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욕의 마사코

키코 왕자비

정준극 2009. 12. 26. 15:25

[참고자료 3]

일왕의 둘째 며느리 키코 왕자비

결혼 16년만에 아들 히사히토 생산, 심리학박사인 재원

 

여고시절 세라(Sailer)복을 입은 가와시마 키코. 15세

                   

후미히토 신노히 키코(文仁親王妃紀子)는 전 아키히토 일왕의 둘째 아들 후미히토(아키시노신노)의 부인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키코사마라고 불리는 여인이다. 키코 왕자비는 1966년 태어났으므로 남편 후미히토보다는 1살 아래다. 결혼전 이름은 가와시마 키코(川島紀子)로서 친정아버지는 가쿠슈인(學習院)대학교 경제학교수였다. 아키시노왕자비는 근세에 일본 왕실에서 평민이 왕족과 결혼한 두 번째 케이스이다. 첫 번째 케이스는 바로 키코의 시어머니인 미치코였다. 미치코는 현재는 은퇴하였지만 평민 시절에 당시 왕세자(저들은 황태자라고 부른다)인 아키히토(현재의 일왕)와 연애하여 결혼하였다. 미치코의 친정아버지는 제분공장을 경영하는 부호였다. 그래서 사회적으로는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그 집안이 귀족이나 왕족의 집안은 아니었다. 왕족으로서 평민과 결혼한 세 번째 케이스는 키코보다 8년 후에 결혼하여 왕족의 반열에 들어간 2019년에 드디어 왕비가 된 마사코(雅子)이다. 마사코의 친정아버지는 직업외교관으로 외무성 차관을 지냈으며 2010년 현재 네덜란드 헤이그 소재의 유엔 국제사법재판소 소장이다. 이렇듯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 가족만이 과거의 전통을 깨트리고 우선 일왕 본인부터 평민과 결혼했으며 두 아들도 모두 평민과 결혼하였으니 이례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평민 출신의 두 며느리는 모두 뛰어난 재원(才媛)이어서 신데렐라니 무어니 하며 세간의 존경과 부러움을 차지하고 있다. 사족: 아키히토 일왕의 유일한 딸인 노리공주도 2005년에 평민과 결혼했다. 노리 공주와 결혼한 사람은 둘째 오빠 후미히토의 친구로서 도쿄시청 소속의 도시계획 전문가이다. 바야흐로 일왕의 만세일계는 평민과의 결합으로 변환되고 있다. 얘기가 곁길로 빠졌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본래의 스토리인 기코 왕자비에 대한 얘기로 돌아가자.

 

키코의 시어머니인 미치코의 젊은 시절 모습 

                 

키코는 시즈오카(靜岡)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키키(Kiki)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식구들은 그를 키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키키는 아버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함께 가게 되어 유치원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키코의 아버지인 가와시마 타츠히코는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버지는 곧 이어 비엔나 교외에 있는 락센부르크 소재의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이이아사: IIASA: International Institute for Applied Systems Analysis)의 연구원으로 취직했다. 아버지는 IIASA에서 공간과학과 NGO(비정부기구)의 활동에 대하여 연구했다. 그리하여 키코는 비엔나에서 초등학교의 몇년으로부터 고등학교의 몇년까지 다녔다. 이쯤되면 우선 키코가 영어와 독일어에 능통하다는 것 쯤은 짐작코도 남음이 있다. 1987년 일본으로 돌아온 키코는 가쿠슈인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키코는 이때 장차 남편이 될 후미히토(아키시노왕자)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실은 키코는 학습원대학에서 아키시노 왕자의 지정학우(고가쿠유)였다. 마찬가지로 나중에 노리공주와 결혼한 구로다라는 사람도 아키시노 왕자의 지정친구였다. 왕자나 공주가 학교에 다니게 되면 손색없는 가정 출신의 두서너명 학우들을 친구로 지정해 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런 친구들을 지정학우(ご學友)라고 한다. 키코는 결혼하여 자녀를 가진 후에도 공부를 계속하여 마침내 1995년 심리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키코는 2007년도 세계청년지도자 중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4천명 후보자 중에서 다만 몇 사람만이 선정되는 어려운 관문이었다.

 

1989년 결혼식에서(성혼의 예). 일본 전통 복장을 입은 키코 왕자비.

