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메리 위도우' 분석

프란츠 레하르의 생애

정준극 2009. 11. 28. 18:38

레하르는 누구?

 

프란츠 레하르

 

프란츠 레하르는 1870년 4월 30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코마론Komaron)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코마르노(Komarno)이다. 레하르는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코모른에서 존경받는 지휘자였다. 레하르는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레하르는 12살 때에 아버지의 권유로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프라하음악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과 작곡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동생 안톤은 군인으로 출세하기 위해 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다가 동생 안톤은 형인 프란츠가 1935년에 설립한 악보출판사인 클로켄 페어라그(Glocken Verlag: 종출판사)의 업무를 보았으며 프란츠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의 작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 하였다. 한편, 프라하음악원에 들어간 레하르는 위대한 작곡가 안톤 드보르작의 지도를 받았다. 드보르작은 레하르의 재능을 유심히 지켜보고 바이올린보다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권면했다.

 

1978년도 바드-이슐의 레하르기념관에서 열린 국제레하르콩그레스 기념우표

 

1899년 프라하음악원을 졸업한 레하르는 우선 지방 오케스트라에 바이올리니스트 자리가 있어서 취직을 하였다가 나중에는 아버지가 군악대 지휘자로 있던 비엔나 제국군악대의 부악장이 되었다. 비엔나 생활을 시작한 레하르는 1902년에 군악대를 떠나서 32세의 젊은 나이로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지휘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오페레타도 작곡했다. 첫 오페레타인 ‘비엔나의 여인들’(Wiener Frauen)은 1902년 11월 초연되었다. 그는 오페레타를 작곡함에 있어서 비엔나 특유의 음악적 기질과 슬라브의 민속음악적 색채를 연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음악사에 있어서 잊을수 없는 불멸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창조하였다. 사람은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처럼 점잖게 생겼는데 머리에서 나오는 멜로디는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 잡을수 없는 사랑스러우면서도 흥겨운 것이었다. 나중에 그가 작곡한 ‘웃음의 나라’에 나오는 Dein ist mein ganzes Herz(그대는 내 마음의 기쁨)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100개국어로 번역되었다.

 

레하르가 태어난 코마르노(슬라바키아)의 시청앞 광장

 

1905년에 완성하여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빈강변극장)에서 초연된 ‘메리 위도우’(Merry Widow: Die lustige Witwe: 유쾌한 미망인)는 레하르를 하루 밤 사이에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이었다. ‘메리 위도우’는 유럽과 미국의 유명 오페라극장에서도 1천회 이상의 공연을 가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오페레타가 되었다. ‘메리 위도우’는 20세기 초반에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레타가 되었으며 그같은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서 세계의 곳곳에서 끊임없는 공연되고 있다. 그러나 레하르의 오페레타를 관능적이며 감각적이라고 하면서 질투어린 시선으로 비평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 중의 하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레하르의 오페레타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허튼소리만 넘쳐 있는 것이다. 물론 레하르는 대중을 사로잡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음악이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좋은 뜻으로 말했을 것이다.

 

1815년의 테어터 안 데어 빈(비엔나 강변극장). 야콥 알트의 그림. 이 극장에서 '디 루스티게 비트베'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웃음의 나라’(Das Land des Lachelns), ‘주디타’(Guiditta), ‘룩셈부르크 백작’(Der Graf von Luxemburg), ‘파가니니’(Paganini), ‘황태자’(Zarewitsch)등도 대성공이었다. 레하르는 부와 명예를 갖게 되었다. 레하르는 오페레타 이외에도 소나타, 교향시, 행진곡, 왈츠 등을 작곡했다. 왈츠 중에서는 ‘금과 은’(Gold und Silber)이 유명하다. 이 왈츠는 당시 비엔나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녀가 어느 날 주관한 무도회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당시에는 무도회를 개최할 때에 작곡가가 그 무도회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곡의 타이틀을 무도회의 타이틀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레하르는 파울리네 공녀의 무도회를 위해 ‘금과 은’ 왈츠를 작곡했기 때문에 그 무도회를 ‘금과 은의 무도회'라고 불렀다. 그로부터 레하르의 ‘금과 은’ 왈츠는 레하르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레하르는 당대의 테너 리하르트 타우버(Richard Tauber)와 각별한 우정을 다지며 지냈다. 타우버는 1922년 레하르의 ‘프라스키타’(Frasquita)의 주역을 맡아 레하르와의 평생에 걸친 인연을 시작했다. 그후 레하르는 타우버가 주역을 맡도록 하기 위해 6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리하르트 타우버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림은 오스트리아에서 생산되는 담배갑에 그려진 리하르트 타우버의 모습이다. 레하르는 타우버를 위해 여섯편의 오페레타를 작곡했다.

