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광인 히틀러

정준극 2009. 11. 16. 05:09

[광인 히틀러]

 

'우리는 아돌프 히틀러를 위해 노래합니다.'(Wir singen für Adolf Hitler)라는 플라카드 아래에서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이 히틀러식 경례를 하고 있다. 아마 히틀러가 비엔나에 와서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을 만났던 모양이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드디어 정권을 잡았다. 그로부터 즉각적으로 독일에 살고 있는 52만 5천명의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독일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의 일부는 미리 독일을 빠져나갔지만 대부분은 체포되어 모진 운명의 길을 걸어야 했다. 히틀러는 1935년에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유태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만일 자기가 집권하게 되면 유태인들을 독일의 정치계, 문화계, 학계에서 모조리 추방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유태인들을 말살(처형)하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개인적으로 유태인들을 모조리 없애겠다고 분명히 얘기했다. 예를 들어 1922년 그는 조셉 헬(Joseph Hell)이라는 언론인에게 그러한 얘기를 했다. 진실로 미친사람(광인)이 아니면 하지 못할 얘기였다.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는 구두만드는 견습공 출신이었다가 국경수비대의 세관원이 되었다. 히틀러의 할아버지는 그라츠에 살던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제법 잘 사는 유태인 집안의 못된 아들이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친할머니가 되는 여인은 그 유태인 집의 하녀였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주인집 아들이 하녀와 동침하여 아들 알로이스를 낳게 되었다. 알로이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성을 정식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따라 출생신고가 되었다. 주인집 아들인 유태인이 어머니를 헌신짝 버리듯이 몰라라 하자 어머니는 아비 없는 아들 알로이스와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 마침 히들러라는 사람과 결혼하였고 이에 따라 비로소 히들러(Hidler)라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사생아인 히틀러의 아버지는 히들러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그러다가 알로이스는 클라라라는 관찮은 아가씨를 만나서 결혼하였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결혼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갔을 때 동사무소 직원이 호적에 이름을 히들러(Hidler)라고 쓰지 않고 히틀러(Hitler)라고 잘못 쓰는 바람에 그로부터 히틀러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알로이스와 클라라의 아들로 태어난 아돌프도 히틀러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아무튼 히틀러의 유태인 증오는 아마도 유태인인 주인집 아들이 나중에 히틀러의 할머니가 되는 하녀를 능욕하고서 버린 사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히틀러의 어머니 클라라와 아버지 알로이스. 

 

“내가 정말 집권하게 되면 가장 우선되는 임무는 유태인들을 제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뮌헨의 중심가인 마리엔플라츠에 교수대를 한줄로 만들어 놓고 유태인들의 목을 매달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게 만들겠다. 나는 교수형으로 죽은 유태인들의 몸이 썩어서 악취가 날 때까지 이들을 매달아 놓겠다. 그러다가 위생적으로 도저히 더 이상 매달아 놓기가 어렵다고 생각되면 이들을 내려놓고 다음 차례의 유태인들을 데려와 목을 매달 것이다. 그래서 한줄로 길게 대기하고 있는 유태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목을 매달 것이다.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이와 똑 같이 할 것으로 생각한다. 전독일 내에서 유태인들을 완전히 쓸어낼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할 것이다.”...이것이 어찌 인간으로서 할수 있는 말이라는 말인가? 더구나 히틀러는 자칭타칭의 지도자(Führer)가 아니던가?

 

히틀러의 탄생지인 오스트리아 북서부 브라우나우 암 인의 중심지. 인(Inn)강변에 있기 때문에 브라우나우 암 인이라는 지명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서쪽 끝, 독일과의 접경 지역인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이라는 마을의 가스트호프 춤 폼머(Gasthof zum Pommer)라는 여관집 다락방에서 태어났다. 히틀러가 순수 독일 출신이 아니고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히틀러는 독일국민이야말로 1등 국민이며 오스트리아 백성들은 2등 국민이라는 식으로 얘기해 왔다. 잘츠부르크의 서북쪽에 있는 비교적 작은 도시인 브라우나우 암 인에서 태어난 히틀러는 어린 시절은 프라우나우 암 인에서 멀지 않은 레온딩()에서 보냈으며 얼마후 티슐함()에서 학교를 다녔다. 청년이 된 히틀러는 화가로서 직업을 택하기 위해 비엔나에 가서 미술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지만 실력이 미흡하다고 해서 허락을 받지 못했고 1년 후에 다시 입학원서를 냈지만 역시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합격이 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뮌헨으로 가서 군대에 입대하여 하사로 있다가 나치당에 참여하였고 1933년에 드디어 독일 제3제국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의 수상집무실 지하벙커(Führenbunker)에서 청산가리 캡슐을 깨무는 것과 동시에 권총으로 관자놀이를 쏘아 자살했다. 환갑잔치도 치루지 못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Eva Braun)이라는 약간 관찮게 생긴 어린 여자와 12년 동안 정부로서 함께 지내다가 자살하기 바로 하루 전날인 1945년 4월 29일 뜻한바 있어서 목사님을 데려다가 결혼식을 급작히 올렸다. 측근 몇 명만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자녀는 없다.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가 자살하기 비로 직전에 청산가리를 깨물고 자살했다.