 

키코가 아키시노왕자(후미히토)와 결혼한 얘기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다. 아키시노왕자가 키코에게 청혼한 것은 1986년 6월 26일이었다. 둘 다 가쿠슈인대학교 학생으로서 아키시노왕자는 21세의 청년이었고 키코는 20세의 어린 여대생이었다. 아키시노 왕자로부터 청혼을 받은 키코는 20세에 결혼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무리이기 때문에 ‘좀 기다려 주셔요’라고 말했다. 더구나 상대방인 후미히토에게는 미장가의 형인 나루히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3년동안 아무도 모르게 교제를 진행하였다. 그런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은 아키시노 왕자가 바람둥이라느니 숨겨놓은 애인이 있다느니 하면서 입방아를 찧었다. (사족: 일각에서는 후미히토가 실제로 바람둥이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오히려 그 점이 두 사람의 사랑을 더욱 굳건하게 만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1989년 여름, 아키시노는 어머니에게 키코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형보다 먼저 결혼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어머니 미치코로서도 당황했다. 후미히토의 결혼 얘기가 나오자 왕실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우선 키코가 평민이기 때문에 반대의견이 많았다. 후미히토의 결혼은 왕실회의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어머니 미치코가 아들 후미히토의 평민결혼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미치코는 자기도 평민이었기 때문에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으며 결혼 후에도 왕족들로부터 보이지 않는 견제와 냉대를 받아왔던 것을 상기했을 것이다. 당시에 미치코는 왕세자비였다.

 

 

나루히토 왕세자와 마사코 왕세자비, 후미히토 왕자와 키코 왕자비. 2009년. 아니, 우째서 큰 아들은 키가 작고 작은 아들은 키가 큰것일까? 아무튼 정말 화목하게 보이는 형제이다.

 

미치코로서는 그런 설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아들들만은 평민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사랑이 신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둘째 아들의 평민결혼을 옹호하고 나섰던 것이다. 미치코는 둘째 아들이 평민과 결혼한다고 하면 우선 시어머니(대동아전쟁의 전범수괴 히로히토의 부인)가 반대할 것을 계산에 넣었다. 시어머니로서는 손주가 평민과 결혼하겠다는 것을 찬성만 할수 없는 일이었다. 아들(지금의 헤이세이 일왕)이 평민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는 죽어라고 반대하더니 이제 손자가 평민과 결혼한다고 하니까 찬성을 한다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반대를 한다면, 그러면 시어머니는 손자들의 결혼에 무조건 반대만 한다는 인상을 줄것이라는 것도 계산에 넣었다. 아무튼 만일 시어머니가 둘째 손자의 평민 결혼을 반대를 하지 않는다면 옛날에 큰 아들 아키히토와 미치코의 평민결혼은 그렇게 반대했으면서 어찌하여 이번에는 반대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화살과 함께 ‘오호라, 저 할망구가 미치코만 죽어라고 미워했구나!’라는 누명을 쓸수도 있다. 미치코의 시어머니, 즉 히로히토 천황의 와이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설픈 입장이었다. 그때에 주변 사람들이 미치코의 시어머니에게 둘째 아들은 황위 계승과는 별로 관련이 없으므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허락해도 좋겠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즉, 허락하라는 뜻이었다. 미치코의 시어머니는 미치코가 둘째 아들의 평민결혼 문제를 얘기했을 때 참으로 자기로서는 현명하게도 묵묵부답했다. 미치코는 시어머니가 후미히토의 평민결혼을 용인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키코 왕자비. 1990년

               

왕실회의의 재가는 1989년 9월 12일에 10명 위원 전원의 수락으로 결정되었다. 이어 9월 29일에 도쿄의 왕궁(황궁: 고코)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바로 그해 1월에는 쇼와일왕인 히로히토가 세상을 떠났다. 미치코의 남편인 아키히토가 새로운 일왕으로 등극했으며 미치코의 시어머니인 심술의 왕비는 왕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게 되었다. 키코는 결혼과 함께 아키시노신노히(친왕비)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사람들은 키코를 간단히 프린세스 키코라고 불렀다. 후미히토와 키코의 결혼은 왕실의 관례에 비하여 몇가지 사항을 깨트리는 것이었다. 우선 신랑 후미히토가 아직도 학생신분이었다는 것, 또한 형인 나루히토보다 먼저 결혼한다는 것이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둘째로 신부인 키코는 왕실에 들어오는 최초의 중산층 여자라는 것이었다. 미치코도 평민출신이지만 그래도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부유한 기업인이었으며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왕실에 충성해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키코의 아버지는 다만 대학교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기코는 학습원 시절에 후미히토의 특별히 정해진 친구였다. 이를 고카쿠유라고 부른다. 그런 친구사이인데 결혼하게 된 것도 별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키코는 결혼 후에도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왕족이 되어 결혼 후에 공부를 계속한 경우는 없었다. 아무튼 키코는 결혼 후에도 계속 학교에 다녀서 두 아이의 엄마이면서도 1995년에 심리학 석사를 받았고 나중에는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친왕비(왕자비)는 나름대로 공식적인 활동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학위를 위해 공부를 계속하였으니 공식업무를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그저 죽어라고 웃으면서 되도록이면 공식행사에 열심히 참석하였다. 한편, 키코는 청각장애자들에 대한 이해심이 뛰어났다. 키코는 수화의 권위자였다.

