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메리 위도우' 분석

비운의 여인 바바라 허튼

정준극 2009. 12. 1. 13:20

참고자료

불쌍한 백만장자 바바라 허튼

(Poor Little Rich Girl: Barbara Hutton)

 

바바라 허튼

 

요즘 청년들은 바바라 허튼이라고 하면 누군지 잘 모를테지만 1900년대 중반을 살았던 사람들은 바바라 허튼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특히 노년의 미국인으로서 바바라 허튼을 모른다면 그건 말이 안된다. 그만큼 유명했다. 그런데 바바라 허튼이라는 여인과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는 무슨 관계가 있기에 이곳에서 소개코자 하는 것일까? 사실 별로 관계는 없다. 굳이 관련이 있다면 바바라 허튼의 생활이 '메리 위도우'에서 한나의 생활과 비슷한 점이 있으며 특히 오페레타에 나오는 파리의 막심스 때문이다. 하기야 막심스라는 식당 겸 캬바레는 ‘메리 위도우’ 때문에 더욱 유명해진 장소이다. 바바라 허튼이 바로 그 막심스의 단골손님이었다. 그것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별로 할 일이 없기에 그런 얘기나마 '메리 위도우 대분석' 코너에서 소개코자 하는 것이다. 바바라 허튼이 ‘메리 위도우’의 한나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대단한 재산을 상속받은 부자였다는 것이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다만, 한나는 남편과 사별한후 옛 애인 다닐로를 만나 재결합함으로서 해피엔딩을 기록하고 나라의 경제를 위해서도 기여하지만 허튼은 무려 7번이나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찾지 못하고 괴로운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다르다. 다만, 허튼의 재산중에서 런던에 있는 저택을 미국정부에 기증하여 나중에 미국대사관으로 쓰도록 한 것은 그나마 기여라면 기여였다. 허튼과 결혼한 7명의 남성중에는 저 유명한 배우인 케리 그랜트도 포함되어 있다.

 

 

TV 시리즈인 Poor Little Rich Girl에서 바바라 허튼 역을 맡았던 배우 화라 훠세트. 그리고 바바라 허튼과 한때 결혼했던 케리 그랜트.

 

바바라 허튼에 대하여는 아름다운 여자, 돈 많은 여자, 결혼을 많이 했던 여자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불쌍한 여자'라는 수식어도 따라 붙는다. 허튼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는 ‘가난하면서도 부자인 아가씨’(Poor Little Rich Girl)이다. 1987년 미국에서는 Poor Little Rich Girl 이라는 제목의 TV 영화 시리즈가 있었다. 누가 묻지 않아도 당연히 바바라 허튼 스토리였다. 당시 인기여배우 화라 훠세트(Farrah Fawcette)가 바바라 허튼 역할을 맡았었다. 생긴 것은 별로 비슷하지 않지만 그래도 화라 훠세트가 바바라 허튼을 맡아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바바라 허튼에 대한 책도 여러 편이 나와 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허튼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어 한다는 증거이다. 딘 제닝스(Dean Jennings)가 1968년에 출판한 Barbara Hutton, A Candid Biography(바바라 허튼, 그녀의 모든 이력서)는 허튼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온 자서전적인 책이다. 허튼이 1979년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허튼과 일종의 로맨스가 있었던 필립 반 렌쎌라(Philip Van Rensselaer)라는 사람이 Million Dollar Baby(백만장자 베이비)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 이어 1984년에는 데이빗 헤이만(David Heymann)이 Poor Little Rich Girl: The Life and Legend of Barbara Hutton(가난하면서도 부자인 아가씨: 바바라 허튼의 삶과 전설)이라는 책을 썼다. 모두 당시에 베스트셀러였다. 그만큼 바바라 허튼은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이제 바바라 허튼의 파란만장한 삶을 알아보자.

 

바바라 허튼을 주제로 삼은 화라 훠세트와 벌 아이브스 공연의 TV 영화 'Poor Little Rich Girl' 비디오 커버

 

우선 허튼의 신상명세서부터 알아보자. 바바라 허튼은 1912년 11월 14일 뉴욕에서 태어났고 1979년 5월 11일 캘리포니아의 비벌리 힐스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직업은? 공식적 자료에 의하면 박애주의자 및 상속녀(Heiress)라고 되어 있다. 박애주의자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돈을 펑펑 쓰는 사람을 말한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이다. 그나저나 상속녀라는 타이틀이 직업으로 분류되다니 의외의 일이다. 그런데 허튼은 일반적으로 ‘사교계 명사’(Socialite)라는 명칭이 직업으로 되어 있다. 가족은? 일곱 번이나 결혼했지만 자녀는 단 한명 뿐이었다. 랜스 레벤틀로브(Lance Reventlow)라는 아들로서 1936년 두 번째 남편인 쿠르트 폰 하우그비츠-레벤틀로브 백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아들 랜스는 콜로라도 주에서 세스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추락하여 허튼보다 5년 먼저인 1972년에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에 앞서서 일곱 명의 남편이 누구였는지 이름만이라도 소개코자 한다. 일곱 명의 남편과는 모두 이혼했으며 사별하여 헤어진 경우는 하나도 없다.

