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성물들/창에 얽힌 이야기

진짜 성창은 어디에?

정준극 2009. 11. 3. 00:21

[또 다른 성창들]

 

여러 곳에서 자기들이 참성창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창끝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중에서도 유력한 주장은 ‘바티칸 성창’, ‘아르메니아 성창’, 그리고 앞서 설명한 ‘비엔나 성창’이다. 우선 바티칸의 사정부터 알아보자. 성창의 존재에 대한 논란은 순례자인 피아센짜의 안토니누스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시온산교회에서 가시면류관과 성창을 보았다고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또 다른 기록에는 골고다의 성묘(예수님 무덤)교회에서 성창을 보았다고 되어 있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 성창을 보았다는 성안토니누스의 주장은 그후 카씨오도루스(Cassiodorus: 485-585)의 기록에도 나오며 프랑스 투르의 그레고리(538-594) 신부도 그런 주장을 했다. 그런데 투르의 그레고리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간 일이 없다.

 

예루살렘의 성묘(聖墓)교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무덤에 장사 지낸 동산의 장소에 기념교회를 세웠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예루살렘은 615년 파사(페르시아)왕 코스라우2세(Khosrau II: Chosroes II)에 의해 점령당했다. 코스라우2세는 예루살렘에 있는 수많은 성물을 노획하였다. 파사연대기에 의하면 그후 성창의 촉은 코스라우2세가 니세타스(Nicetas)라는 사람에게 주었고 니세타스는 이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교회에 간직하였다고 한다. 1244년 콘스탄티노플의 성창은 볼드위2세(Baldwin II)가 프랑스의 루이9세(Louis IX)에게 팔았으며 루이9세는 이를 파리의 생샤펠르성당에 보관하였는데 나중에 프랑스혁명 당시에 국립도서관으로 이전되었다가 그후에는 종적을 알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수소문이었다. 루이9세는 콘스탄티노플로부터 가시면류관도 사왔는데 가시면류관은 실은 골풀(등심초속의 식물: Rush)로 만든 다발이라고 한다. 가시면류관은 국립도서관에 있다가 현재는 루브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크레타의 테오파네스(Theophanes)가 그린 골고다. 모든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창은 끝 부분의 촉과 이를 창자루에 연결한 넓은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의 국립도서관에 있다가 사라진 것은 창의 촉 부분이며 연결부분은 아니다. 아르쿨푸스(Arculpus)라는 사람은 그가 670년경에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창의 윗부분인 연결파트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창의 윗부분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 어떤 주장에 따르면 8세기경에 예루살렘에 있던 창의 윗부분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 때에 가시면류관도 함께 옮겼다고 한다. 그후 여러 순례자들이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에서 연결부분을 보았다고 증거 했다. 특히 러시아 순례자들이 그런 주장을 했다. 1357년에는 영국의 존 만드빌경(Sir John Mandeville)이 파리에서 창의 촉을 보았고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창 촉을 연결한 부분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연결부분은 파리의 창 촉 부분보다 사이즈가 컸다고 한다.

 

성창은 한때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사진은 파리국립도서관의 리슐루재상홀

 

콘스탄티노플에 있다는 창의 윗부분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1492년의 기록에 의하면 터키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함으로서 터키의 수중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술탄인 바야지드2세(Bayazid II)는 성창을 교황 인노센트 8세(Innocent VIII)에게 선물로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바야지드의 라이발인 지짐(Zizim)을 교황이 포로로서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사례였다고 한다. 교황청이 성창을 보유하게 되자 당시 파리, 뉘른베르크(나중에 비엔나), 아르메니아에 있는 성창의 진위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18세기 중반, 교황 베네딕트 14세(Benedict XIV)는 파리에 있는 성창의 촉부분에 대한 그림을 확보하여 엄밀하게 조사한 결과,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에 보관하고 있는 성창의 윗부분과 파리의 성창 촉은 원래 한 개였는데 어떤 경로를 통해 두 개로 갈라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바티칸의 성창 파트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일이 없이 현재까지 베드로성당의 돔 아래에 보관되어 있다.