 

청각장애인 모임에서 수화로 연설하는 키코 왕자비. 큰딸 마코(오른쪽)도 수화를 배워서 아주 잘하고 있다.

             

아키시노왕자와 키코왕자비는 세 자녀와 함께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아카사카 궁에서 생활하고 있다. 2009년으로 큰 딸 마코는 어느덧 여고 3학년생이 되었으며 둘째 딸 가코는 여중3학년이 되었다. 늦게 얻은 아들 히사히토는 세 살 어린이였다. 키코와 아키시노왕자는 공식 사명을 띠고 간혹 해외출장을 간다. 2002년에는 일본-몽골 국교수립 30주년 기념으로 몽골을 방문했다. 일본 왕족으로서 몽골을 방문하는 첫 번 케이스였다. 2002년에는 네덜란드의 클라우스 공자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방문하였으며 2003년에는 태평양의 휘지, 통가, 사모아를 친선방문하였다. 2004년, 두 사람은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공주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네덜란드를 방문하였으며 2005년에는 룩셈부르크를, 2006년에는 일본-인도네시아 국교수립 50주년 기념으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하였다. 2006년에는 또한 파라과이 일본이민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파라과이를 방문했다. 키코왕자비는 일본결핵퇴치협회 회장이며 일본적십자연맹 명예부회장이다. 이제 일본의 왕실전범(皇室典範)이 개정되느냐, 또는 그대로 유지되느냐에 따라 키코의 위상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들을 낳기 전의 아키시노-키코 가족. 믹내딸 카코는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꿈이다. 오른쪽은 히사히토(2015년) 


2019. 1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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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주간현대'라는 잡지의 부편집장이던 곤도 다이스케라는 사람이 쓴 '동경일화'라는 책에 <천황의 장남일가와 차남일가>라는 글이 있어서 흥미있기에 필자의 허락도 없이 소개코자 한다. 하기야 책으로 이미 나와 있는 글이니 전재해도 상관없으리라.

 

천황의 장남일가와 차남일가

 

당신이 재벌 총수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에게 아들이 둘이 있다. 장남은 성실하고 착실한 성격이지만,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져 결혼했는데 상대가 누구냐하면 대가 세고 제멋대로인 커리어우먼이다. 차남은 철이 없고 다소 무모한 성격이지만, 당신 부인과 꼭 닮은, 사회경험이 전혀 없는 현모양처를 부인으로 얻었다. 형보다 먼저 결혼한 차남 부부에게는 두 딸이 태어났다. 동생보다 나중에 결혼한 장남 부부에게도 한참 후에 딸이 태어났다.

 

당신은 언젠가는 장남에게 회사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후의 후계자 문제까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당신 부인은 식구들간에 궁합이 잘 맞는 작은 며느리를 편애한다. 회사 내의 평가도 큰 며느리는 최악이지만 작은 며느리는 아주 좋다. 그런데 마침 고대하던 손자가 차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를 계기로 차남과 장남의 위치가 역전되고, 차남 일가는 하루아침에 회사 직원들의 뜨거운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2006년 가을, 일본 황실에서 이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천황의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의 부인인 기코 왕자비가 9월 6일, 황실이 오매불망 고대하던 남자아이인 히사히토 왕자를 출산했다. 이로 인해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일약 각광을 받게 되었으며, 반대로 장남인 황태자 일가는 그 존재가 희미해져 버렸다. 일본국 헌번 제1조에는 <천황은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다.>라고 쓰여 있지만, 마치 분열되어 가는 일본 가정을 상징하는 것처럼 장남일가 VS 차남일가의 격렬한 배틀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 일본 남성들은 장남인 황태자를 동정하는 <황태자파>와 차남을 지지하는 <아키시노노미야파>로 나누어져 있다. 여성들은 어떠한가? 우울증에 걸린 황태자비를 동정하는 <마사코파>와 작위적인 웃음이지만 주어진 임무는 완벽하게 수행하는 기코 왕자비를 지지하는 <기코파>로 나뉘어져 있다. 황태자파와 마사코파의 주장은 이렇다. 외교관 출신의 황태자비는 언젠가 퍼스트레이디로서 일본 황실의 국제화를 추진하고 황실외교를 활성화시키려는 야심으로 황실에 들어 왔지만,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이 아들을 낳는 것뿐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버렸다.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오히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구태의연한 황실이며, 유럽 황실처럼 여성(황태자의 딸인 아이코)이 천황이 될수 없는 것이 문제다. 더구나 정직한 성격으로 불합리한 인습에 이의를 제기하는 개혁파인 마사코 황태자비에 비해, 항상 작위적인 웃음을 띠고 수동적인 공무만을 무난히 수행하는 기코 왕자비의 모습은 자연스럽지도 않고 인간적이지도 않다.

