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욕의 마사코

히로히토의 죽음과 용단의 약혼 발표

정준극 2009. 12. 24. 15:03

히로히토의 죽음과 용단의 약혼 발표

 

미치꼬는 자기가 왕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하지만 미치꼬는 시어머니와 왕족들에게 평생 굴종만 하고 지낼 수는 없었다. 미치꼬는 둘째 아들 후미히토(文仁)를 보란 듯이 평민과 결혼시켰다. 가쿠슈엔(학습원)대학교 경제학 교수의 딸이었다. 그리고 맏아들보다 둘째 아들을 먼저 결혼시켰다. ‘나도 평민인데 아들이라고 평민과 결혼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자녀를 결혼시키는데 반드시 순서대로 해야 한다는 법이 어니 있느냐?’는 것이 미치꼬의 보이지 않는 항변이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을 결혼시킬 때, 미치꼬는 더 이상 왕세자비가 아니었다. 엄연한 왕비였다. 그리고 못된 시어머니는 더 이상 왕궁에서 살지 않고 먼 곳에 살고 있었다. 못된 할망구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1975년 미국 방문시 백악관에서 포드대통령부부의 영접을 받고 있는 대동아전쟁의 주범 히로히토 일왕와 코준(香淳) 왕비. 고준 왕비는 1903년에 태어나 2000년에 세상을 떠났다. 결혼전의 이름은 나미꼬공주(良子女王)이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동안 왕비의 자리에 있었다.

 

1989년 1월, 한국에서는 아직도 서울올림픽의 감격이 사라지지않고 있을 때, 역사의 인물 쇼와(昭和) 일왕 히로히토가 세상을 떠났다. 죽음 앞에는 아무런 장사도 없었다. 62년 이상을 일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대동아 전쟁의 주범 역할을 한 히로히토의 죽음은 한 세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대를 바라보게 하는 전환점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사망과 함께 미치꼬의 남편인 아키히토가 새로운 일왕으로 등극하였고 미치꼬는 왕비가 되었다. 이제 조용한 반란을 실현시킬 준비가 다 되었다. 둘째 아들과 평민과의 결혼이라는 왕비의 결정에 대하여 누구도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미치꼬의 시어머니로서는 손주의 결혼이기 때문에 간여하고 싶은 문제였겠지만 이제 고준 왕비는 현역에서 은퇴한 일개 노파가 아니던가? 둘째 아들 후미히토를 결혼시킬 때 미치꼬의 나이는 56세였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70세 노파와 같았다. 그 곱던 미치꼬의 얼굴에도 주름살이 골 깊게 파였다. 얼마나 심한 시집살이를 했으면 그렇게 아름답던 미치꼬가 저렇게도 늙었을까 하는 동정심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젊은 시절 미치코의 여러 모습

 

둘째 아들 후미히토는 세간에서 플레이보이로 알려져 있었다. 여성 편력이 많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실은 대학시절부터 키코라는 여학생과 몰래 교제하고 있었다. 키코는 왕족이 아닌 평민이었다. 평범한 대학교수의 딸이었다. 어머니 미치꼬로서는 더 이상 둘째 아들에 대한 잡음이 커지기 전에 어서 결혼시켜서 왕실에 대한 세간의 소문들을 잠재우려는 속셈도 있었을 것이다. 후미히토가 25세 때였다. 신부는 한 살 어린 24세의 가와시마 기꼬(川島 紀子)였다. 결국 동생 후미히토는 형인 나루히토보다 3년 일찍 결혼했다. 결혼 후 후미히토에게는 아키시노미야 후미히토 친왕(秋?宮 文仁 親王)이란 칭호가 부여되었다. 일본 왕실에서는 왕자에게는 친왕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공주에게는 내친왕(內親王)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 아무튼 둘째 아들 후미히토를 평민과 결혼시킨 이 조용한 반란 때문에 며느리 미치꼬와 시어머니 나미꼬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은 심도를 더해갔다. 나미꼬와 미치꼬 황후가 만나는 일은 1년에 한번, 히로히토의 추도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는 것이 통상이었다. 사람들은 걱정했다. 만일 미치꼬가 큰아들 나루히토마저 평민과 결혼시키면 어떻게 하나 라는 걱정이었다.

