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전독일의 홀로코스트 추진

정준극 2009. 11. 16. 05:07

[독일의 총체적인 홀로코스트 추진]

 

히틀러의 나치가 집권하자 전독일은 똘똘 뭉쳐서 유태인 말살을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독일인들은 유태인들을 추방하고 학살하는 것이 독일 국민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독일은 어느덧 ‘유태인 인종청소 국가’로 변하였다. 독일의 모든 조직은 유태인 학살 프로젝트에 관계하였다. 교구교회들과 내무성의 하부조직들(우리로 치면 동사무소)은 출생기록부를 전부 조사하여 유태인들을 가려냈다. 우편국은 유태인들에게 추방명령서와 독일시민권을 박탈한다는 통지서를 열심히 전달했다. 재무성은 유태인들의 재산을 압수하는데 앞장 섰다. 독일의 기업과 공장들은 유태인 노동자들을 모두 해고했고 유태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증권들을 무효화했다. 대학교에서는 유태인들의 입학을 거부했고 재학 중인 유태인 학생들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다. 유태인 교수들도 모두 파면했다. 문화예술 활동에 있어서도 유태인에 의한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일례로 유태인 작곡가들의 작품은 연주하지 못했다. 정부의 교통부서는 유태인들을 강제수용소로 수송하는 화물열차편을 제공하였다. 독일의 제약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있는 유태인들을 대상으로 신약 테스트를 하였다. 독일의 건설업체들은 강제수용소와 화장장 시설을 건설하는데 주력했다. 독일의 히틀러유년대는 유태인들을 못살게 구는 것을 학교 숙제를 하는 것 정도로 여겼다.

 

독일 경찰들이 길에 쓰러진 유태인을 조롱하며 모두들 기뻐하고 있다.

 

주로 폴란드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끌려온 유태인들은 우선 가지고 있던 모든 물건들을 압수당했다. 유태인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금은보석들을 챙겨 가지고 왔지만 모두 나치의 주머니에 들어갔다. 나치는 유태인들로부터 압수한 귀중품 목록을 정리해서 독일로 보냈다. 상당수 물건들은 군수품으로 재활용되었다.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유태인들에 대한 파이널 솔루션(Final Solution: 엔드뢰중: Endlösung: 최종해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독일의 사회단체, 종교단체, 학술단체로서 유태인 말살 정책이 부당하다고 나선 단체는 하나도 없었다. 어찌된 셈인지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유태인들에 대한 독일의 처우를 부당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다만, 일부 기독교회는 유태인으로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핍박에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말을 꺼냈지만 그야말로 말뿐이었으며 아무런 후속조치도 없었다. 히틀러의 유태인 말살 정책이 순풍에 돛을 단듯 거침없이 추진될수 있었던 것은 독일 내에서조차 양심적인 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노르드하우젠 수용소의 참상. SS는 최대 20만명의 포로들을 살해했다. SS는 인종청소 임무를 자랑으로 여겼다.

 

[허구적 배경의 홀로코스트]

유태인 말살정책과 관련하여 나치가 내건 명분은 무엇이었나?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허구적이며 환상적인 이유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유태인들이 세계를 장악해서 통치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기 때문에 우수한 민족인 아리안들이 저급한 민족인 유태인들을 말살하여 새로운 세계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독일의 옛 전설과 신화에는 선의 상징인 아리안민족이 악의 상징인 유태인을 물리친다는 내용이 있다. 독일인들을 이러한 '전설 따라 3천리'를 뿌리 깊게 믿었다. 세상에 어떠한 인종핍박 정책도 신화와 환상과 추상적이며 비실용적인 주장에 근거를 두고 이루어지는 경우는 없다. 나치독일에서는 그것이 가능했다. 나치독일에서는 비현실적이며 비실용적인 주장이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방법이라는 주장과 함께 집행되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국가 지도자가 앞장서서 노약자와 여자들과 어린이들과 갓난 아이까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조속히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유럽의 거의 전역에서 추진되었다. 오늘날로 보면 유럽에 있는 35개국 이상이 나치의 학살에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한 셈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소련, 헝가리, 폴란드, 체코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사이프러스, 말타,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지브랄타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우즈베키스탄, 카자크스탄, 아제르바이잔, 타지크스탄, 키르기스탄,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우크라이나.....무수한 나라들에서 유태인 박해가 진행되었다.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 가장 극심했다. 스웨덴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정말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중동부 유럽에는 약 7백만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 그중에서 5백만명이 학살당했다. 폴란드가 가장 많았다. 3백만명이 죽임을 당했다. 소련 땅에서는 1백만명이 살해되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서도 수천명이 죽임을 당했다. 나치의 ‘엔드뢰중'(최종해결) 계획에 의하면 영국과 아일랜드의 유태인들도 말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치가 영국을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과 아일랜드의 유태인 말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봔제 빌라의 식당 겸 회의실. 이곳에서 유태인 말살(최종해결) 계획이 수립되었다.  

 

어떤 유태인들이 집단 학살의 대상이 되었는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물론, 증조할아버지(3대조) 또는 고조할아버지(4대조)가 유태인이었으면 예외 없이 청소대상이 되었다. 역사상 종교적인 이유에서 박해를 당하는 경우에 만일 유태교에서 다른 종교로 개종을 했거나 또는 어떤 방법으로든 유럽 사회에 동화되어 살면 예외로 인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 유태인이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여 살고 있다면 기독교 국가에서는 그를 박해를 하지 않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점령한 유럽에서는 그런 예외가 통하지 않았다. 비록 기독교로 개종을 했어도 호적상 선조들이 유태인이면 무조건 홀로코스트의 대상이 되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의 후손이면 예외로 인정하였다. 이 날을 기점으로 삼은 것은 그 날이 독일제국이 탄생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독일이 통치하는 영토에 옮겨 와서 산지가 50년이 안되는 유태인들은 비록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모두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더구나 기독교와 유태교는 상극이었다. 기독교는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 바로 유태인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는 메시아를 죽인 그런 나쁜 인간들을 모조리 없애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말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았다.

 

이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직행하는 기차길. 돌아오지 못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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