 

  

히틀러의 2일간 정식 부인이었던 에바 브라운.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 전속사진사의 조수 겸 모델이었다. 17세에 뮌헨에서 23세 연상의 히틀러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고 한다. 좀 정신이 어떻게 된 여자 아닌가? 대단하다. 오른쪽 그림은 히틀러가 직접 그린 에바 브라운의 모습. 히틀러의 그림 솜씨를 보면 과연 비엔나미술대학교가 '자격 없음'이라면서 입학을 거부한 심정을 이해할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히틀러의 옆에 바짝 붙어서 유태인 학살의 총책임을 맡았던 악명 높은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독일 졸링겐에서 태어났으나 여덟살 때인 1914년에 광산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오스트리아의 린츠로 와서 10년이 넘게 살았다. 아이히만은 1927년부터 석유를 순회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홀로코스트의 설계자'라고 하는 아이히만은 1932년에 나치당에 가입하였으나 오스트리아에서 나치당이 불법단체로 규정받자 다시 독일로 가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에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동구의 유태인들이 사용하는 이디시어(語)에 능통한 그는 비엔나에 설치된 유대인 이주국 책임자가 되었으며 후에 국가안보경찰본부(RSHA)의 유대인담당 과장이 되었다. 그는 나치스친위대(SS)의 중령으로서, 독일점령하의 유럽에서 유대인 탄압의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친위대 장교 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과 이스라엘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아이히만. 아이히만과 같은 작자는 사진도 크게 쓸 필요가 없어서 작게 사용했다.


사실상 아이히만의 지휘로 체포되어 강제수용소에서 희생된 유대인 수는 약 600만명에 이른다. 그는 독일의 패전 무렵, 남부 독일에 진주한 미군에게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에서 가족과 함께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숨어 살았다. 그러나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에게 발각되어 직장에서 돌아오던 중 강제연행되어 이스라엘까지 비밀리에 호송되었다. 그는 1961년 4월부터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재판에 회부되어 그 만행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재판은 이스라엘에서 1961년 4월부터 4개월간 열렸는데, 그해 12월 사형이 확정되어 이듬해인 1962년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은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의한 집요한 추적, 타국의 주권을 무시한 체포와 연행, 공판 중 아이히만의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의 죽음은 단지 통계상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망언으로 유명하다.

 

북부 오스트리아의 람바흐(Lambach). 히틀러가 1897-98년간 살면서 초등학교 3학년에 다녔던 마을이다. 트라운강변의 람바흐 수도원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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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의 생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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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의 히틀러 생가. 건물에는 히틀러에 대한 어떠한 설명판도 붙어 있지 않다. 다만, 공용 도로에 검은 돌에 새긴 몇마디가 있을 뿐이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히틀러의 생가라는 명판을 붙이겠다고 하자 집주인인 웬 여자는 자기 집이 히틀러가 태어난 집이라고 광고를 해 놓으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표적이 된다고 해서 반대했다는 것이다.