 

1. 알렉시스 므디바니 공자(Prince Alexis Mdivani): 1933-35. 발칸반도의 그루지아의 몰락한 왕가 사람.

2. 쿠르트 폰 아우스비츠-레벤틀로브 백작(Count Kurt von Haugwitz-Reventflow): 1935-38. 덴마크의 왕족.

3. 케리 그랜트(Cary Grant): 1942-45. 배우

4. 이고르 트루베츠코이 공자(Prince Igor Troubetskoy): 1947-51. 제정러시아의 왕족.

5. 포르피리오 루비로사(Porfirio Rubirosa): 1953-54.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카레이서.

6. 고트프리트 폰 크람 남작(Baron Gottfried von Cramm): 1955-59. 독일의 테니스 스타.

7. 피에르 도앙 공자(Prince Pierre Doan): 1964-66. 모로코의 귀족.

 

영국의 작은 시골에 있는 미국의 백화점 체인인 울워스 상점. 울워스는 주로 의류, 화장품, 악세사리 등을 팔았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사업이 쇠퇴하여 대부분 상점들이 월마트로 넘어갔고 일부는 바긴 숍으로 넘어갔다.

 

바바라 허튼은 어떻게 해서 백만장자가 되었는가? 외할아버지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아서였다. 허튼의 외할아버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울워스(Woolworths)백화점을 설립하여 억만장자가 된 프랭크 울워스(Frank Woolworth)였다. 그래서 허튼의 풀 네임은 바바라 울워스 허튼이다. 허튼의 어머니 에드나 울워스(Edna Woolworth: 1883-1918)는 울워스의 창시자 프랭크 울워스의 맏딸이었다. 에드나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결혼한지 얼마 안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남겨 놓은채 세상을 떠났다. 장녀 에드나는 뉴욕의 명망 있는 은행가 겸 증권중개인 겸 투자가인 프랭클린 허튼(Franklin Hutton: 1877-1940)과 결혼하여 슬하에 우리의 주인공인 바라바 울워스 허튼 하나만을 두었다. 바바라의 어머니 에드나는 바바라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외할아버지의 그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어머니 에드나는 재산을 제대로 관리하지도 못한채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 바람에 어린 바바라가 상속인이 되어 성인이 되면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과연! 바바라는 21세가 되자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법적으로 모두 상속받았다. 그동안 투자가인 바바라의 아버지가 바바라의 재산을 관리하여 점점 불려 놓은 것도 특기 사항이다. 그러나 바바라의 아버지도 바바라가 28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바바라는 두 번째 결혼에도 실패하여 당분간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누가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난리를 칠 상황도 아니었다.

 

바바라 허튼의 외할아버지로서 울워스 창시자인 프랭클린 울워스(1852-1919)

 

바바라의 어머니 에드나는 바바라가 여섯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지만 실은 불행하게도 자살을 하였다. 이유는 확실히 모른다. 어린 바바라를 뒤에 남겨둔 채 세상을 하직하였다. 어머니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어린 바바라였다. 바바라는 성인이 되고서도 그때의 충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바바라는 여러 친척들의 손에서 자랐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저택에서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대단히 내성적이었다. 친구들도 없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이모의 아들인 지미 도나휴(Jimmy Donahue)였을 것이다. 바바라는 뉴욕 상류사회의 전통에 따라 18세가 되던 해에 사교계에 데뷔하였다. 할아버지가 마련한 대단히 호화로운 무도회였다. 바바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마치 신데렐라와 같았다. 명문 애스터(Astor)가문과 록펠러(Rockfeller)가문의 사람들도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배우 겸 가수인 모리스 슈발리에와 미국의 루디 밸리(Rudy Vallee)가 진행을 맡은 파티였다. 그로부터 3년후인 1933년, 바바라가 21세 되던 해에 바바라는 드디어 어머니의 재산 1억5천만 달러를 상속받았다. 이는 오늘날 10억불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로서 바바라는 세상에서 가장 돈 많은 여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바바라의 21세 생일 파티는 5만불이 드는 것이었다. 경제공황으로 단돈 1불가지고 쩔쩔 매던 시절에 5만불이나 든 호화판 파티는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수 없었다. 시민들은 바바라의 호화판 생일파티를 공공연하게 비난하였다. 신문은 연일 그 얘기로 쉴 틈이 없었다. 바바라는 분개한 시민들과 언론의 집중포화를 피하여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바바라는 돈은 쓰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바바라는 런던에 윈필드 하우스(Winfield House)라는 대저택을 가지고 있었다. 나중에 바바라는 이 저택을 상징적으로 단 1불을 받고 미국정부에 기증하였다. 미국정부는 2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이 저택을 미국대사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바바라 허튼이 단돈 1불에 미국정부에 기증한 런던의 윈필드 하우스. 주영미국대사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바바라 허튼을 ‘부족한 것이 없는 행운의 여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바바라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잘 모른다. 바바라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했다. 일곱 번이나 결혼했던 것이 좋은 예이다. 바바라는 심지어 어떤 남편으로부터는 구타를 당하여 갈비뼈가 부러지기도 했다. 그들의 신랑에 대한 사항을 다시 점검해 보자.

