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기적 로맨스: 심슨

퇴위인가 폐위인가?

정준극 2009. 12. 31. 06:27

6. 퇴위인가 폐위인가?

 

1936년 1월 20일 조지 5세가 서거하였다. 실은 더 오래 살수도 있었는데 장남인 에드워드 때문에 속이 상해서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후문이다. 어쨌든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8세로서 대영제국의 국왕 겸 인도 황제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대관식은 상중이기 때문에 관례상 다음 해로 연기하였다. 조지 5세가 서거한 다음날인 1월 21일 에드워드는 당시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수상이 에드워드가 대영제국의 국왕으로 즉위한다고 선포하는 장면을 성제임스궁의 2층방에서 창문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문제는 에드워드가 월리스를 마치 자기의 부인처럼 옆에 있게 하고 창문을 통해 그런 중요하고 엄숙한 장면을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에드워드인지 아닌지 모를 지경이었다. 에드워드가 남편이 있는 여자를 정부로 둔 것까지야 사랑에는 국경을 없다느니 하는 말로서 겨우 참고 볼수 있다고 치더라도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 유부녀를, 더구나 미국 여자를 마치 왕비처럼 옆에 세우고 보란 듯이 행동하는 것은 정말로 영국국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처사가 아닐수 없었다. 왕실과 정부는 에드워드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자 그가 그 여자와 결혼할 마음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간주했다.

 

에드워드 8세의 아버지이며 월리스의 시아버지가 되는 조지 5세. 생전에 서로 만난 일은 없다.

                              

당시 보수당이 이끄는 영국정부는 신임 국왕의 여러 가지 적절치 못한 행동, 특히 월리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런 에드워드는 어머니인 메리 왕후와 동생들에게 말할수 없는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영국의 백성들은 에드워드의 훌륭치도 않은 행동거지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언론이 왕족에 대하여 좋지 않은 소식을 보도하는 것을 관례에 따라 일종의 금기사항으로 여기고 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유럽에서 히틀러에 의한 전운이 감돌고 있던 때였으므로 국민과 군대의 사기를 위해 왕이나 왕세자에 대한 이러쿵저러쿵 스캔들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국왕은 비록 형식상이기는 하지만 영국 군대의 최고 통수권자였다. 그런 국왕에 대하여 험담 내지 비난을 하여 군의 사기를 저하케 만든다면 그건 대단히 곤란한 문제였기에 서로들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조심하였다. 그러나 영국 이외의 나라에서는 문제가 달랐다. 너도나도 에드워드의 스캔들에 대하여 집중 보도했다. 특히 미국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집으로 다루었다. 심지어 어떤 신문은 미국의 보토 여인이 영국의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깨춤을 추었다. 영국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심슨을 방문한 엘리자베트 여왕과 부군 필립 공

 

영국의 국왕은 전통적으로 영국교회인 성공회의 최고 수장(Supreme Governor)이다. 그리하여 에드워드도 영국 국왕으로 선포됨과 동시에 영국교회의 최고 수장이 되었다. (주: Supreme Governor를 우리말로 무어라고 번역해야 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최고 수장이라고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영국교회(성공회)는 이혼한 사람이라고 해도 전남편이나 전처가 살아 있으면 재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라서 민법으로는 에드워드와 심슨부인(월리스)의 결혼을 막을 방법이 없지만 교회의 규범에 의하면 비록 심슨부인이 곧 이혼한다고 해도 전남편이 살아 있기 때문에 에드워드와 재혼할수 없다. 영국교회는 일반 신도에게는 그러한 규범을 지키라고 주장하면서 교회의 수장에게는 '당신만은 예외요!'라고 말할 근거가 없었다. 이와 함께 전남편이 살아 있는 이혼녀와 결혼한다면 영국교회의 수장이 될수 없으며 따라서 영국의 국왕으로도 남아 있을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한편, 영국 정부와 영연방의 대부분 정부들도 에드워드와 심슨부인의 결혼을 다른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우선 미국인 이혼녀라는 것이 거부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에게 있어서 미국은 아직도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없는 신생국가일 뿐이었다. 그보다도 영연방국들은 심슨부인을 ‘지나치게 야심이 많은 여인’일 뿐이며 대제국의 왕비가 될 자격이 없다고 보아 반대했다. 영연방국들은 심슨부인(월리스)이 돈과 지위를 탐내고 있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1936년 에드워드와 결혼 1년 전의 월리스. 당시에는 물론 미세스 심슨이었다.