 

히틀러의 생가가 문제가 되고 있다. 현재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이다. 그 집은 원래 방들이 여러 개가 개별적으로 있는 여관이었다. 그러므로 원 룸 아파트로 임대를 하면 좋다. 실제로 전쟁후에도 상당 기간동안 원 룸 아파트로서 임대를 했었다. 브라우나우 암 인 마을은 인구가 2만이 안된다. 그런데 도시는 계속 번영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집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가 태어난 집은 방이 비어 있어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이 태어난 집이기 때문이다. 원래 여관을 했던 집이다. 그래서 원 룸 스타일로 월세를 주는 것이 아주 적당한 집이다. 위치도 좋다. 시내 중앙 광장에서 가깝다. 집의 상태도 깨끗하다. 전쟁 중에는 나치가 특별히 보호하였고 전쟁 후에는 집주인이 다시 칠을 하고 수리를 해서 아주 말끔한 집이 되었다. 그런데 들어와서 살겠다는 사람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혹가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세를 들어온 사람도 얼마후에는 이 집이 그 집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가겠다면서 돈을 빼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이다. 반나치주의자들이 멀리서부터 몰려와서 집 앞에서 데모를 하고 난리를 피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집주인은 물론 세들어 있는 사람들도 언제 또다시 반나치 시위자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질지 모르므로 불안한 입장이다.  방이 비어 있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방을 빌려줄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히틀러가 살았던 집이라고 해서 신나치주의자들이 성지로 여기고 몰려와 살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더 골치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다. 현재 이 집의 매매시세는 약 2백 20만 유로이다. 한화로 계산하면 약 30억원이 된다.

 

히틀러 생가 앞에서의 반나치 시위. 한번이 아니고 간혹 이런 시위가 열린다.

 

이 건물은 종전후 상당기간 동안 정신 장애우들을 돕는 단체가 사무실로 사용했다. 히틀러가 수만명이나 되는 정신 및 지체 장애자들을 사회에서 필요없는 계층이라고 해서 유태인들과 함께 청소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정신장애우들을 돕는 단체가 히틀러의 생가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사업을 한 것은 브라우나우 암 인 주민들의 일종의 속죄라고도 볼수 있다. 그런데 그나마 사무실로 사용하던 정신장애자 돕기 단체가 2009년에 더 넓은 다른 건물로 이전하여서 현재는 거의 비어 있는 상태이다. 그렇게 되자 이 건물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느냐에 대한 논란이 다시 거세게 일어났다. 브라우나우 암 인의 시장은 이 건물이 반나치운동의 본부처럼 되어서 성가신 일들이 벌어지느니 보다는 아예 철거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짓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시장은 '우린 이미 많은 비난을 받아 왔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가?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반나치주의자들이 단번에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시장이 과거의 쓰라린 역사를 파묻으려 한다면서 시장을 비난했다. 반나치주의자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참을만큼 참아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지우려 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돌아가느라고 브라우나우 시의회는 브라우나우가 히틀러에게 브라우나의 명예시민으로 삼은지 78년만인 2008년에 명예시민으로 삼은 것은 철회하였다. 그것을 두고서 반나치주의자들은 브라우나우의 시의회가 아직도 나치에 대하여 동조 내지 동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면서 공격의 화살을 늦추지 않았다. 그런 때에 브라우나우의 시장이 히틀러의 생가를 허물고 아파트를 짓겠다고 선언하였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시에서 주관하여 그 건물을 매입하고 용도대로 사용한다는 것은 타당한 조치이겠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브라우나우시가 그 건물을 매입할 예산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치시대처럼 강제 수용할수도 없는 일이다.

 

레온딩을 찾아온 히틀러를 열렬히 환영하고 있는 주민들

 

그러나 정작 걱정은 만일 아파트로 전환하면 히틀러를 신처럼 숭배하는 신나치주의자들이 들어와 살겠다고 계속 요구할 때에 거절만 할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브라우나우의 히틀러 생가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일반 관광객들이 아니라 대부분이 신나치주의자들이다. 이들은 히틀러의 생가를 성지처럼 여기고 있다. 시당국은 브라우나우가 신나치주의자들의 성지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따지고 보면 히틀러는 브라우나우의 이 건물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마 아주 어릴 때에 레온딩(Leonding)이라는 마을로 이사를 갔고 또 람바흐(Lambach)라는 곳에 가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이어 휘슐함(Fischlham)이라는 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미술대학교에 들어가려고 비엔나에서 몇 년을 허송세월하다가 '에라 군대나 가서 출세하자'라고 생각하여 뮌헨으로 가서 독일군에 입대하였다. 계급은 하사였다. 그러다가 나치당에 합류하게 되었고 결국 1933년에 독일의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니 브라우나우는 사실상 히틀러의 어린 시절 추억이 머문 곳이라고 말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곳이다.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직후 비엔나로 가는 중에 여러 도시를 방문했다. 열렬히 환영받기 위해서였다. 그때 브라우나우도 잠시 들렸었다. 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건물이라고 해서 특별히 애정을 가지고 감격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바쁜 중에도 레온딩과 휘슐함을 찾아가서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레온딩에는 히틀러의 아버지, 어머니의 묘지가 있고 휘슐함에는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있다.

