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메리 위도우' 분석

금과 은의 주인공 메테르니히 공녀

정준극 2009. 11. 28. 18:39

[‘금과 은’ 왈츠의 주인공 메테르니히 공녀]

 

‘금과 은’(Gold und Silber) 왈츠는 레하르의 대명사라고 할수 있을 만큼 사랑스러운 음악이다. 레하르는 ‘금과 은’ 왈츠를 1902년 비엔나에서 메테르니히 공녀(왕녀)가 주관한 무도회를 위해 특별히 작곡한 것이다. 비엔나의 상류사회에서는 훌륭한 무도회를 주관할 때에 그 무도회만을 위한 왈츠를 별도로 작곡토록 하여 연주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하우스 왈츠이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자기의 저택에서 무도회를 가지면서 젊은 작곡가인 레하르에게 그날 무도회의 하우스 왈츠를 부탁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금과 은’ 왈츠였다. 대인기였다. 비엔나의 일각에서는'금과 은' 왈츠를 ‘메테르니히 공녀 왈츠’라고 부르기도 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누구인가? 어떤 여인이었는가?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가 그린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Pauline von Metternich) 공주. 파리와 비엔나를 주름잡았던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그는 특히 바그너, 스메타나 등 음악가들의 후원자였다.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는 엘리자베트 왕비의 초상화 등을 남긴 거장이다.

 

메테르니히 공녀의 풀 네임은 파울리네 클레멘틴 폰 메테르니히-빈네부르크 추 바일슈타인(Prinzessin Pauline Clementine von Metternich-Winneburg zu Beilstein)이라는 긴 것이다. 이것은 결혼 후의 이름이며 결혼 전의 이름은 Gräfin Pauline Clémentine Marie Walburga Sándor de Szlavnicza(파울리네 클레멘틴 마리 봘부르가 산도르 드 츨라브니차 백작부인)이었다. 이름에 산도르라는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그가 헝가리 와 연관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산도르(Sándor)는 헝가리의 유명한 귀족 가문이다. 파울리네는 1856년 메테르니히 가문의 리하르트(Richard) 공자와 결혼하였다. 리하르트는 유럽을 주름 잡았던 오스트리아제국의 유명한 메테르니히(Prinz Klemens Wenzel von Metternich) 수상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파울리네의 어머니인 레온티네(Leontine)가 누군가 하니 다름 아닌 메테르니히 수상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좀 이상하게 되었지만 파울리네는 어머니의 남동생, 즉 외삼촌과 결혼한 것이었다. 아무튼 그로부터 파울리네는 메테르니히 공주(Prinzessin Metternich) 또는 간단히 폰 메테르니히(von Metternich) 공주(공녀)라고 불렸다. 그러므로 파울리네와 리하르트의 결혼은 어찌 보면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유대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수 있다. 파울리네의 아버지인 모리츠 산도르(Moritz Sándor)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무시하지 못하는 헝가리의 대단히 지체 높은 귀족이었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재상인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177301859). 파울리나의 시아버지 겸 외삼촌이었다. 토마스 로렌스 작품.

 

