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히틀러도 유태 계통?

정준극 2009. 11. 16. 05:11

[히틀러도 유태인?]

 

오스트리아의 브라우나우 암 인에 있는 히틀러 생가 앞을 행진하는 나치 국방군. 건물은 나무잎으로 장식을 했으며 벽에 Hitlers Geburtshaus(히틀러 생가)라고 쓴 간판을 걸어 놓았다. 1938년 3월.

 

히틀러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시민이었다가 청년 시절에 독일 시민이 되었다. 히틀러가 태어난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마을의 가스트호프 춤 폼머(가스트호프는 여관이라는 뜻)의 앞에는 돌로 만든 기념비(Manstein)가 있다. Fü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 Nie wieder Faschismus / Millionen Tote Mahnen 이라고 적혀 있다. 성의껏 번역해 보면 ‘평화스런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 다시는 파치슴이 없어야 / 수백만의 사람이 희생되었다’라고나 할까? 독일어의 만슈타인(Manstein)은 보통 기념비가 아니라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내용의 석조 기념비를 말한다.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 암 인의 히틀러가 태어난 집 앞 길에 세워진 경고비(Mahnstein). 경고비에는 '평화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파치슴은 결코 다시는 없어야. 수백만명 죽은 사람들이 훈계를 한다'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Für Frieden, Freiheit und Demokratie Nie Wieder Faschismus Million Tote Mahnen 를 영어로 번역하면 For peace, freedom and democracy, Never again Fascism, Millions of dead admonish 이다.

 

6백만명의 유태인을 무자비하게 죽인 히틀러도 사실은 유태인 혈통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히틀러의 할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유태인이었다. ‘할아버지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히틀러의 할머니가 되는 쉬클그루버(Schiklgruber)는 농부의 딸로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 그라츠(Graz)에 있는 프랑켄버거(Frankenberger)라는 유태인집의 하녀로 들어가 일했다. 그 집에는 레오폴드(Leopold)라는 19세의 문제아가 있었다. 이 문제아가 쉬클그루버를 유혹하여 관계를 갖는 바람에 어쩔수 없이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Alois)가 태어났다. 정식으로 결혼하여 낳은 아이가 아니므로 사생아로 기록되었다. 하녀 쉬클그루버는 프랑켄버거의 집에서 쫓겨났다.

  

1938년 4월 클라겐푸르트에서 나치 친위대를 사열하는 히틀러. 그 뒤로는 하인리히 히믈러가 따르고 있다나치 친위대는 '충성은 명예'라면서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쉬클그루버는 어린 알로이스를 데리고 고생하며 살았다. 알로이스의 아버지라고 생각되는 레오폴드는 관심도 기울여 주지 않았다. 그런 알로이스가 히틀러의 아버지이다. 실제로 알로이스는 오래 동안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알로이스 쉬클그루버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어머니 쉬클그루버가 히들러(Hiedler)라는 사람과 새로 결혼해서 살게 되자 알로이스도 쉬클그루버라는 이름 대신에 새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히들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히들러라는 이름은 휘틀러(Hüttler)로 변했고 다시 Huettler가 되었다가 동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정리하면서 히틀러(Hitler)라고 잘못 쓰는 바람에 히틀러가 되었다. 히틀러(휘틀러)는 ‘오두막집(Hut)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나중에 히틀러의 아버지가 되는 알로이스는 어린 시절에는 구두 만드는 견습공이었으나 18세 때에 국경수비대에 들어가 세관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히틀러. 이 놈이 커서 나중에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처음에 안나 글라쓸(Anna Glassl)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여 두 아이까지 두었으나 3년후에 헤어지고 클라라 푈츨(Klara Pölzl)이라는 먼 친척이 되는 여자와 결혼했다. 원래 클라라는 알로이스 집의 살림을 도와주기 위해 가정부로 들어온 여자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23년의 차이) 결혼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문제의 아돌프 히틀러는 그중에서 4번째 자녀였다. 큰 아들 구스타브(Gustav), 큰 딸 이다(Ida), 둘째 아들 오토(Otto)는 모두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높았다.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만은 요행이 오래 살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56세까지 살다가 잘 아는 대로 1945년 4월 30일 바로 하루 전날 결혼식을 올린 부인 에바 브라운과 권총자살하여 황천길로 떠났다. 아돌프의 남동생인 에드문트(Edmund)는 일찍이 1900년에 세상을 떠났고 막내인 여동생 파울라(Paula)는 그나마 오래 살아서 1960년에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의 여동생 파울라는 결혼후 미국으로 도피하여 이름과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냈다.

 

1939년 비엔나에서 일단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히틀러. 히틀러는 1889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 암 인에서 태어났다.

 


어린 아돌프 히틀러는 아마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할아버지 레오폴드가 할머니 쉬클그루버를 비정하게 버린 이야기, 아버지 알로이스가 할머니의 손에서 어렵게 자랐던 얘기 등을 들었을 것이다. 어린 아돌프 히틀러의 가슴 속에서는 은연중에 할아버지인 유태인 레오폴드를 증오하는 마음이 자라났을 것이다.

 

 스트리아 브라나우 암 인에 있는 히틀러 생가.  생가 앞에는 파치슴을 경고하는 비석이 놓여 있다.

 

오늘날의 브라우나우 암 인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 마을에서 히틀러가 태어났으며 나치 시대에는 이 마을이 마치 성지와 같은 대우를 받았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어떤 주민들은 자기들 마을이 히틀러의 고향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히틀러의 여동생 파울라. 오스트리아에서 1945년까지 독일 군병원에서 비서생활을 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미국으로 도피하여 미국에서 신분을 감추고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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