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죽음의 분대

정준극 2009. 11. 16. 05:25

[죽음의 분대](1941-43)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유태인 말살정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나치는 소련의 영토였던 리투아니아를 점령하고 리투아니아의 유태인 80%를 전쟁이 끝나기 전에 말살하였다. 나치가 1942년 초까지 점령한 소련 지역은 벨라우스(Belarus), 에스토니아(Estonia), 라트비아(Latvia), 리투아니아(Lithuania), 우크라이나(Ukraine), 몰도바(Moldova), 그리고 레닌그라드(현재의 생페터스부르크)-모스크바-로스토프(Rostov)를 연결하는 라인의 서부지역 거의 전부였다. 이 지역에는 약 4백만명의 유태인이 살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살기는 많이 살았다. 그중에서 상당수는 1939년 소련으로부터 추방당하여 폴란드로 넘어온 유태인들이었다. 이들 유태인들은 소련의 박해를 피하여 폴란드로 넘어 왔다가 이번에는 나치의 박해를 받게 되었다. 이 지역에 있는 유태인들은 소련이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를 거듭하는 와중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백만 명의 유태인이 나치의 마수를 피하여 다시 동쪽으로 정처 없는 유랑의 길을 떠났다. 하지만 나머지 3백만명의 유태인은 떠나지 못하고 나치의 자비에 운명을 맡겨야 했다.

 

우크라이나의 키에프 근교에서 나치의 아인자츠그루펜이 유태인을 총살하고 있다. 당장 죽음을 앞둔 유태여인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유태인들은 그저 죽음을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다.

 

독일이 러시아 서부지역을 점령하자 원래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스스로 ‘죽음의 분대’(Death Squad)라는 것을 조직하고 유태인 학살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아마 오래전부터 나치의 유태인 청소정책을 지지해 왔던 모양이었다. 특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서부 우크라이나의 ‘죽음의 분대’는 다른 어느 지역들보다 열심히 유태인 박살작전에 나섰다. 여기에 독일군의 특수임무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가세하였다. 예를 들어 아인자츠그루펜은 우크라이나의 키에프(Kiev)에서 유태인들을 들판으로 몰고 나가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 죽임으로서 시범을 보였다.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한 그런 일이야 그 후에 비일비재하였지만 키에프에서의 사건은 처음으로 독일 이외의 나라에 알려진 학살이라는 데서 의미가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결과적으로 주민부대인 ‘죽음의 분대’에 의해 약 2만 4천명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독일 나치 친위대(SS)에 속한 특수부대(타스크 포스)인 이동살인부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원래 아인자츠(Einsatz)라는 말은 병력을 배치한다는 뜻이다. 아인자츠그루펜의 지휘관들은 직업군인이 아니라 대부분 일반 시민으로 있다가 나치에 가담한 사람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학에서 배운 지식은 모두 한편으로 쌓아두고 자기들의 재능을 사람 죽이는 일에만 이용하였다. SS라는 말은 독일어의 Schutzstaffel(슈츠슈타펠)에서 Schutz(방어)와 Staffel(사다리형태 또는 삼각편대)라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충성을 명예로 알고 나치에 헌신하는 친위부대를 말한다. 참고로 첨언하면, 나치 독일에서는 정규군 이외에 두개의 커다란 비정규군이 있었다. 하나는 SS에 속한 비정규군인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며 다른 하나는 돌격부대인 SA, 즉 Sturmabteilung(슈트룸아브타일룽)이다. 둘다 유태인 사냥에 전문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이 유태인 상점과는 거래하지 말라는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베를린 1939년.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주민들의 자발적 조직인 ‘죽음의 분대’는 이웃 벨라루스에 까지 원정을 가서 유태인들을 잡아 죽였다. 우크라이나의 나치협조자들은 폴란드에 있는 강제수용소의 경비원으로 스스로 봉사하였다. 나치는 이제 유태인들을 공공연히 죽이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그나마 남들이 보지 않는 장소에서 죽였으나 주민들까지 나서서 유태인을 공공연히 죽이자 나치는 힘을 얻어 노골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유태인들을 죽였다. 길에서도 죽였고 공원에서도 죽였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도 죽였고 아이들과 함께 죽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한쪽에는 주민들의 ‘죽음의 분대’가 기웃거리면서 자기들도 유태인 살해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나치는 이들 ‘죽음의 분대’를 적당히 운영하면서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박차를 가하였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유태인과 집시들을 죽인 경우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1941년 6월 루마니아의 이아시(Iasi)에서 있었던 폭력적인 박해였다. 이 포그럼으로 14,000명의 유태인과 집시들이 죽임을 당했다. 거리마다 시체가 산처럼 쌓여 악취를 풍겼다. 경찰들도 주민들과 합세하여 유태인 및 집시들을 학살하였다. 인간들이 아니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은 나치 SS(Schutzstaffel의 약자)의 지휘를 받았다.

 

소련 영토였던 지역에서 가장 대규모의 유태인 학살에 투입된 부대는 SS에 속한 아인자츠그루펜이었다. 악명 높은 하이드리히가 총지휘관이었다. 아인자츠그루펜(특별작전부대)는 1939년에 폴란드에서 유태인 학살을 하여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때만 해도 아인자츠그루펜의 활동은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이 러시아를 침공하여 상당부분의 러시아 영토를 점령한 후,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아인자츠그루펜의 행동은 놀랄만큼 과감하였다. 공공연히 노골적으로 유태인들을 학살하였으며 규모도 상대적으로 커졌다. 나치는 아인자츠그루펜을 4개로 나누어 업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그룹 A는 발트해 지역 담당이었다. 그룹 B는 벨라루스 전담이었다. 그룹 C는 우크라이나 중부와 북부 담당이었다. 그룹 D는 우크라이나 남부, 크리미아 반도, 몰도바 담당이었다. 각 그룹의 지휘관은 모두 직업군인이 아니라 학식 있는 민간인으로서 군대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4명의 지역 사령관 중 3명이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네 개의 아인자츠그루펜은 정식으로 임무를 시작한 후 1941년 12월까지 모두 30만명의 유태인, 집시, 공산주의자 등 국가안전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되는 자들을 살해하였다. 학살할 때에는 주로 소총을 사용하였지만 한 군데에 모여 있는 유태인들에게 수류탄을 던져 한꺼번에 여러 사람을 죽이는 경우도 많았다. 독일이 점령한 소련 지역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유태인 집단 학살은 키에프의 근교 바비 야르(Babi Yar)에서 있었던 것으로 단 이틀 동안의 작전에서 33,771명을 죽인 것이다. 주로 기관총을 쏘아 죽였다. 인간이 할 일이 아니었다.

 

아인자츠그루펜이라면 이 정도는 보통이었다. 구경하고 있는 병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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