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폴란드의 수난

정준극 2009. 11. 16. 05:16

[나치 점령의 폴란드]

 

1939년 9월 나치는 폴란드를 침범하였다. 나치는 폴란드 서부를 점령하였다. 이곳에는 폴란드의 유태인 2백만 명이 살고 있었다. 나치로서는 서부 폴란드의 유태인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당장의 큰 걱정이었다. 나치가 폴란드의 서부를 점령하자 소련도 재빨리 움직여서 폴란드의 동부를 장악했다. 2차 대전이 정식으로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는 이미 나치와 이른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을 맺고 서로 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리고 폴란드를 땅따먹기 식으로 서로 나누어 가졌다. 이에 따라 폴란드의 서부를 점령한 나치독일은 서부의 북쪽은 독일로 합병을 하였고 남쪽은 별도의 정부를 세워 나치의 괴뢰인 한스 프랑크(Hans Frank)라는 작자가 이끌도록 했다.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 호주, 남아프리카, 프랑스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서 2차대전의 막이 올려졌다.

 

독일과의 불가침조약을 서명하는 소련의 몰로토프. 독일의 리벤트로프와 스탈인이 지켜보고 있다. 이에 따라 독일이 폴란드의 서부를 침공하자 소련은 가만히 있다가 몇달후에 은밀히 군대를 보내어 폴란드의 동부를 점령하였다. 불쌍한 폴란드.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 1929-1945)의 오른팔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Reinhard Heydrich: 1904-1942)는 폴란드의 유태인들을 각 도시에 게토를 만들어 집단수용함이 가능하므로 재가하여 달라고 건의하였다. 하이드리히는 유태인들을 게토에 몰아 넣은후 독일의 군수산업을 위해 공짜로 부려먹자고 제안했다. 게토는 철도연결지점에서 가까운 지역에 설치하자는 건의도 잊지 않았다. ‘미래조치’를 위해서였다. ‘미래조치’라는 것은 유태인들을 화물열차에 태워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물리적으로 말살하는 조치’를 의미했다. 히믈러는 하이드리히를 독일제국의 보안책임자로 임명했다. RSHA(국가안전본부)라고 부르는 하이드리히의 보안부서는 점령지 폴란드에서 나치친위대(SS)의 업무는 물론 보안경찰(SD), 게슈타포(비밀경찰)의 업무를 총괄하여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대단한 권력이었다. RSHA(Reichssicherheitshauptamt: 라이히스지허하이츠하우프트암트)는 하이드리히가 제안한 사업계획서들을 착실히 추진하였다. 게토를 만들고 그 안에 유태인들을 몰아넣었다. 유태인들은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했고 그렇지 않으면 도로공사등 토목사업에 내몰렸다.

 

하인리히 히믈러. 아돌프 히틀러의 오른팔이었다. 히믈러의 오른팔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하이드리히에 의한 유태인 강제노동이 진행되는 한편으로는 유태인 말살계획도 추진되었다. 독일군이 최초로 조직적으로 유태인들을 집단학살한 것은 폴란드에서였다. 작전명 ‘소나무산’(Tannenberg)이었다. 독일 방위군(Selbstschutz)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채 야산으로 끌려온 유태인들을 마치 사냥터에서 토끼에게 총을 쏘아대는 것처럼 총을 쏘아 죽이고 시체들을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집단총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폴란드의 유태인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후 나치의 괴뢰정부는 유태인들이 원래 살고 있던 집들을 모두 압수하고 유태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다. 게토에 들어간 유태인들은 강제노동에 시달리면서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천명이 죽어나갔다. 하지만 아직도 나치당국에 의한 조직적인 집단학살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나치는 강제노동을 일종의 말살로 보았다. 강제노동을 시키면서도 먹을 것을 제대로 주지 않고 위생을 개선하지 않아 질병에 걸려 죽어 나가게 함으로서 유태인들을 자연적으로 말살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치의 표어인 Vernichtung durch Arbeit(페어니히퉁 두르흐 아르바이트: Destruction through work: 노동을 통한 말살)은 유태인 말살에 대한 나치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강제수용소마다 정문에 Arbeit Macht Freiheit(노동은 자유를 만든다)라는 간판을 내걸고 마치 신성한 노동을 하는 것처럼 선전했다.

 

폴란드에 살고 있던 독일계 소수민족 여인들이 독일군이 참공해 오자 빵을 나누어주며 환영하고 있다. 초록은 동색.

 

1941년에 이르러 히믈러와 하이드리히가 이끄는 친위대(SS)는 독일 영토에 있는 유태인들을 본격적으로 집단 청소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키로 했다. 이에 대하여는 나치정부 내에서 조차 반대의 기운이 거세게 일어났었다. 박애주의 때문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독일의 군수산업을 총괄하고 있는 허만 괴링(Hermann Göring)이 히믈러의 유태인 집단 청소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폴란드 일반정부에 속하여 있는 1백만명 이상의 유태인들을 모두 청소한다면 노동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어 군수산업에 타격을 준다는 이유였다. 유태인들은 독일의 귀중한 자산이므로 없애면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더구나 소련침공을 앞두고 군수물자의 조달이 대단히 중요한 시점에서 노동력을 없앤다면 큰 어려움이 닥칠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믈러와 하이드리히의 친위대는 유태인 집단말살 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나치의 폭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바르샤바의 폴란드 왕궁

 

[폴란드 이외의 지역에서는?]

1940년에 들어서서 나치는 전광석화와 같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프랑스를 점령하였고 1941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점령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1938년에 독일에 합병되었다. 대단한 영토 확장이었다. 독일국민들은 히틀러에 의해 대독일이 탄생하게 되었다며 들떠 있었다. 아무튼 노르웨이로부터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나치가 점령한 나라들에서도 반유태 조치가 소개되었다. 나라에 따라 박해의 정도와 속도가 차이가 있었다. 그 나라의 정치적 환경에 의해서였다. 유태인들은 이들 나라에서 법적으로 여러 제약을 받았고 사회생활이나 경제생활에서 탄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집단으로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것은 아직 아니었다.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기 시작한 것은 1942년부터였다. 나치점령의 프랑스에 세워진 비쉬(Vichy)괴뢰 정부는 나치의 유태인 말살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비쉬정부는 프랑스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색출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일에 앞장 섰다. 하지만 나치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핀란드에서는 비록 나치가 유태인 탄압정책을 도입하라고 강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나치의 정책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나치괴뢰정부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솔선하여 유태인 박해정책을 추진했다. 스웨덴과 스위스는 나치의 영향을 받았지만 끝까지 독립국으로서 나치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스위스와 스웨덴으로 몸을 피하였다.

 

1940년 파리에 입성한 히틀러. 감개무량한듯 세느강에서 에펠 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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