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욕의 마사코

우등생 마사꼬

정준극 2009. 12. 24. 15:07

우등생 마사꼬

 

이제 마사꼬 왕세자비의 이력을 집중 탐구해보자. 마사꼬는 1963년 12월 9일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와 어머니 유미꼬의 장녀로 태어났다. 동경 미나토구(港區)에 있는 도라노몬(虎の門) 병원에서 태어났다. 일본 혼슈의 동해에 면한 니이가타현 무라우에시(村上市)가 아버지의 고향이다. 마사꼬의 아버지는 직업 외교관이지만 할아버지는 니이가타현 주립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지냈고 증조할아버지는 중학교 교사였다. 마사꼬는 똘망똘망한 아이였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조기교육의 열풍에 따라 바이얼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황태자도 어릴 때부터 바이얼린을 배웠으니 이것만 보아도 천상배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그렇다고 온 동리 바이얼린을 배운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나중에 배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결혼식날의 마사코. 그동안 신경을 써서 그런지 얼굴이 좀 얄상해졌다.

  

그건 그렇고, 마사꼬가 네 살 때에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났다. 레이꼬와 세츠꼬이다. 1993년 마사꼬가 결혼할 당시, 레이꼬는 하노이주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고 세츠꼬는 명문 동경대에 재학 중이었다. 쌍둥이 동생들은 복스럽게 다소곳한 모습들이 양가집 규수 스타일이다. 그래서 언니 마사꼬와 함께 매스콤에 심심찮게 오르내리기도 했다. 오와다씨 집 딸 들은 모두 여자로서 관찮게 생기기도 했지만 재주도 많고 우수하였다.

 

마사꼬가 네 살, 그리고 쌍둥이 동생들이 태어 난지 얼마 안 되어 아버지 오와다씨가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다. 식구들도 모두 함께 갔다. 마사꼬는 모스크바 시립보육원에 입학하였다. 1년 지나서 아버지는 뉴욕의 유엔 본부 일본 대표부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식구들은 미국으로 이사하였다. 마사꼬의 가족은 2년 동안의 뉴욕 생활을 마친 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마사꼬는 동경 메구로구 다치하라쪼(立原町) 소학교 1학년에 입학하였다. 이듬해에 메구로구에서 신주꾸(新宿)로 이사하는 바람에 신주꾸에 있는 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 1년후에는 다시 세다야(世田谷)로 이사하게 되어 그곳에 있는 소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 이후에는 같은 학교 계열에서 고등부 1학년까지 계속하여 다녔다.  田園調布雙葉학원(보통 덴후타라고 부름)이었다. 프랑스의 예수회가 세운 카톨릭계 미션 학교이다. 마사꼬가 황태자비로 내정된 후, 첫 번째로 찾은 모교가 이 여자고등학교였다.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눈물을 글썽이며 앞으로 일본의 천황 부인이 될 마사꼬를 열렬하게 환영하였음은 물론이다.

 

마사꼬는 소학교 다닐 때 수예부와 생물부에서 과외 활동을 하였고 중학부에서는 소프트볼부에 들어가 주장까지 맡아했다. 고등부에서는 이과 계통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담임교사는 마사꼬에게 의사가 되면 어떻겠냐고 조언을 한바 있다. 마사꼬가 열여섯 살 소녀일 때 아버지가 주미 일본대사관으로 전근 가게 되었다. 근무지는 워싱턴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녀 교육을 위해 매사추세츠주 벨몽트(Belmont)시에 집을 구하여 부인과 아이들이 살게 했다. 마사꼬는 미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 벨몽트 하이스쿨 2학년에 편입하였다. 마사꼬의 미국 학교 성적은 우수하였다. 미국 학생들을 따라 잡기 위해서 밤을 지새우며 공부한 결과였다. 과연, 마사꼬는 이 고등학교의 최우수 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우수학생협회(National Honor Society)에 정식 회원으로 가입하는 정도가 되었다. 마사꼬는 벨몽트 하이스쿨에서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했으며 합창부, 수학부에 들어가 실력을 과시하였다.

 

벨몽트 하이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한 마사꼬는 열여덟 살인 1981년 세계적 명문 캠브릿지의 하바드(Harvard) 대학교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마사꼬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과외활동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바드 일본문화클럽 회장을 지냈으며 하바드 국제문제연구소에 학생대표로 자문 활동을 했고 여가를 내어 심신장애자 자원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아마 이때부터 외교관에 대한 꿈을 키워 왔던 것 같다. 마사꼬는 무엇보다 외국어 능력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미국에서 명문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영어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5개 국어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독일어를 배우기로 했다. 경제학과 법학을 공부하려면 독일어가 필수였다. 마사꼬는 괴테 인스티튜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연수를 받았다. 독일어 마스터에 많은 도움을 준 것이었다. 이어서 프랑스어를 배우기로 했다. 외교에 있어서 프랑스어는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하바드 재학시절, 프랑스 그레노블 대학 연수과정에 참가하여 프랑스어 실력을 높였다. 이렇게 하여 마사꼬는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스믈두살 때인 1985년, 마사꼬는 최우수학생(Magna cum Laude)으로 하바드를 졸업하였다. 졸업 논문제목은 ‘수입가격 쇼크에 대비한 국제간 조정’이었다. 이 논문은 나중에 일본 외무성의 참고자료로서 활용되기도 했다. 하바드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의 해외공관 임무도 끝나 가족들은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시부야(涉谷)에 임시로 집을 마련하여 살게 되었다. 그 해에 황태자는 영국 옥스퍼드 유학을 마치고 미국을 거쳐 귀국하였다.