 

오페레타로 성공한 레하르는 돈도 많이 벌었다. 그는 비엔나의 19구 되블링의 누쓰도르프(Nussdorf)에 저택을 사서 편안한 생활을 하였다. 예전에 에마누엘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가 살던 집이었다. 쉬카네더는 잘 아는 대로 모차르트의 친구로서 ‘테아터 안 데어 빈’을 설립하여 운영한 사람이며 성악가로서 ‘마술피리’의 대본을 썼으며 이 오페라의 초연에서는 파파게노를 맡았던 사람이다. 오늘날 누쓰도르프에서 레하르가 살던 집은 ‘쉬카네더-레하르 슐뢰쎌’이라고 부르는 기념관이다. 슐레쎌은 작은 궁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시대가 도착하였다. 레하르와 나치 정권과의 관계는 편한 것이 아니었다. 레하르는 기본적으로 헝가리인이었다. 그는 헝가리에서 거의 살지 않았지만 평생 동안 헝가리어를 모국어로 여기고 지냈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서명할 때에도 헝가리 스타일로 했다. 그는 헝가리 식으로 성을 먼저 썼다. 즉, Franz Lehar가 아닌 Lehár Ferenc라고 썼다. 그리고 독일어에는 없는 á를 반드시 썼다. 레하르와 나치의 관계가 불편했다는 것은 레하르가 독일 제3제국의 2등 국민이기 때문인 것만은 아니었다. 부인이 유태계였기 때문이며 친구들이 유태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 때문에 레하르는 불안 속에 살아야 했다. 레하르는 오페레타의 대본을 언제나 유태인 대본가들에게 의뢰했다. 레하르는 비엔나에서 지내면서 많은 유태인들과 문화교류를 가졌다.


비엔나의 누쓰도르프에 있는 레하르 슐레쎌(소궁전). 원래는 쉬카네더가 살던 저택이었다. 레하르는 '메리 위도우'로 많은 돈을 벌어 이 저택을 샀다. 주소는 하크호퍼가쎄(Hackhofergasse) 18번지. (사진: 이정공)

 

레하르는 로마가톨릭이었지만 부인인 조피(Sophie)는 유태교인이었으나 레하르와 결혼하여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조피의 결혼전 이름은 유태식인 파슈키스(Paschkis)였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치가 레하르의 가족에게 적대감을 가지며 레하르의 작품을 배척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그런데 히틀러는 레하르의 작품을 좋아했다. 하기야 히틀러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레하르의 오페레타를 좋아했지만 말이다. 히틀러는 비엔나에 있을 때 ‘메리 위도우’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고 한다. 히틀러는 주위 사람들에게 ‘레하르 선생을 잘 좀 보살펴 드려라’고까지 말했다. 나치의 2인자인 괴벨스(Goebbels)는 레하르의 편에서 그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나치는 레하르의 부인에게 ‘명예 아리안 여자’(Ehrenarierin)이라는 지위를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의 게슈타포는 레하르의 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나치는 레하르의 음악을 선전목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특히 1941년 파리를 점령하였을 때에는 축하음악회에서 레하르의 음악을 연주하는 등 무시못할 존재였기 때문에 레하르 부인에 대하여 당장 무슨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한편, 레하르는 자기의 부인과 친구들의 안전을 위해 나치를 위해 음악활동을 했다. 예를 들면 그는 1938년 히틀러의 50회 생일축하 음악회도 개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하르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 자기의 부인이 잡혀갈지 모르며 언제 친구들이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입장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레하르를 나치협조자라고 볼수는 없다.

  

비엔나 슈타트파르크에 있는 레하르 기념상

 

1940년대에 들어서자 독일의 정치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고 이어 나치의 유태인 사냥이 강화되었다. 레하르는 어쩔수 없이 조피와 함께 스위스의 취리히로 피난의 길을 떠났다. 레하르는 얼마후면 비엔나에 돌아갈수 있다는 희망으로 취리히의 바우르(Baur) 호텔에 머물면서 지냈다. 그러나 사랑하는 부인은 비엔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취리히에서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레하르의 상심은 이루 말할수 없었다. 그런 입장인데 이번에는 비엔나에 남아 있던 유태인 친구인 프릿츠 뢰너-베다(Fritz Löhner-Beda)가 나치의 마수를 피하지 못하고 끝내 체포되어 악명 높은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뢰너 베다는 얼마후에 부헨봘트(Buchenwald)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뢰너-베다는 부헨봘트에 있으면서 유명한 ‘부헨봘트의 노래’(Buchenwaldlieder)를 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뢰너-베다는 종전을 얼마 남겨 놓지 않고 다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사실 레하르는 비엔나에 있을 때 나치의 고위층에게 뢰너-베다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는 청탁을 힘들게 했지만 결국은 소용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자 레하르는 스위스에서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러나 쓰라린 추억만이 남아 있는 비엔나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레하르는 잘츠부르크 인근에 있는 바드-이슐(Bad-Ischl)에 집을 구하여 홀로 지냈다. 레하르는 1948년 10월 24일 바드 이슐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드 이슐은 레하르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에 그가 살던 레하르 빌라를 레하르기념관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바드 이슐의 레하르 기념관은 오스트리아의 명소가 되어 있다.

 

바드 이슐의 레하르 빌라. 레하르는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레하르 기념관이다.

 

프란츠 레하르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한글 제목은 필자가 임의로 붙인 것이므로 추후 수정이 필요하다.

 

○  비엔나의 여인들(Wiener Frauen: 1902). 비엔나에서 초연.

○  땜장이(Der Rastelbinder: 1902) 비엔나

○  남편은 신(Der Göttergatte: 1904) 비엔나

○  떠들석한 결혼(Die Juxheirat: 1904) 비엔나

○  유쾌한 미망인(Die Lustige Witwe: 1905) 비엔나 테아터 안 데어 빈
○  룩셈부르크 백작(Der Graf von Luxemburg: 1909) 비엔나

○  집시의 사랑(Zigeunerliebe: 1910) 비엔나

○  푸른 마추르(Die blaue Mazur: 1920) 비엔나

○  프라스키다(Frasquita: 1922) 비엔나

○  파가니니(Paganini: (1925) 비엔나

○  웃음의 나라(Das Land des Lächelns: 1929) 베를린
○  주디타(Giuditta: 1934)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오페레타 '웃음의 나라'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