 

미치코의 아들인 나루히토와 부인 마사코

 

용단의 약혼 발표

 

미치꼬 왕비는 다시 용단을 내렸다. 남편인 아키히토 일왕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큰아들 나루히토를 평민 오와다 집안의 마사꼬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1993년 1월, 겨울바람은 차가웠지만 왕궁은 봄기운으로 훈풍에 쌓여있었다. 궁내청이 나투히토와 마사꼬의 약혼 결정을 정식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이었다. 1992년 언론에 의한 교제 보도 때문에 당황하였던 왕실은 이제 미치꼬의 결단에 순응하여 나루히토와 마사꼬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준비에 들어갔다. 1년여 마음고생하며 마사꼬를 잊지 못하고 있던 나루히토는 왕실의 결정을 마사꼬에게 전하고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마사꼬 집안은 왕실과의 결혼을 겸허하게 수락하였다. 일왕 가문과의 결혼을 거부한다는 것은 신민(臣民)된 입장에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본열도는 순식간에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어 갔다. 아직도 전후의 경제가 살아나지 않고 있었던 1950년대 말, 미치꼬라는 신데렐라의 탄생을 기뻐하며 황실의 결혼에 환호하였던 일본 국민들은 실로 34년 만에 또 다시 마사꼬라고 하는 신데렐라의 탄생을 보게되어 반사이(萬歲)를 거듭 외쳐댔다.

 

약혼발표후 축하 꽃다발을 받은 마사코. 양 옆에는 쌍둥이 여동생

 

열광하는 일본열도

1993년 1월 19일 약혼 발표가 있은 후부터 마사꼬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메구로구에 있는 마사꼬의 집 앞에는 취재진이 24시간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매스콤은 마사꼬가 오늘은 무슨 일정으로 하루를 보내는지 경쟁적으로 보도하였다. 마사꼬 패션은 잡지들의 특집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는 무슨 옷을 입었으며 핸드빽은 어떤 것을 들었고 구두는 무얼 신었으며 머리 스타일은 어떠하였고 악세사리는 어떤 것을 했으며 장갑은 어떤 것을 착용했는지 등등 ‘마사꼬 집중 대 탐구’가 시작되었다. 매일 같이 보도되는 마사꼬 패션은 그 날의 양품가게를 웃기고 울렸다. 젊은 여성들은 너도나도 마사꼬 패션에 감격하여 마사꼬가 오늘 아침에 빨간 구두를 신었다 라고 하면 그 날로 긴자거리 백화점의 빨간 구두는 동이 날 지경이었다.


결혼전 테니스장에서의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다정한 한때

 

매스콤들은 어느새 마사꼬를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일본 매스콤의 숨길수 없는 기질이 또다시 발로되었던 것이다. 매스콤의 취재 경쟁은 참으로 뜨거웠다. 미국이건 영국이건 마사꼬가 다녔던 학교마다 특파원을 보내 친구였던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여 특집으로 보도했다. 마사꼬가 샤넬 핸드빽을 들고 나드리를 나갔다고 하면 매스콤은 파리의 샤넬 본점에 특파원을 보내 핸드빽의 제조 과정에서부터 판매 루트, 가격은 대체로 얼마이며 누가 단골 손님인지 까지 샅샅이 훑어서 보도하였다. 마사꼬가 기침을 하면 그 날로 TV 방송국의 특집은 겨울철 감기 예방에 대한 것이었다. 마사꼬의 고향 마을, 저 멀리 니이가타를 탐방하여 마사꼬 집안의 자취를 찾아 보도하는 것은 주말 연속방송보다 시청률이 높았다. 극성 그 자체였다.

 

여성발명가협회 회의에 참석하여 기념서명하는 마사코 황태자비. 2009 


궁내청의 반대

 

나루히토의 부인으로 내정되었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테스트에 합격해야 한다. 신원조사는 이미 약혼 발표전에 끝냈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성격 테스트는 단시간에 마칠수 있는 사항이 아니므로 몇 달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였다. 하지만 마사꼬의 학력을 보면 정신 질환이 있을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자 생산 능력 여부였다. 전문의에 의한 정밀 검사에 들어 갔다. 신체적으로는 아무 결함이 없는 것으로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궁내청이 느닷없이 유전적 및 역학적 문제를 들고 나왔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마사꼬 집안에는 딸만 있지 아들이 없기 때문에 확률적으로 마사꼬가 아들을 낳을 확율이 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황태자비 후보자로서 재고되어야 한다는 소리이다. 예나 지금이나 황태자비의 주요 역할은 그저 왕자 아기씨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던가? 마사꼬 집안에는 딸만 셋이다. 마사꼬가 장녀이고 그 아래로 쌍둥이 자매가 있다. 레이꼬(禮子)와 세이꼬(節子)이다. 이와 관련하여 쌍둥이 집안에서 쌍둥이가 또 태어날 확율이 높다는 이론까지 들고 나왔다. 만일 황태자비가 쌍둥이를 생산한다면 후계자 문제가 결치 아플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의를 제기할 만한 문제이지만 꼭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증은 없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궁내청의 주장을 일축했다.

 

마사코와 왕세자의 결혼이 확정되자 마사코의 집 앞에는 연일 수많은 취재진이 진을 치고 있으며 마사코의 일상을 하나하나 취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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