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미술대학 지망생

정준극 2009. 11. 16. 05:12

[미술대학 지망생]

 

히틀러의 홈컴잉. 1938년 3월 고향인 브라우나우 암 인을 방문한 히틀러를 시민들이 크게 환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서북방 브라우나우 암 인(Braunau am Inn)에서 태어난 아돌프 히틀러는 3살 때에 가족을 따라 독일 파싸우(Passau)로 이사 갔으며 5세 때에는 다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돌아와 린츠(Linz) 부근의 레온딩(Leonding)에 와서 살았고 1년 후인 6세 때에는 람바흐(Lambach)로 가서 살았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작은 밭을 가지고 농사를 지었으며 양봉업자들을 위해 겨울에 벌을 맡아서 보관해주는 일도 했다. 아버지 알로이스는 아돌프가 14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돌프는 15세 때에 가톨릭중학교에 들어갔으나 가정형편상 제대로 공부를 마치지 못했다. 아무튼 히틀러는 가톨릭중학교에 다니면서 정식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히틀러는 16세 때인 1905년에 비엔나로 와서 고아원과 같은 시설에 들어가서 지냈다. 어머니 클라라가 돈을 벌어서 가끔 고아원 경비를 보내주었다. 그러던 어머니 클라라는 아돌프가 18세 때인 1907년에 요단강을 건너갔다. 여동생 파울라는 먼 친척 집으로 흩어졌다.

 

히틀러가 입학하려던 비엔나미술대학교. 만일 입학을 허용했더라면 히틀러는 나치를 이끄는 총통이 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2차 대전도 없었을 것이고 수천만명의 인명도 희생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나미술대학교의 원인제공이 크다는 설명이다. 

 

아돌프는 혼자서 벌어먹어야 했다. 재산도 없고 직위도 없으며 배운 것도 없는 아돌프는 용하게도 그림 그리는 재주는 있어서 미술을 공부하여 화가로서 벌어먹을 결심을 했다. 1907년, 당시 린츠에 살던 아돌프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서 알아주는 미술대학인 비엔나 미술대학(Akademie der bildenden Künste Wien: Academy of Fine Arts Vienna)에 들어가고자 입학원서를 냈다. 하지만 ‘그림에 적성이 맞지 않음’(Unfitness of Painting)이라는 코멘트와 함께 입학이 거부되었다. 아돌프는 그림엽서를 그리거나 풍경 수채화를 그려서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살았다. 유화도 그렸다. 아돌프는 비엔나의 제1구 헤렌가쎄(Herrengasse)에 있는 미노리텐교회(Minoritenkirche)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가 미노리텐교회를 그린 유화 한 점은 현재 그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

 

히틀러가 자주 그린 비엔나 중심가의 미노리텐교회. 이 교회는 실제로 히틀러가 그린 유화 1점을 보관하고 있다.

독재자의 또 다른 면. 히틀러의 그림. 비엔나의 칼스키르헤

 

아돌프 히틀러는 그 다음해인 1908년에도 다시 비엔나미술대학에 입학원서를 냈다. 또 거부당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 사회가 나의 미술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하고 결국은 화가가 되려는 꿈을 포기했다. 만일 그 때에 비엔나미술대학이 히틀러를 학생으로 받아 들였더라면 세계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며 수백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들도 홀로코스트의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아돌프 히틀러가 비엔나미술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유태계통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유태인으로서 이 대학을 나온 유명화가들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유태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고 있지 않았었다. 비엔나미술대학을 거친 유명화가로서는 고트프리트 헬른봐인(Gottfried Helnwein), 알프레드 흐르들리카(Alfred Hrdlicka), 에곤 쉴레(Egon Schiele), 파울 트로거(Paul Troger), 프란츠 안톤 마울버츄(Franz Anton Maulbertsch), 루돌프 폰 알트(Rodulf von Alt), 오토 바그너(Otto Wagner), 프리덴스라이히 훈데르트바써(Friedensreich Hundertwasser) 등이 있으며 그 중에는 유태계도 상당히 있다. 이들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비엔나에서 활동한 미술가들’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히틀러의 인생에 영향을 준 세 사람. 왼쪽으로부터 칼 루에거 비엔나 시장,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독일 국수주의자인 게오르그 리터 폰 쇠너러. 모두 반유태주의자들이었다.

 

히틀러는 1910년부터 1913년까지 비엔나의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의 멜데만슈트라쎄(Meldemannstrasse)에 있는 극빈노동자숙소에서 지냈다. 지금도 이 집은 히틀러가 머물렀던 집으로 기념되고 있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머물면서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다. 캐른트너 링(Kärntner Ring)에 있는 제국호텔(Imperial Hotel)에서 포터 및 청소부로 일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1938년 독-오 합병 직후, 마치 개선장군처럼 비엔나에 입성하여 헬덴플라츠(Heldenplatz)에서 20만 시민이 모인 가운데 ‘이제 오스트리아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며 합병의 타당성을 강조한 후 바로 그 제국호텔에 보란 듯이 투숙하였다. 히틀러는 비엔나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서 유태인들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 배가 아팠을 것이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세 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첫째는 비엔나 시장이던 칼 루에거(Karl Lueger: 1844-1910)였다. 그는 기독교사회당을 창당하였으며 반유태주의 정책을 지향하였다. 다음이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였다. 아리안민족의 우수함을 은연중 강조한 바그너의 신화적 작품이야 말로 히틀러의 취향에 맞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종교지도자 겸 국수주의자라고 할수 있는 게오르그 리터 폰 쇠너러(Georg Ritter von Schönerer: 1842-1921)였다. 쇠너러는 이른바 Los-vom-Rom-Bewegung(Away from Rome Movement)을 주도하였다. 독일의 영향을 받아 로마가톨릭을 개신교인 루터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는 운동이었다. 그는 진부한 로마가톨릭이 유태인들과 결탁되었다고 보았다.

 

히틀러가 비엔나에서 거의 3년동안 지냈던 멜데만슈트라쎄의 노동자 기숙사. 이때 웬만한 직장만 구했어도 히틀러라는 인간은 인류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터인데...

 

공식적으로는 2일간의 미세스 히틀러인 에바 브라운(에바 히틀러)은 1912년 뮌헨에서 태어났으며 뮌헨에서 사진사 조수로 활동하던 중에 17세 때에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에바 브라운은 학교 선생님의 딸이었다. 히틀러는 한번 다른 여자와 약혼한 일이 있는데 정치하느라고 바빠서 관심을 끊자 결국 파혼되었다. 그후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은밀하게 함께 지내며 자기 딴에는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에바는 승승장구하던 히틀러가 수세에 몰리고 결국은 파멸할 기운이 돌자 역사에 이름이나 남기자는 생각해서인지 느닷없이 정식 결혼을 요청하여 두 사람은 동반자살하기 한달전에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에바는 청산가리를 깨물고 죽었다. 향년 33세.

 

버그호프 산장에서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두 사람은 동반자살하기 하루 전에 목사님을 데려와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치지도자들이 개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미친듯이 좋아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자기들도 동물을 사랑하는 천사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제스추어이라고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환경보호주의자, 동물애호주의자 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개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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