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미스터리의 아나스타시아

러시아 CSI의 DNA 논쟁

정준극 2009. 12. 21. 14:25

[러시아 CSI의 DNA 논쟁]

 

1991년 예타테린부르크의 교외에 있는 숲속에서 니콜라스 황제와 가족, 그리고 시종들의 유해가 매장되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대한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들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었지만 공산당국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쉬쉬하고 숨겨두는 바람에 일반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니콜라스 가족에 대한 여러 소문을 마감하는 의미에서 이들의 유해를 조사키로 결정하여 무덤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모두 9구의 유해가 발결되었다. 계산상으로는 11구가 있어야 하는데 2구가 없었다. 러시아판 CSI가 9구의 유해에 대한 DNA 검사와 두개골 분석을 수행하였다. 결과, 9구의 유해는 니콜라스2세, 알렉사드리나 왕비, 네명의 공주중 세명(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그리고 나머지 4구는 주치의인 예프게니 보트킨, 운전사인 알렉세이 트루프, 요리사인이반 카리토노프, 왕비의 시녀인 안나 데미도바로 확인되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니톨라스 2세와 가족들이 참변을 당한 장소에 세운 '보혈 교회'(크르크바 나 코르비)

 

저명한 법의학자인 윌리엄 메이플스(William Maples)박사는 황태자인 알렉세이와 막내딸인 아나스타시아의 유해는 실종되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러시아 과학자들은 메이플스 박사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다만, 실종된 유해는 아나스타시아가 아니라 셋째 딸 마리아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입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아나스타시아의 죽기전 사진들과 두개골의 모습을 비교분석하여 그러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발굴된 두개골에는 여러 부분이 손상되어 있어서 완전한 모습이 아니었다. 미국 과학자들은 러시아 과학자들이 적용한 분석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제기했다.

 

미국 과학자들은 마리아가 아니고 아나스타시아의 유해가 실종되었다는 주장했다. 1918년 당시 아나스타시아는 17세로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 아니었다. 성숙한 여인과 청소년 여인의 두개골은 모습에 차이가 있다. 미국 과학자들은 문제의 유해를 살펴볼 때 17세 소녀의 유해와 쇄골(Collarbone)에서 차이가 나며 사랑니(지치: Wisdom Teeth)가 자라지 않았으며 17세 소녀의 척추라고 볼수 없는 척추 등이 근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미국 과학자들은 아나스타시아의 두개골이라고 하는 것이 성숙한 여인의 두개골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998년, 러시아 당국은 이들의 유해를 모두 다시 매장할 때에 키가 5피트 7인치로 보이는 유해를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으로 매장하였다. 하지만 예카테린부르크의 학살이 있기 6개월 전에 네 자매가 찍은 사진을 보면 아나스타시아의 키가 다른 모든 언니들보다 몇 인지 작았기 때문에 5피트 7인치라는 것은 정확한 치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카테린부르크의 저택에서 참변을 당하기 두어달전 거실에서 어머니와 큰 언니 올가(하얀 수건모자를 쓴 사람)와 함께(앉아 있는 사람이 아나스타시아). 이것이 아나스타시아 생전의 마지막 사진.

 

총살집행병들의 지휘관이었던 유로브스키의 기록에 의하면 시체들 중에서 2구는 다른 곳에 매장했다고 한다. 니콜라스 황제와 시종들이 매장된 지역을 위장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나중에 만일 백군들이 발견했을 때 시체의 숫자가 맞지 않으면 의심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몇 년후 이 지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두 아이를 화장했다는 흔적을 찾지 못했으며 두 아이의 유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2007년 8월, 일단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화톳불을 피웠던 자리를 발견했으며 그 장소에서 2구의 불에 탄 유해의 조각들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그 장소는 유로브스키가 기록으로 남긴 지역과 일치했다. 고고학자들은 발견된 유해조각을 검토한 결과, 하나는 10살에서 13살 사이의 남자아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18세에서 23세 사이의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고 말했다. 아나스타시아는 죽임을 당할 당시 17세 1개월이었다. 마리아는 19세 1개월이었다.

그리고 알렉세이는 14세 생일이 막 지난 때였다. 아나스타시아의 큰 언니인 올가는 22세였고 둘째 언니 타티아나는 21세였다.

 

14세 당시의 알렉세이. 토볼스크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가기 위해 기차역에서의 모습. 일반에게 모습을 보인 마지막.

 

고고학자들은 두 아이들을 화장했다고 생각되는 장소(화톳불을 피웠다는 장소)에서 나무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황산을 담았던 병의 파편, 못, 쇠줄, 그리고 여러 종류의 총알 들이 나왔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금속탐지기를 이용하여 유해조각들을 발견했다. 이와는 별도로 여러 차례에 걸친 DNA 검사가 이루어졌다. 미육군 DNA 검사연구소에서도 실시했고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의과대학에서도 실시했다. 결론은 발굴된 유해들이 모두 1918년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로마노프 가족과 시종들의 것이며 따로 발견된 2구의 유해중 여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나스타시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네명의 공주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검사로 인하여 이제는 각자에 대한 독특한 DNA 프로파일을 확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