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메리 위도우' 분석

파리의 '즐거운 과부'

정준극 2009. 11. 28. 18:49

[파리의 La Veuve Joyeuse]

 

파리에서 '메리 위도우'로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자네트 맥도날드

 

프랑스 사람들은 레하르가 작곡한 Die lustige Witwe의 무대가 파리인데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레하르가 오스트리아인이기 때문에 파리를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면서 섭섭해 했다. 파리 사람들은 ‘메리 위도우’를 은근히 얕잡아 보면서 겉으로는 별것아니므로 구경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1909년 4월 28일 아폴로극장에서 파리 초연을 가진 날에는 파리를 날릴줄 알았더니 웬걸 파리 시민들이 거의 모두 몰려온듯 대성황을 이루었다. 파리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이후 파리에서만 186회의 연속공연이 있었다. 파리에서의 제목은 La Veuve joueuse였다. 글자 그대로 Merry Widow였다.

 

파리에서의 '메리 위도우' 포스터

 

파리 버전에서는 한나가 미시아(Missia)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미시아는 마르소비(Marsovie)에서 자란 미국여인으로 그려졌다. 프랑스 대본에는 미시아가 영어와 슬라브어를 섞은 묘한 악센트를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이 오히려 흥미를 배가시켜 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여자라고 하면 모두 백만장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가정아래에서 대본을 수정하였다. 다닐로 백작은 공자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빚이 아니라 개인적인 도박 빚이 많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미시아에게 청혼할 때에 어려운 점이 많았다. 마지막 막은 막심스의 현장을 무대로 삼았다. 런던이나 뉴욕에서도 실제의 막심스를 무대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예를 따라서 막심스를 무대에 올린 것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자존심이 막심스를 여주인공의 저택 정원으로 옮기는 것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리의 막심스 레스토랑 겸 캬바레

 

브뤼셀에서는 1910년에야 공연되었다. 이후 벨기에서는 극장이라고 이름 붙은 곳이라면 ‘메리 위도우’를 공연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결과적으로 벨기에에서는 국민의 거의 모두가 ‘메리 위도우’를 관람했다는 계산이다. ‘메리 위도우’는 비엔나에서 초연 이후 세계로 확산되어 그후 60년 동안 전세계에서 50만번의 공연이 있었다. ‘메리 위도우’에 대한 책도 나왔다. 뉴욕의 데이빗 맥케이 회사(David McKay Co)가 펴낸 In Gold and Silver: The Life and Times of Franz Lehar(금과 은: 프란츠 레하르의 삶과 시간)이다. 전세계적으로 ‘메리 위도우’의 악보와 레코드가 팔린 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역사상 상업적으로 이만한 성공을 거둔 작품은 없다. 레하르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서 경치 좋은 바드 이슐에 별장을 사서 지내다가 그곳에서 공수래 공수거의 원리에 따라 세상을 떠났다.

 

'메리 위도우' 페퍼백 책. 안톤 마이어 편저. 표지의 인물은 모리스 슈발리에와 자네트 맥도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