없는 내용을 어찌하여 주장하느냐고 단호하게 내세우기만 해도 먹혀 들어갔다.

 

성수의가 2008년 다시 분석에 들어가자 전이탈리아가 큰 관심을 보였다. 2008년 노바라(Novara)시에서의 성수의 분석 내용을 설명하는 거리의 전시판 앞에 몰려든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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