메테르니히 공주(파울리네)는 1836년 2월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헝가리의 슬라브니차(Slawnitza)였지만 당시 상당수 헝가리 왕족이나 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파울리네의 아버지도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저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엔나의 저택에서 태어났다. 파울리네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수상인 메테르니히 공자의 아들 리하르트와 결혼하여 메테르니히 공녀(프린체신)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이후 비엔나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류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공자(프린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와 결혼한 파울리네도 당연히 공녀(프린체신)라는 타이틀을 가지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친정아버지인 모리츠 산도르로 말하자면 헝가리에서 왕족이나 다름없는 지체 높은 귀족이었기 때문에 파울리네를 공녀(왕녀)라고 부르는 데에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아름답고 교양있는 메테르니히 공녀는 사교계의 주역으로서 부상하였다. 더구나 부유했기 때문에 예술가들을 많이 후원하였다.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와 체코 작곡가인 베드리치 스메타나를 적극 후원하였다. 바그너는 참으로 재주도 좋다. 친구인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의 부인인 코지마와 좋아지애게 되어 동거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결혼식을 올리게 되지를 않았나 스위스에서는 자기를 적극 후원해 주는 오토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레와 사랑하게 되어 죽자사자 하지를 않았나 하여튼 카사노바가 저리가라고 할 정도의 바그너였는데 비엔나에서는 메테르니히 공녀의 후원을 받았으니 말이다. 파울리네는 18세 때에 외삼촌인 리하르트와 결혼하였다. 파울리네와 리하르트는 삼촌-조카로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며 자랐다. 사실상 파울리네는 아버지가 비엔나 보다는 헝가리의 영지에 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므로 어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가 되는 메테르니히 수상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거의 다 지냈다. 그러므로 비록 외삼촌이지만 나이 차이가 그다지 많지 않아서 친구처럼 지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남편 리하르트가 오스트리아제국의 외교 사절로서 드레스덴에 파견되자 함께 가서 지냈으며 그 후에는 파리에 가서 1859년부터 1870년까지 11년동안 지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드레스덴과 파리에 거주하면서 사교계와 문화예술계의 호스테스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파리에 있을 때에는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유제니(Eugenie) 황녀와 가깝게 지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파리에서는 프랑스 귀족부인들에게, 비엔나에 돌아와서는 비엔나와 체코 귀족부인들에게 유행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일을 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이들에게 스케이트 타는 법을 가르쳤으며 여자들이 담배를 우아하게 피는 법도 가르쳤다. 당시 귀족사회에서 여자들이 스케이트를 타거나 남자들처럼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대단한 센세이션이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파리 사교계의 주인공이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여러 예술가들과 교분을 가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하르트 바그너와의 친분은 각별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바그너의 탄호이저가 파리에서 초연될수 있도록 크게 도움을 주었다. 바그너는 그러한 메테르니히 공녀에게 피아노 작품을 헌정하였다. 이밖에도 메테르니히 공녀는 프란츠 리스트, 샤를르 구노, 카미유 생-상, 작가인 프로스퍼 메리메, 알렉산더 뒤마 등과 친분을 맺으며 지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비엔나로 돌아간 후에도 이들과의 교분을 계속하였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비엔나에 와서도 바그너의 작품을 후원하여 ‘니벨룽의 반지’의 비엔나 공연을 주선해 주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비엔나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소규모로 공연할 때에 직접 무대감독을 맡았으며 소프라노 파트를 맡아 출연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스메타나의 작품을 비엔나에 소개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1892년 비엔나에서 공연된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는 메테르니히 공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사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다.

 

메테르니히 공녀의 개인 생활은 생각처럼 즐겁고 화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인 1848년에 비엔나 혁명을 직접 경험하였다. 외할아버지인 메테르니히 수상이 곤혹을 치루어야 했던 혁명이었다. 1870년에 파리에 있을 때에는 보불전쟁을 겪어야 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보물전쟁 중에 유제니 황비의 편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유제니 황비가 영국으로 도피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세 딸을 두었다. 둘째 딸 파스칼린(Pascaline)은 체코의 귀족인 게오르그 백작과 결혼하였으나 게오르그가 정신병자인데다가 포악한 성질이어서 많은 고통을 당했다. 일설에 의하면 1890년에 게오르그가 파스칼린을 살해했다고 한다. 셋째 딸인 클레멘틴(Clementine)은 어릴때 개에게 물린 얼굴 상처 때문에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메테르니히 공녀는 1921년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으로 이상한 인연이지만 프란츠 레하르도 그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랑스 제국의 영광과 몰락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았다.

 

폰 메테르니히와 가까이 지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의 황비인 유제니 드 몬티조(Eugenie de Montijo: 826-1920). 프란츠 사버 폰 빈터할터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