 

첫 번째 남편은 몰락한 그루지아 왕자인 알렉시스 므디바니였다. 바바라가 20세 때에 결혼했다. 2년만에 헤어졌다. 위자료가 목적이었다. 두 번째 남편은 덴마크의 귀족가문 출신인 쿠르트 폰 하우그비츠-레벤틀로브 백작이었다. 1935년에 결혼해서 3년동안 같이 살았다. 그 역시 바바라의 재산을 보고 결혼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바바라의 재산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바바라의 친척들과 변호사들의 저지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는 그때부터 바바라를 학대하기 시작했다. 욕설을 퍼부어 정신적인 학대를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주먹을 휘둘러 바바라를 구타하였다. 어느 때는 어찌나 바바라를 무식하게 구타했던지 병원에 실려가야 했다. 바바라는 남편 쿠르트를 경찰에 고발하였고 쿠르트는 영창신세를 져야 했다. 쿠르트는 바바라에게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덴마크 시민권을 갖도록 강요했다. 바바라의 재산을 차지하는데 따른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였다. 바바라는 어쩔수 없이 1937년 12월에 미국국적을 포기하고 덴마크국적을 취득하였다. 그 이후로 바바라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마약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결국엔 중독이 되었다. 마약을 사용하다보니 식욕부진증이 생겼다. 아무것도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먹어도 당장 몸에 이상이 생겼다. 식욕부진증은 바바라의 남은 생애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이었다. 바바라와 두 번째 남편인 쿠르트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랜스(Lance)였다. 랜스도 아버지를 닮아서 방탕하고 성질이 난폭했다. 바바라와 쿠르트는 이혼을 하면서 아들의 양육문제는 바바라가 책임지기로 했다. 바바라는 랜스를 개인기숙학교에 보냈으며 가정교사를 붙여 교육했다. 예전에 자기가 받았던 교육과 똑같은 방법이었다.

 

두번째 남편 쿠르트 폰 하우그비츠-레벤틀로브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 랜스의 세례식을 마치고. 그런데 웬 아이가 저리도 인상을 쓰는지... 

 

2차 대전이 확산되자 바바라는 더 이상 유럽에 머물러 있기가 어렵게 되었다. 언제 나치의 세상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바바라는 프랑스에 있으면서 자유프랑스군을 위해 많은 기부를 했다. 영국에서는 자기의 대형요트를 영국왕립해군에 기증하여 훈련용으로 쓰게 했다. 1939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그는 미국정부의 전시채권 판매운동에 동참하였다. 바바라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실적을 올렸다. 이로써 전에 뉴욕에서 호화파티로 구설수에 올랐었고 다시 이사람 저 사람과의 스캔들로 비난을 받았던 바바라의 명예는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1942년 바바라는 할리우드에서 당대 최고의 배우인 케리 그랜트를 만나 결혼하였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사나이인 케리 그랜트는 바바라의 재산에 관심이 없었다. 바바라의 이름으로 득을 보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결혼은 3년만에 끝났다. 케리 그랜트는 바바라와 이혼을 하면서 어떠한 위자료도 받지 않았다. 아무튼 케리 그랜트와의 결혼은 세기적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킨 것이었다.

 

케리 그랜트와 함께 다정한 한때

 

케리 그랜트와 헤이진 바바라는 파리로 건너가 살기 시작했다. 이때에 제정러시아의 왕족으로서 파리에 추방되어 살고 있는 이고르 트루베츠코이(Igor Troubetzkoy)를 알게 되었다. 이고르는 재산은 없지만 제정러시아의 왕족이기 때문에 명사로서 대우를 받고 지내는 사람이었다. 1948년 봄에 바바라는 취리히에서 이고르와 결혼식을 올렸다. 카 레이서이기도 했던 이고르는 그해에 모나코 그랑 프리에 출전하여 처음으로 페라리(Ferrari)를 몰았으며 훗날에는 타르가 플로리오(Targa Florio)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고르는 자동차 경주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그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바바라에게 이혼하자고 요청하였다. 충격을 받은 바바라는 자살을 기도했다. 바바라의 자살기도 소식은 전세계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었다. 이때부터 바바라는 ‘불쌍하고 귀여운 부자 아가씨’(Poor Little Rich Girl)라는 별명을 들었다. 그리고 바바라의 사생활에 대한 신문의 관심은 점점 커가기만 했다.