 

교황 인노센트8세(1432-1492). 중세의 교황처럼 생겼다.

 

[아르메니아의 성창]

아르메니아의 에크미아드진(Echmiadzin)이란 곳에도 성창의 윗부분이 간직되어 있다. 11세기 초, 제1차 십자군 병사들이 안디옥에서 발견한 것을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1108년 십자군인 피터 바르톨로뮤(Peter Bartholomew)는 환상 중에 성안드레가 나타나 성창이 안디옥(Antioch)의 성베드로성당에 묻혀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십자군들은 바르톨로뮤가 정확히 지시한 대로 교회 밖의 마당을 파헤친 결과 한 개의 창을 발견했다. 성창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안디옥에 퍼졌다. 사람들은 기적의 성창을 발견함으로서 승리를 다짐했다. 당시 무슬림은 십자군이 장악하고 있는 안디옥 성을 포위하여 일시에라도 공성할 기미였다. 십자군들은 마치 군기처럼 성창을 앞세우고 무슬림군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십자군들은 안디옥의 성창이 기적을 일으켰다고 믿었다. 일부 신학자들은 나중에 터키군이 안디옥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했을 때 성창을 차지하였다고 설명했다. 그것이 바로 바야지드2세가 인노센트 교황에게 보낸 것으로 현재 비엔나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비엔나의 성창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안디옥 성베드로성당의 지하에서 성창을 발견한 장면

 

[비엔나의 성창]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신성로마제국의 문을 연 오토1세(912-973) 시대로부터 별도의 성창을 간직하고 있었다. 서기 1000년, 오토3세가 폴란드왕 볼레스라브1세(Boleslaw I)에게 성창의 복제품을 만들어서 선물했다. 1084년 하인리히4세(Heinrich IV)가 은으로 두른 쇠못을 추가로 선물했다. ‘우리 주님의 못’(Nail of Our Lord)이라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간직하여 온 성창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보관하고 있던 것이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못도 함께 간직하고 있었다. 1273년 성창과 성못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에서 처음으로 공식 사용되었다. 이후 황제들은 성창과 성못을 두고 하나님께 성스러운 직분을 다하겠다고 서약하였다. 1350년에는 샤를르4세(Charles IV)가 성창과 성못의 가운데에 금을 입혔다. 그리고 금에 Lancea et clavus Domini(주님의 창과 못)이라고 새겨 넣었다.

 

비엔나의 제국보물실에 있는 성창(왼쪽)과 성십자가 조각을 황금십자가 안에 넣은 것(오른쪽). 가운데 십자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십자가.

 

1424년 지기스문트(Sigismund) 황제가 프라하 등에 흩어져 있던 성물들을 한데 모아 자기가 태어난 곳인 독일의 뉘른베르크(Nuremberg)에 영원히 보관토록 했다. 이를 라이히스클라인오디엔(Reichskleinodein: Imperial Regalia: 제국의 보물)이라고 불렀다. 1796년 봄,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독일을 집어 삼키기 위해 우선 뉘른베르크로 진격해 오자 시의원들은 성창을 비롯한 ‘신성로마제국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비엔나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재정관인 휘겔 남작(Baron von Hügel)이 보물들의 운송과 비엔나에서의 보관책임을 맡았다. 뉘른베르크는 비엔나에 대하여 평화가 오면 성창을 비롯한 보물들을 즉시 반환할 것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자 휘겔 남작은 혼란한 틈을 타서 성창을 비롯한 몇가지 성물들을 합스부르크의 프란시스1세(Francis) 황제에게 막대한 금액을 받고 팔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뉘른베르크 시의원들이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제국)에게 반환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거절당했다. 이후로 성창은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보물실(샤츠캄머)에 간직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제국은 성창이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 아니라 스위스에 있던 로마군단의 장군인 모리스로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성모리스의 창이라고 내세웠다.

 

터키의 안디옥에서 십자군들이 성창을 앞세워 이슬람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하였다는 내용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