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게토의 실상

정준극 2009. 11. 16. 05:23

[게토의 실태](1940-1945)

 

폴란드의 크라카오 유태인 게토에 있는 오래된 유태인 시나고그. 전형적인 유태인 게토이다.

 

게토는 도시에서 유태인들만 따로 살도록 담장을 두른 지역을 말한다. 게토는 주로 폴란드의 도시에 설치되었다. 대표적인 곳은 크라코우(Krakow), 로드츠(Lodz), 르보브(Lwow), 봐르샤바, 리투아니아의 빌나(Vilna), 라트비아의 리가(Riga)의 게토였다. 나치는 폴란드를 침공한 이후 게토를 만들어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훗날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집단 살해하기 전에 임시로 머물도록 하였다. 가장 규모가 큰 게토는 바르샤바 게토였다. 38만명의 유태인들을 몰아넣었다. 다음이 로드츠로서 16만명이 몰려 살았다. 게토는 인구가 극도로 밀집된 감옥과 같은 것이었다. 유태인이나 집시들이 ‘스스로 천천히 죽도록’ 만들기 위한 시설이었다. 게토가 얼마나 비좁았는지는 바르샤바의 경우를 보면 잘 알수 있다. 바르샤바 전체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38만명이 게토라는 울타리 안에 살도록 집어넣어졌다. 이것은 바르샤바 전체 면적의 2.4%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작은 단칸방 하나에 평균 9.2명이 살았으니 얼마니 비좁고 비위생적인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수 있는 사항이었다.

 

봐르샤바 게토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나치군이 유태인 여자들과 어린이들을 강제 추방하고 있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게토에 수용된 유태인이나 집시들은 굶주림과 온갖 질병으로 수없이 죽어 나갔다. 특히 장질부사로 수만명이 죽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쥐라도 잡아 먹어야 했다. 그러니 전염병이 더 극성을 부릴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인간이하의 생활이었다. 1941년 한 해 동안만 해도 바르샤바 게토에서 4만 3천명이 죽었다. 길거리에 시체들이 쌓여 있어서 악취 때문에 눈을 뜰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쥐에 의한 전염병에 무방비 상태였다. 테레지엔슈타트(Theresienstadt)에서는 게토의 주민 거의 반이 죽어나갔다.

 

비엔나 제2구 레오폴드슈타트 카르멜리터플라츠(Karmeliterplatz)의 정통 유태인들. 레오폴드슈타트는 유태인들을 집단이주시켜 살도록 한 구역이었다.

 

게토는 나치가 임명한 유태위원회(유덴라트: Judenrat: Jewish Council)가 형식상 운영했다. 랍비와 같은 유태인 지도자들이 위원들이었다. 위원회는 게토에서의 식량, 물, 땔감, 약품, 숙소 등을 총괄했다. 뿐만 아니라 게토에 들어온 유태인들 중에서 누구를 강제수용소로 보낼지도 결정하였다. 초기에 위원회는 사람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내어 강제노역을 하도록 했지만 나중에는 가스실이 있는 수용소로 보내는 작업을 도맡았다. 게토에 있는 사람들은 히믈러의 지시에 의해 1942년 7월부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바르샤봐 게토의 유태인들이 우선 이송되었다. 7월 22일 첫 화물열차가 출발하였다. 그후 52일 동안 약 30만명이 강제수용소 또는 가스실로 떠났다. 주로 트레블린카(Treblinka)의 가스실로 끌려 갔다. 이어 다른 게토의 사람들도 열차에 실려 떠나기 시작했다. 얼마후 주요 도시의 게토들은 텅 비게 되었다.

 

게토는 유태인뿐만 아니라 집시들에게도 해당되었다. 그림은 로마의 아르코 델레 아지멜레(Arco delle Azimelle)에 있는 집시 게토

 

유덴라트는 강제수용로소 보낼 명단을 매일 작성해야 했다. 명단 제출을 늦추기 위해 별별 방법을 모두 동원하기는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덴라트는 반드시 구해 내야할 유태인을 비밀리에 명단에서 빼는 일도 했다. 그러자면 다른 누군가를 대신 명단에 올려야 했다. 르보브(Lwow)의 유덴라트 책임자인 요셉 파르나스(Joseph Parnas)박사는 명단을 제 시간에 제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나치의 권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비아로자(Byaroza)의 유덴라트 위원 전원은 더 이상 나치에 협조할 수 없어서 집단 자살했다. 나치는 유태인들을 가스실이 있는 수용소로 보내면서 이를 ‘동방으로의 재정착’(Resettlement in the East)이라고 불렀다. 게토라는 말은 베니스에서 유태인들만 살도록 한 구역을 말한다. 게토라는 단어는 원래 광산에서 원광을 선광할 때에 나오는 불필요한 광물을 따로 쌓아 두는 지역을 뜻한다.

 

파리의 뤼 데 로시어(rue des Rosiers)에 있는 유태인 제과점. 파리의 마레지구(les Marais)는 유태인 게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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