 

바바라의 다섯 번째 결혼은 53일 동안만 지속되었다. 도미니카 출신의 카레이서 겸 외교관인 포르피리오 루비로사(Porfirio Rubirosa)가 상대방이었다. 1953년 12월 30일에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듬해인 1954년 2월 20일에 이혼수속을 밟았다. 루비로사는 국제적으로 소문난 플레이보이였다. 루비로사는 헝가리 출신의 여배우 자 자 가보(Zsa Zsa Gabor)와 공공연히 정사(情事)를 가지면서 상처받기 쉬운 바바라와 결혼을 했던 것이다. 루비로사와 이혼한 바바라는 미국인인 제임스 더글라스(James Douglas)와 필립 반 렌쎌러(Philip Van Rensselaer)와 로맨스를 가지기도 했다. 필립 반 렌쎌러는 훗날 바바라 허튼에 대한 자서전적 소설인 Million Dollar Baby를 썼다. 바바라는 세계 각지에 여러 채의 별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멕시코의 쿠에나바카에 30에이커에 달하는 초대형 일본 스타일의 별장을 지었다. 그만큼 돈을 물쓰듯이 했다.

 

바바라 허튼의 다섯번째 남편인 루비로사

 

바바라의 다음 남편은 독일의 테니스 스타인 고트프리트 폰 크람(Gottfried von Cramm)남작이었다. 바바라와은 오랜 친구였다. 1955년에 결혼식을 올렸을 때에는 세계적인 뉴스였다. 이 결혼 역시 4년만에 이혼으로 끝났다. 고트프리트 폰 크람은 1976년 이집트의 카이로 부근에서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레이몬드 도안(Raymond Doan) 공자였다. 아프리카 북부 탄지에르에서 만났다. 바바라는 탄지에르에도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1964년의 이 결혼도 2년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바바라는 술에 취하는 일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추태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젊은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은 돈을 물쓰듯 쓰는 바바라에게 기대어 호강을 했다. 바바라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동차를 선물하는 등 이상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자기 돈을 가지고 자기가 쓰는데 뭐라고 말할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사회통념상 부자들의 미친 짓으로 비쳐졌다.

 

1930년대 후반의 바바라 허튼 

 

바바라에게는 상속받은 고가의 골동품과 미술품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미술품, 도자기, 보석류 등을 계속 사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도 샀으며 유제니 황비가 가지고 있던 반지도 사들였다. 바바라의 단골 수집품은 화베르제(Faberge)와 캬르티에의 작품이었다. 어느 때는 40 캐럿의 파샤(Pasha) 다이아몬드를 샀다. 8각형으로 아름답게 커팅한 것이었다. 바바라는 이것을 둥글게 다시 커팅했다. 그래서 36 캐럿으로 줄어들었다.

 

1972년 아들 랜스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콜로라도 주의 아스펜에서 스키장 확장사업을 둘러보기 위해 세스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미숙한 조종사가 비행기를 산봉우리에 부딪히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바바라는 그나마 하나 있는 아들의 죽음으로 더욱 절망감에 빠졌다. 그때쯤해서 바바라의 재산은 거의 고갈된 것 같았다. 사실 그동안 너무 낭비만 했다. 마음씨가 좋은 것인지, 또는 정신이 나간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혼할 때마다 위자료를 만족할만큼 집어 주었으며 아무나 손을 벌리면 자선가처럼 돈을 주었다. 게다가 재산관리를 맡은 변호사 그레이엄 매티슨(Graham Mattison)이 음흉하게 사업을 벌인다면서 축을 낸 재산만 해도 엄청났다. 변호사가 바바라의 재산을 빼돌린 행각은 미궁으로 남았다. 바바라는 그많던 재산이 다 어디로 갔는지 말년에는 캘리포니아의 비벌리 힐스에 있는 리젠트 비벌리 윌셔어 호텔(Regent Beverly Wilshire Hotel)의 한쪽 방에서 기거하다가 1979년 5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66세였으니 사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셈이었다. 그가 죽었을 때 가지고 있던 재산은 현금 3천5백불이 전부였다고 한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호텔 값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바라라 허튼은 뉴욕의 브롱스(The Bronx)에 있는 우드런(Woodlawn)공동묘지의 울워스 가족 영묘에 안장되었다.

 

뉴욕 브롱스에 있는 울워스 가족 영묘. 바바라 허튼도 이곳에 안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