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집단수용소와 강제노동

정준극 2009. 11. 16. 05:21

[집단수용소와 강제노동](1933-1945)

 

독일 최초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 뮌헨 북쪽 16km 지점에 있다.

 

나치가 처음에 강제수용소를 세운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에서였다. 나치는 1933년에 정권을 장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에 반대하는 부류들이 많이 있었다. 나치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나치에 반대한다고 믿었다. 이들이야말로 나치의 원대한 계획에 걸림돌이라고 믿었다. 나치는 이들을 체포하고 나면 수용할 시설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독일에서 집단수용소 제1호로서 뮌헨 북쪽 교외에 있는 다하우(Dachau)가 만들어졌다. 1933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주로 나치에 반대하는 정치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체포하여 가두고 고문하였으며 처형까지 했다. 그러다가 유태인 및 집시들에 대한 최종해결(파이널 솔루션) 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하자 여러 개의 진짜 강제수용소가 필요했다. 나치는 강제수용소를 독일 본토 이외의 지역에 세우기로 했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도합 여섯 곳의 강제수용소가 나치가 점령한 폴란드에 설치되었다. 강제수용소에는 유태인들과 전쟁포로들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강제노동으로 허덕였으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시간만 있으면 죽어나갔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여 죽어나간 사람들도 허다했으며 나치가 심심풀이로 살해한 수용소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예를 들어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보면 나치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치 오락 삼아서 유태인들을 살해한 것을 잘 알수 있다. 나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 이외의 지역에 무려 1만 5천개의 강제수용소를 지어 운영했다. 대부분 폴란드에 있었다.

 

폴란드의 야노브스카(Janowska) 강제수용소에서 존더콤만도들이 화장하고 나온 뼈를 가루로 만드는 기계 옆에 서 있다.

 

유태인, 폴란드의 지식인, 공산주의자, 집시들도 유태인들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끌려왔다. 화물열차를 이용하여 데려왔다. 화물열차의 환경이 너무 열악하여서 운송 중에 죽은 사람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은 극심한 강제노동을 견디다 못해 죽어갔다. 다시 말하여 나치는 유태인들을 죽을 때까지 일을 부려먹었다. 매일 12-14시간의 강제노동이었으므로 기운이 빠지지 않을수 없었다. 자연적인 유태인 말살이었다. 강제노동이 시작되기 전이나 후에는 일반적으로 롤 콜(Roll Call)이 있었다. 사람들을 모두 세워놓고 아무나 무작위로 호명하여 앞으로 나오도록 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것이다. 그런 처형은 보통 몇 시간씩 계속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마당에서 호명을 기다리다가 심리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지쳐서 죽기도 했다.

 

베르겐 벨젠 강제수용소가 있던 곳에 세워진 안네 프랑크의 상징적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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