 

일본에 돌아온 마사꼬는 국내 대학에서 공부를 더하고 싶었다. 이듬해,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동경대 법학부 3학년에 학사 편입하였다. 그러는 한편, 과감하게 외무공무원 고등고시에 도전하였다. 결과는 수석합격이었다. 기라성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수석 합격했다. 외무성은 근래에 없었던 수재의 등장이라고 하면서 자랑하였다. 매스콤은 일본 외교의 앞날을 밝힐 새로운 별이라고 하며 찬사를 보냈다. 외무성은 마사꼬에게 곧바로 근무할 것을 종용하였다. 하바드를 ‘마그나 쿰 라우데’(Magna cum Laude)로 졸업한 수재이므로 동경대를 더 다닐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외무공무원 합격자 발표가 있은지 얼마후, 마사꼬는 아카사카의 왕실 저택에서 열린 스페인 공주 환영 다과회에 참석하는 영광을 갖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운명적으로 나루히토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마사꼬는 외무성의 권유에 따라 그 이듬해 졸업을 앞둔 동경대를 그만두고 외무성에 정식으로 입성하였다. 경제국 국제기구2과 외무사무관으로 발령을 받았다. 곧 이어 런던 주재 일본 대사관 외교관보로 임명되었다. 신참으로서는 파격적인 해외 근무였다. 하지만 외무성으로서는 어학면에 있어서나 외교 능력에 있어서나 마사꼬가 귀중한 존재이므로 현지 부임이라는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외무성은 마사꼬에게 부임까지 준비 기간을 1년 주었다. 마사꼬는 영국 근무를 이용하여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임지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옥스퍼드대학교 국제관계 논문과정에 등록하였다. 한편으로 그해 여름에는 프랑스 부장송 대학 연수과정에 참가하기도 했다. 대단히 열심히 노력하며 부지런하고 야망에 넘친 외무 공무원이었다.

 

일본 외무성. 마사꼬가 근무하던 곳이다. 

 

갈림길에서의 결심

 

1989년 1월 7일, 대동아전쟁의 주범인 히로히토 일왕이 향년 88세로 황천길로 떠났다. 이에 따라 장자 아키히토가 새로운 일왕으로 즉위하고 얼마후 나루히토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와중에서 영국에 있던 마사꼬는 외무성의 시급한 현안인 미국과의 반도체 협상을 위해 북미국 북미2과로 전근 발령을 받았다. 마사꼬의 능력, 그리고 미국 정부내의 하바드 인맥이 협상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마사꼬는 미국과의 반도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가는데 큰 기여를 했다. 외무성은 마사꼬에게 미국 내에서의 일본인 변호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협상을 하도록 지시하였다. 역시 마사꼬의 탁월한 외교 능력과 영어 실력으로 비교적 좋은 결과를 끌어 내었다. 그러기를 2년여, 외무성에서 마사꼬 위치가 점차 단단해 지고 있을 때에 왕세자의 청혼과 약혼 발표가 있게 되었다. 마사꼬로서는 무척이나 고민하였던 중대사였다. 훌륭한 외교관으로 대성할 것이냐, 아니면 천황의 일가로서 생애를 보내야 할 것이냐? 갈림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사꼬로서는 신민(臣民. 일본 사람들은 자기들을 일왕의 충성스런 신하, 즉 신민이라고 부름)된 도리로서 왕세자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도 황태자와의 성혼을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무척이나 감격해 하고 있었다. 사실 마사꼬는 어머니로부터 ‘얘야, 너도 이제 나이 서른인데 결혼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겠니?’ 라는 종용도 여러번 들어 왔던 터였다. 그리고 마사꼬로서는 나루히토 황태자가 싫지만은 않았다. 자기보다 키가 좀 작은 것이 미안한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어디 한군데 부족한 것이 없는 남자가 아니던가? 그나저나 자기를 지극히 사랑하여 온갖 시련을 헤치면서 청혼한 사람에게 어찌 무관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마사꼬는 마음을 작정하였다. 신(神)의 반열에 오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1993년 6월 9일, 역사적인 왕실의 성혼의 예가 거행되었다.

 

마사코 결혼 특집 책자. '국화왕좌(皇位: 고이)의 수인(囚人)'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국화는 일본 왕실의 상징이다.

 

쇼와(昭和) 일왕인 히로히토(裕仁: 1901-1989)는 고준 황비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두었다. 혹시 참고가 될수도 있으므로 이름만이라도 알아보자.

 

1. 시게코 내친왕(공주) (1925-1961): 테루노 마야 시게코(照宮成子). 테루공주

2. 사치코 내친왕(1927-1928):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히사공주

3. 가츠코 내친왕(1929-1989): 타카노미야 가츠코(孝宮和子). 다카공주

4. 아츠코 내친왕(931-1952): 뇨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요리공주

5. 아키히토 왕세자(1933- ): 츠구노미야 아키히토(維宮明仁). 1959. 4. 10 쇼다 미치코(1934-)와 결혼. 슬하에 2남 1녀를 둠. 장자가 나루히토,

6. 마사히토 친왕(1935-   ):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1964. 9. 30 츠가루 하나코(1940- )와 결혼. 요시왕자

7. 다카코 내친왕(1939-   ): 수가노미야 다카코(淸宮貴子). 수가공주

 

아들 아키히토와 평민 미치코의 결혼을 반대하고 결혼후에도 미치코를 무시하며 못살게 굴던 히로히토 일왕의 부인 고준(香淳) 왕비. 결혼전 이름은 나가코(良子)였다. 나가라니, 누구를 나가란 말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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