 

한편, 아키시노노미야파와 기코파는 반론한다. 황태자 일가는 국민세금으로부터 연간 3억2400만엔의 생활비와 870 평방미터의 호화저택을 부여받고 있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지난 4년 가까이 걸핏하면 공무를 취소해 왔다. 그에 비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연간 6480만엔의 생활비를 지급받고 470평방미터의 저택에서 살고 있지만, 기코 왕자비는 한번도 공무를 게을리 한 적이 없다. 자존심이 센 마사코 황태자비의 취미는 외국인 인텔리들을 만나 영어로 국제문제를 토론하는 것이지만, 기코 왕자비의 취미는 서민인 농아들을 만나 수화로 대화하는 것이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앞으로도 공무를 우습게 여긴다면 차라리 이혼하고 황실을 떠나는 편이 낫다.

 

나는 황실연구의 대가인 메이지학원대학의 하라 다케시 교수에서 이 소동에 대한 감상을 들어봤다. "히사히토 왕자가 태어난 날 황거 앞 광장에 가보니 황실에서 41년 만에 아들이 탄생했는데도, 일본 전국에서 축하하러 온 국민은 단 10명에 불과했습니다. 황실 형제의 불화가 화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이라고 봐야겠죠." 황실에 대한 무관심은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이번 소동의 주인공인 히사히토 황자가 천황이 될 무렵에는 황실의 존폐논의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2006.9> 

 

미소짓는 것이 실은 인위적이어서 보기 싫다는 얘기를 듣고 있는 키코 왕자비와 남편 아키시노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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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쿠슈인과 고가쿠유

 

마사코 왕세자비와 기코 왕자비에 대한 얘기가 나온 김에 학습원(가쿠슈인)의 고가쿠유(ご學友)라는 것에 대하여 잠시 설명코자 한다. 학습원의 역사는 에도시대 말기인 18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는 헌종 13년이 된다. 당시 학문의 증진에 열의를 쏟었던 닌코(仁孝) 일왕이 자신의 거주지였던 교토고쇼(京都御所) 안에 쿠게(公家)를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학습소'를 설치한 것이 학습원의 기원이다. '쿠게'는 왕족과 그의 직계 및 방계의 친족들을 일컫는 말이다. 교토의 학습소는 1868년 메이지유신과 관련하여 황실이 에도로 옮기게 되자 도쿄로 자리를 옮겼다. 지금의 학습원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은 1877년 '화족학교학칙'이 제정되고부터이다. 화족이라는 말은 왕실 및 귀족의 가족들을 통틀어 일컫는 단어이다. 학습원은 설립초기에는 왕실을 위한 사학이었지만 1884년 부터는 쿠나이쵸(宮內廳)가 관할하는 관립학교가 되었다. 이어 학습원이 일반인에게까지 개방된 것은 패전 후인 1949년부터이다. 현재의 학습원은 학습원대학(법학부, 경제학부, 문학부, 이학부)을 중심으로 학습원 여자대학, 학습원 고등과, 학습원 중등과, 학습원 여자중등과, 학습원 초등과, 학습원 유치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학생수는 총 1만명이 넘는다.

 

왕실의 자녀들은 동급생 중에서 특별히 선정된 고가쿠유라는 친구를 얻어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이들과 지내게 된다. 고가쿠유의 조건은 부모의 신분이 확실할 것, 성적이 우수할 것, 활달하고 명랑한 성격일 것 등이다. 천황의 차남인 아키시노노미야는 1990년에 대학시절의 고가쿠유인 기코와 결혼했다. 2005년에 노리노미야 공주와 결혼한 도쿄도청 직원인 쿠로다 요시키도 학습원 시절에 아키시노노미야의 고가쿠유였다. 학습원에는 고가쿠유를 중심으로 한 전통이 남아 있고 이것이 학습원을 다른 학교와 엄격히 구별하는 격식이라는 것이다.

 

아키시노 왕자와 키코 왕자비, 그리고 두 딸인 마코와 카코(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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