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떠나가는 지식인들

정준극 2009. 11. 16. 05:14

[법적으로 옥죄기]

 

1930년대부터 유태인들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옥죄이려는 시도가 착착 진행되었다. 우선 ‘누가 유태인인가?’부터 규정하기로 했다. 나치는 조상이 유태인이면 무조건 유태인으로 간주키로 했다. 유태교를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도 1871년 1월 18일 이후에 개종하였으면 유태인으로 인정하였다. 1871년 1월 18일은 독일제국이 창설된 날이다. 나치는 독일이 ‘순수한 혈통’으로 힘을 얻는다고 선전했다. 그리고 ‘신성한 독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사람’만이 독일의 순수혈통이며 다른 나라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순수 독일인이 아니라고 보았다. 나치가 공식적으로 독일 제3제국의 정권을 장악한 1933년에는 사회, 경제, 문화, 교육의 각 분야에서 유태인을 추방하고 순수 아리안족이 주도하는 사회가 되도록 한다는 법률들이 통과되었다. 예를 들면 새로운 ‘공직자 회복법’은 공직사회에서 유태인들을 몰아낸다는 내용이며 새로운 ‘농업법’은 유태인들이 농토를 소유하거나 농사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이었다. 유태인 변호사들은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유태인 의사가 아리안 민족을 진찰하거나 수술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법도 마련되었다. 드레스덴에서는 유태인 변호사와 판사들이 법정에서 끌려 나가 집단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중인 1916년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1847-1934). 힌덴부르크는 1925-1934년간 독일의 대통령을 지냈으며 그의 재임기간중 마지막에 히틀러가 수상을 지냈다(1933-34).

 

1930년 당시 대통령인 힌덴부르크(Hindenburg)는 히틀러의 나치에 의한 조치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가지 제안을 하였다. 그중의 하나는 1차 대전에서 공을 세운 유태인들은 공직사회에서 축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또 아버지나 아들이 1차 대전에서 공을 세웠으면 그 사람도 공직에서 쫓아내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들을 단순히 조상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사회에서 제외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믿었다. 수상인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37년 그러한 예외조항을 모두 무효로 했다. 유태계 교사들은 학교에서 추방되었다. 유태계 언론인들도 모두 신문사나 방송국에서 추방되었다. 언론기관을 소유하고 있던 유태인들도 모두 제외되었다. 그렇게해서 그나마 한가닥 존재했던 유태인들의 언로를 틀어막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탄넨버그(Tannenberg)에서 힌덴부르크 대통령 추모집회(1935년 10월)를 거창하게 열었다.

 

[히틀러의 결혼정책]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법’을 도입키로 했다. ‘뉘른베르크 법’의 골자는 독일의 명예와 독일의 순수혈통을 보호하기 위해 유태인과 아리안간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유태인과 아리안이 결혼하여 있으면 무효로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내용은 독일에서 모든 유태인의 공직근무를 금지한다는 것이다. 유태인은 하다못해 시청 환경미화원조차 할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모든 유태인의 독일시민권과 민권을 박탈한다는 내용도 포함하였다. 독일사회에서 유태인을 완전히 몰아내려는 법안이었다. 히틀러는 이 법안들의 도입을 소개하면서 ‘만일 이들 법으로 유태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최종해결(파이널 솔루션: 엔드뢰중: Endlösung)을 위해 나치당이 직접 나서서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일종의 협박이었다. ‘뉘른베르크 법’은 제국의회를 통과하였다. 이로부터 ‘엔드뢰중’이라는 단어는 유태인 말살을 위한 나치의 표준용어가 되었다.

 

제3제국의 라이히 마르크. 제3제국은 순수 아리안 여성을 통한 종족 보존을 중요시했다. 화폐에 등장한 여인이 전형적인 순수 아리안 여인이다.

 

[떠나가는 지식인들]

‘뉘른베르크 법’의 통과와 함께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유태인들이 하나 둘씩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유태인들은 ‘설마 독일이 우리에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더 두고보자’고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마가 사람 잡는 판국으로 치달았다. 사실 ‘뉘른베르크 법’이 통과되기 이전부터 나치의 수상하고 음흉한 속셈을 간파한 유태인 지식인들은 속속 독일을 떠나 피난처를 구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저명한 철학자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파리로 떠났다. 작가인 레온 포이히트방거(Leon Feuchtwanger)는 스위스로 떠났다. 저명한 지휘자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는 만일 그가 베를린 필을 지휘한다면 베를린 필의 연주회장에 불을 지르겠다는 심각한 협박이 있은 후 역시 저명한 지휘자인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와 함께 독일을 떠났다. 독일의 유력 신문인 프랑크푸르터 차이퉁(Frankfurter Zeitung)은 그해 4월, 독일 정부는 브루노 발터와 오토 클렘페러를 더 이상 보호할 수가 없게 되었으며 이들이 그 같은 독일의 분위기(무드)를 알고 스스로 독일을 떠났다고 보도했다.

 

약간 젊은 시절의 아인슈타인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1933년 1월에 미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으로 돌아왔으나 독일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한동안 벨기에에서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카이저 빌헬름 협회’와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추방되었으며 독일시민권도 박탈당했다. 아인슈타인인 1879년 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프러시아예술원 명예원장인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이 사임했을 때에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며 따르던 독일인들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막스 리버만은 믿었던 독일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자 2년후에 속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몇 년후인 1943년 경찰들이 85세 노령인 리버만의 미망인을 추방하려고 들것을 들고 왔을 때 리버만 부인은 이들에게 끌려가 추방당하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여 약을 먹고 자살했다. 대단한 할머니였다.

 

막스 리버만. 화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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