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성물들/창에 얽힌 이야기

우슬초와 신포도주와 갈대 이야기

정준극 2009. 11. 3. 00:31

[우슬초와 신포도주와 갈대 이야기]

 

우슬초 말린것

 

성경의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전에 예수에게 신포도주를 주어 마시게 한 내용이 나온다. 신포도주를 왜 골고다까지 가져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만, 마치 마취제처럼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신포도주를 먹여 잠시 정신을 혼미케 하기 위함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을 할뿐이다. 신포도주는 몰약과 마찬가지로 마취제 역할을 한다는 얘기가 있다. 몰약은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할 때에 드린 세가지 선물 중의 하나이다. 얘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궁금한 것은 복음서마다 신포도주에 관한 내용이 달라서 과연 무엇이 사실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각 복음서가 가장 차이가 나는 것은 예수에게 신포도주를 마시게 한 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의 이른바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신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먼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십자가상의 예수가 목마르다고 하니 그제서야 신포도주를 해면에 적시어 입에 대어주었다고 되어 있다. 복음서에서 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자.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 마태복음 27: 34에는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후의 35절에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후에 그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처럼 마태복음에는 예수에게 먼저 포도주를 주었고 그 후에 십자가에 매 달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마태복음에는 신포도주라는 표현이 나오지 아니한다. 마가복음에도 그냥 포도주라고 되어 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만 신포도주라는 표현이 나온다. 마태복음에만 쓸개를 탄 포도주라고 되어 있다. 쓸개를 탄 포도주의 맛은 당연히 쓰다. 신맛과는 다르다. 이점에 대하여도 누군가는 설명을 해주어야 할 것이다.

 

마태복음 27: 45부터 50까지는 예수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시는 장면이 설며되어 있는데 그 중에 신포도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기록하였으되,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줴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포도주를 해면에 적시어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한 것은 예수께서 이미 십자가사에 계실 때이며 구체적으로는 몸에서 영혼이 떠나가기 직전이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였으나 예수께서 과연 마셨는지 마시지 않았는지에 대하여는 후속 설명이 없어서 알수 없다. 그리고 아마 짐작컨대 십자가상에 달려 죽음을 앞두고 있던지 또는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지 숨이 다히기 직전에 의례적으로 신포도주를 마시게 했던 것 같다. 이 점에 대하여도 더 연구가 필요하다.

 

- 마가복음 15: 23을 보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으며 그 다음의 24절에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라는 기록이 나온다. 역시 마태복음처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아니한 몰약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몰약은 대단히 구하기 힘들고 값비싼 약재였다. 설마 예수께서 33년전에 동방박사들로 부터 받은 몰약을 그때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사용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귀한 몰약을 별로 관심도 받지 않고 골고다까지 가져 왔다는 것은 특이하다고 할수 있다.

 

- 누가복음 23:33절에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 되어 있다. 이어 36절에는 ‘군인들이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포도주를 주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골고다에 온 후에 예수에게 신포도주를 마시게 하였던 것이니 마태, 마가복음과는 사뭇 상황이 다르다.

 

- 요한복음 19:29-30에는 ‘29 거기 신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그보다 훨씬 앞으로 18절에 ‘그들이 거기서 십자가에 못박고’라고 되어 있다. 요한복음에는 비로소 우슬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신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의 입에 대었다고 되어 있다. 우슬초는 유태인들이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제물의 피를 적시어 뿌리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용도의 것을 예수에게 사용한 것이다. 못말리는 유태인들은 예수를 악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았다. 요한복음에는 또 하나 흥미있는 표현이 있다. 19:30에 기록된 대로 ‘영혼이 (몸에서) 떠나갔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뉘일 때에는 영혼이 함께 하지 아니하고 육체만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러면 언제 영혼이 돌아왔는가? 어떻게 돌아 왔는가? 기분이 어땠을까? 이런 신통치도 않은 궁금증은 미국까지 가서 공부를 많이 한 신학박사들이 해명할 몫이다.

 

성십자가의 발견과 참십자를 구별하는 작업. 병든자가 참십자가에 손을 대니 즉시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오른편에 여인들에게 둘러 싸인 십자가를 말한다. 피에트로 델라 프란체스코 그림

  

또 한가지 예수의 죽음과 관련하여 관심을 가질 사항이 있다. 이른바 ‘다리를 꺾는 일’이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한 죄인들이 아직 죽지 않고 끈질기게 숨이 붙어 있으면 사형집행인들은 빨리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은 심정에서 죄수들의 다리를 꺾어 완전히 죽게 만들었다. 이것은 십자가형을 받은 모든 죄수들에게 해당하는 관습이었다. 그러면 예수의 다리도 꺾었는가? 성경에는 꺾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관련되는 구절을 살펴보자. 요한복음 19:32-36을 보면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되어 있어서 좌우 두명의 죄수에게 행한 것처럼 다리를 꺾지 아니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된 것이 성경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 점점 성서학자가 되는 것 같아서 미안하게 생각하며 기왕에 여기까지 왔으니 궁금증이나 풀고 지나가고자 한다.

 

예수의 다리를 꺾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구약 출애굽기, 민수기, 시편의 기록에 기인한 것이다. 즉, 출애굽기 12:46에는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꺼지 말지며’라는 기록이 있고 민수기 9:12에는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라는 기록이 있으며 시편 34:20에는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어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은 뼈를 온전하게 두신다는 것으로 유태인들은 장례에서 결코 뼈를 분지르거나 꺾는 일이 없다. 이는 나중에 부활에 대비하는 심성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예수가 고난을 받으실 때에 갈대도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7:29-30을 보면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태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라는 기록이 있다. 고난당하시는 예수를 그린 그림 중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음은 당연하지만 갈대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의 그림은 솔직히 하나도 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갈대가 너무 하찮은 존재여서 그랬다고 볼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유태인들은 참으로 지독하다. 가시관을 쓰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갈대로 치기까지 했으니 인정사정도 없는 사람들 같다.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 엘 그레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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