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홀로코스트

T4 작전과 독가스의 등장

정준극 2009. 11. 16. 05:25

[독가스의 등장]

 

나치는 유태인 대량 학살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 냈다.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1939년 12월부터 실제 사용에 들어갔다. 첫 시작은 이동식 ‘가스차’(Gas van)이었다. 밀폐한 트렁크를 설치하고 실린더를 통해 가스를 주입하는 시설이었다. 나치는 가스차를 동부 프러시아, 포메라니아, 폴란드의 각지로 돌아다니며 정신병원에 있는 정신병자들을 죽이는데 사용했다. 작전명 악치온(Aktion) T4이라고 불렀다. T4라고 불렀던 것은 이 작전을 구상한 장소가 베를린의 티어가르텐슈트라쎄(Tiergartenstrasse) 4번지에 있는 빌라였기 때문이었다. 첫 시도가 성공하자 나치는 더 큰 가스차를 만들었다. 100명을 한꺼번에 죽일수 있는 가스차였다. 1941년에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서 시범적으로 사용하였다. 나치는 15대의 대형 가스차를 만들어 나치가 점령한 소련 땅에서 사용하였다.

 

가스차. 독일에 있는 헬름노(Chelmno) 강제수용소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차의 화물칸을 밀폐하고 사람들을 쑤셔 넣어 독가스를 주입하여 죽이는 것이다.

 

나치의 지원을 받고 있는 ‘죽음의 분대’가 가스차 운영을 맡았다. 가스차에서 희생된 유태인과 집시들은 약 30만명에 이른다. 가스차는 처음에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 배기가스를 그대로 사용했다. 갇혀 있던 사람들은 유해가스와 산소부족으로 죽었다. 하지만 죽는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치는 더 속히, 더 많은 유태인을 죽이는 방법을 생각해 내야 했다. 독가스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독일이 점령한 소련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된 한스 프랑크(Hans Frank)가 열심히 주장했다. 유태인을 말살하는데 아까운 총알을 사용할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SS도 그렇게 생각했다. SS 지휘관인 크리스티안 비르트(Christian Wirth)가 가스실의 발명자였다. 크리스티안(기독교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하여 잔인한 대량학살을 감행하는 가스실을 고안해 낼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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