 

레온딩의 히틀로 부모 묘지

레온딩의 부모 묘지를 찾아온 히틀러

 

오스트리아 내무성은 1972년에 브라우나우의 히틀러 생가를 주인 여자로부터 임대하였다. 60대인 주인 여자는 내무성과 계약을 체결하면서 제발 자기의 이름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와 연관 짓는 것이 싫어서였다. 그여인은 건물에 히틀러 생가니 무어니 하는 명판도 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히틀러 생가를 임대한 내무성은 다시 그 집을 다른 사람들에게 임대키로 하였다. 그러나 입주자에 대하여는 과거에 나치를 찬양했었는지, 히틀러를 존경하고 있는지 등을 자세히 따져보고 임대계약을 맺었다. 그래서 들어온 것이 정신장애자 돕기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현관 출입문 상단의 철제 주물에는 MB 라는 이니셜이 있다. 이것은 이명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Martin Bormann)을 말한다. 마르틴 보어만은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에 이 집을 샀다. 훗날 히틀러 사당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이 집의 소유주가 마르틴 보어만이 되다보니 현관에 그의 이니셜을 만들어 붙였던 것이다. 사실상 이 집은 히틀러와 관련된 건물들 중에서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물론 히틀러가 비엔나에 2년 동안 있을 때 잠시 지내던 기숙사도 아직 남아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 히틀러가 머물렀던 집은 찾아볼수없다. 대체로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 히틀러가 10대의 소년시절을 보낼 때 몇 년 동안 살았던 레온딩의 집은 현재 공동묘지를 위한 관(棺)보관소로 사용되고 있으니 그건 기념할 만한 일이 아니다.

 

레온딩의 히틀러 부모가 살던 집. 히틀러도 어린 시절에 이 집에서 두어해를 살았다. 나치는 이를 기념하여 Elternhaus des Fuhrers im Leonding(레온딩의 지도자 부모의 집)이라는 제목과 함께 사진엽서를 만들어서 소개했다. 현재는 레온딩 공동묘지와 관련하여 관을 보관하는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레온딩의 공동묘지에는 히틀러의 부모인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히틀로의 합장묘지가 있었다. 신나치주의자들이 순례지로 삼고 있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친척되는 사람들이 이장하겠다고 해서 2008년인가에 옮겨졌다. 히틀러에게는 누이가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을 파울라(Paula)라고 했다. 히틀러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파울라는 레온딩에서 살았고 결혼해서 자녀들도 두었다. 파울라의 후손들이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히틀로 부모의 묘소를 이장했던 것이다. 그 묘소가 일반 대중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고 있고 신나치주의자들에게는 순례지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이장했다. 히틀러가 다녔던 브라우나우 인근에 있는 휘슐함의 학교에는 히틀러가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명판이 붙어 있다. 히틀러가 다녔다는 사실만으로 학교를 없앨수는 없으므로 대신에 학교가 무슨 죄가 있겠느냐마는 하여튼 속죄의 뜻에서 그런 명판을 붙였던 것이다. 히틀러가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한 베를린의 지하 벙커는 전쟁 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동독 당국은 1980년대에 그 자리에 아파트 단지를 지었다.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아파트에서는 홀로코스트로 희생 당한 사람들의 기념비가 바로 보인다. 다시 브라우나우의 히틀러 생가로 돌아가서 집 주인인 노파는 자기의 집을 홀로코스트 기념관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계획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 노파는 언젠가는 자기 집이 적당한 보상을 받고 철거되고 그 자리에 보눙(아파트)이 들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브라우나우의 대부분 시민들은 그 집을 그대로 두어서 히틀러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알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다.

옆에 흐르는 강이 인강이다. 브라우나우 암 인은 아름다운 도시이다. 관광객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저 멀리 미국 등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우정 히틀러의 생가를 찾아가서 집안에 아무것도 없거니와 개인집이기 때문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기념사진이나 찍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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