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욕의 마사코

미치꼬 왕비(Empress Michiko of Japan)

정준극 2011. 10. 20. 07:39

미치꼬 왕비(Empress Michiko of Japan) 집중탐구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린 아키히토와 미치꼬. 일본국민들은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하며 열광했었다.

                               

현재의 일본 일왕의 부인인 미치꼬 왕비(황후 미지자: 皇后 美智子: 코고 미치꼬)는 기록으로 보면 일본 왕실역사상 처음으로 평민이 왕족과 결혼한 경우이다. 미치코는 1959년에 당시 왕세자이던 아키히토(明仁)와 결혼하였다. 1989년 1월 7일, 대동안전쟁의 주범이었던 히로히토 일왕이 죽자 아키히토(明仁)가 헤이세이(平成) 일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미치코도 왕비로 불려지게 되었다. 밀가루 공장집 딸이 일약 왕비가 된 것이다. 신데렐라도 그런 신데렐라가 없을 것이다. 미치꼬 왕비는 1934년 토쿄에서 태어났다. 남편인 아키히토 일왕과는 1살 차이이다. 미치꼬는 일본 굴지의 제분기업인 니씬세이푼(日淸製紛)그룹의 명예회장인 히데사부로 쇼다(1904-1999)의 장녀이다. 미치코는 은스푼을 입에 물고 돈 걱정 없이 태어났다. 미치꼬는 명문인 가톨릭계의 세이신(聖心)여중과 여고를 거쳐 1957년에 세이신대학교 영문과를 최우수로 졸업하였다(Summa cum laude). 대재벌의 장녀인데다가 미인이었고 명문대학의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재원이어서 혼담이 많았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번이나 올랐었고 일왕제를 반대하여 쿠테타를 기도했다가 여의치 않자 할복자살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도 쇼다 미치꼬와 결혼할 생각이 있어서 1950년대 말에 맞선을 보았다고 한다. 아무튼 일본의 상류층에서 미치꼬는 넘버 원 며느리감 및 신부감으로서 대단한 관심을 받았었다.

 

여섯살 때의 미치꼬

           

운명의 수레바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는 법이다. 1957년 8월, 미치꼬는 당시 왕세자인 아키히토를 카루이자와쪼(軽井沢町)에 있는 테니스 코트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키히토의 또 다른 이름은  츠구(維宮)이다. 그 다음은 말해보았자 입만 아픈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설명하자면, 미치꼬를 본 아키히토는 첫눈에 반하였고 미치꼬도 그런 아키히토를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은밀히 연애를 계속하였고 마침내 1년이 지난 1958년 11월 27일 왕실회의(皇室會議: 코시츠카이기)가 두 사람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는 놀라운 발표가 있었다. 왕실회의는 일본의 총리대신, 참의원 의장, 민의원의장, 대법원장, 왕족 위원 2인으로 구성된다. 당시 왕실회의의 결정은 촐삭거리기를 좋아하는 일본열도를 논란으로 들끓게 하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국민들과 언론은 왕세자의 배우자가 당연히 왕족(황족: 카조쿠) 중에서 나올 것으로 생각했었다.

 

미치꼬

 

미치꼬는 비록 대재벌의 딸이기는 했지만 평민이었다. 그래서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왕세자와 미치꼬의 약혼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더구나 미치꼬는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가톨릭학교(세이신) 출신이었다. 일본황실에 가톨릭 영향의 왕세자비라니? 말도 안된다는 생각들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의 부인인 고준왕비가 미치꼬와의 약혼을 적극 반대했다는 것은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그런 고준왕비가 새며느리인 미치꼬를 무척이나 괴롭혔다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지메(苛め/虐め: 따돌림)도 그런 이지메가 없을 정도였다. 2000년에 고준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로이터 통신은 그런 내용을 보도하여 시어머니의 미치꼬에 대한 이지메를 확인해 주었다. 아무튼 각종 난관을 겪고 결혼에 성공한 아키히토와 미치꼬는 오히려 일본국민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아키히토와 미치꼬는 1959년 4월 10일 결혼식을 올렸다. 대단한 결혼식이었다. 일본 열도가 들썩거린 일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신데렐라의 탄생이라고 하면서 미치꼬에 열광하였다. 더구나 당시 일본은 대동아전쟁에서 패배하여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왕실에서 신데렐라와 같은 결혼식이 거행되었으니 그야말로 일본 열도가 흥분할 만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결혼기념 사진. 히로히토 일왕과 고준 왕비와 함께. 1959년. 히로히토는 대동아전쟁의 장본인이며 고준은 며느리 못살게 구는 장본인.

                      

아키히토와 미치코 사이에서 세 자녀가 태어났다. 큰아들이 현재의 왕세자인 나루히토(德仁)로서 1960년 2월 23일에 태어났고 둘째가 아키시노(후미히토)로서 1965년 11월 30일에 태어났으며 막내가 딸로서 1969년 4월 18일에 태어난 사야코(종전의 노리나이신노)이다. 아키히토와 미치꼬는 몇가지 황실의 관습이나 전통을 무시한 행동을 하여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자녀들을 보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키웠다. 더구나 미치꼬는 왕자를 모유로서 길렀다. 현재의 나루히토이다. 1989년 1월 7일 대동안전쟁의 전범 히로히토가 죽자 아키히토가 일본의 제125대 일왕이 되었고 미치꼬는 왕비가 되었다. 즉위식은 1990년 11월 12일 왕궁에서 있었다. 소쿠이 레이 세이덴노 기라고 부르는 의식이었다. 돌이켜보면 미치꼬는 신혼기간이라고 할수 있는 1960년대에 시어머니인 고준황후 및 왕족들로부터 말못할 이지메를 당했다. 덕분에 7개월 동안 실어증에 걸린 일도 있었다. 혹자들은 미치고가 거식증에 걸렸다고도 말했다. 실어증에서 벗어났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왕비가 된지 얼마 후인 1993년 가을에 다시 실어증에 걸렸다. 어의들은 미치꼬의 실어증을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치꼬의 실어증 등은 1993년에 큰아들 나루히토(德仁)와 마사코의 결혼문제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재발되었으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는 사라졌다.

 

신데렐라의 퍼레이드

 

미치꼬는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고 나서 어느 누구보다도 해외여행을 자주 다녔다. 공식방문국이 37개국이나 되었으며 비공식 방문국은 18개국이었다. 그리고 일본 내에서 지금까지 어느 황족보다도 가장 많이 일반대중의 모임에 참석하였다. 미치꼬는 왕세자비로서 주로 사회복지행사 및 문화행사에 참석하였으며 국빈 영접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일례를 들어 2007년만해도 약 300회의 행사에 참석하였다. 거의 매일 처럼 공식행사에 참석한 셈이었다. 미치꼬는 남편 일왕과 함께 이세 신궁을 참배하는 등 황실의 행사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는 연례 양잠행사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황궁에 있는 모미지야마에서 누에를 돌보는 일을 하였다. 누에를 길러서 비단을 만드는 일은 일본 신도와 연계된 전통행사이다.

 

레이건 대통령의 영부인 낸시여사와 함께. 미치꼬는 발렌티노를 입었다. 미치꼬는 영문과를 나왔는데 과연 영어로 얘기를 나누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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