                            

한편, 월리스는 이미 남편에 대하여 이혼소송을 제기하여 1936년 10월 27일 이혼가판결(decree nisi)을 받은바 있다. 이혼 가(假)판결은 6주일 내에 이혼반대의 사유가 없으면 판결을 확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는 중에 1936년 말에 들어서서 영국에서도 심슨부인(월리스)과 에드워드 국왕과의 관계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는 정부대로 심슨부인을 공격하였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심슨부인을 비난하였다. 어떤 신문은 심지어 심슨부인을 ‘희대의 요부’ ‘지칠줄 모르는 욕정의 여인’ ‘사랑은 뒷전, 돈과 명예가 목적’ 등으로 보도하면서 모욕적인 비난을 감추지 않았다. 월리스는 런던에 남아 있기가 힘들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칭타칭 영국의 애국지사로부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를 형편이었다. 월리스는 영국을 떠나 칸느에 있는 친구의 별장으로 피난의 길을 떠났다. 보도진들은 월리스의 일거수일투족을 경쟁적으로 보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남불의 리옹에 도착한 월리스는 취재진의 집요한 추격을 따돌리느라고 이들과 한시간이 넘는 자동차 경주를 벌인 끝에 요행으로 칸느 부근에 있는 빌라 루 비에이(Villa Lou Viei)에 도착하는 난리를 피기도 했다. 그후 3개월 동안 빌라 루 비에이는 취재진의 포위 속에 있었다.

 

윈저성에서. 왼편으로부터 필립공, 엘리자베트 여왕, 여왕의 어머니, 여왕의 삼촌인 글라우체스터 공작 부부, 에드워드 8세, 심슨부인. 1967년. 조지 5세의 부인 메리(대영제국의 왕비 겸 인도의 황후) 탄생 100년 기념명판 제막식에서.

7. 마침내 왕관을 버린 국왕

 

런던에서는 에드워드가 당시 수상이던 스탠리 볼드윈과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어떻게 하면 월리스와 결혼도 하고 왕위도 유지할수 있는지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에드워드는 마지막 카드로서 어디서 들었는지 귀천상혼(貴賤相婚: Morganatic marriage)의 예를 적용하기를 원했다. 에드워드가 평민인 월리스와 결혼하면 에드워드는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지만 월리스는 왕비의 지위를 가질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이러한 제안마저 볼드윈 수상뿐만 아니라 호주와 남아프리카 수상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만일 에드워드가 볼드윈 수상의 자문을 받아들이지 않고 월리스와의 결혼을 강행한다면 국왕이 내각을 불신하는 것이므로 볼드윈 내각은 총사퇴를 해야 한다. 이는 헌정의 위기를 초래하는 대사건이 될수 있는 일이었다.

 

1919년 황태자 당시의 에드워드. 우리나라에서는 고종 황제가 붕어하고 이어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였다.

 

한편, 남불의 칸느에서는 국왕의 시종장인 브라운로우(Brownlow)가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메리 황후 등 왕족들의 당부를 받고 월리스를 방문하여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에드워드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설득하는 일까지 있었다. 결국 월리스도 사태가 점점 악화되는 것을 느끼고 마침내 에드워드와의 결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1936년 12월 7일, 월리스는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미리 준비한 발표문을 읽었다. 발표문은 브라운로우 시종장이 초안을 만든 것이었다. 발표문의 결론은 에드워드 국왕과의 결혼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와 왕실은 큰 숨을 내쉬며 이것으로 만사가 종지부를 찍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치도 않은 데서 더 큰 복병을 만났다. 복병은 에드워드 자신이었다. 에드워드는 월리스가 그런 발표를 하자 그 발표가 월리스의 의사에 반한 것이라고 믿고 월리스와의 결혼을 더욱 굳게 결심한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복잡해진 것이다. 월리스의 개인변호사인 존 고다드(John Goddard)의 말을 들어보면 문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수 있다. 고다드 변호사는 “나의 의뢰인인 월리스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어떠한 일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방이다. 이쪽의 문은 활짝 열어 놓겠지만 저쪽의 문은 대단히 좁은 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결국 만일 에드워드가 월리스와 결혼을 결심했다면 왕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드워드가 동생 조지 6세에게 양위를 하던 해인 1936년의 심프슨 부인 월리스.

 

결국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12월 10일 세명의 남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위서(Instrument of Abdication)에 서명을 하였다. 이튿날인 12월 11일 에드워드의 바로 아래 동생인 요크공작이 조지 6세로서 대영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현재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이다. 그날 에드워드는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전국에 퇴위에 대한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에드워드는 “나는 (대영제국의 국왕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수행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내가 바라는 대로 왕위를 사퇴코자 한다. 이것은 내가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이나 지원을 받지 않고 취한 조치이다”라고 말하였다. 영국의 국민들은 '사랑 좋아하네'라면서도 에드워드의 퇴위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형인 에드워드가 심슨부인 월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왕위를 포기하는 바람에 대영제국의 국왕이 된 조지 6세.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아버지이다.

 

사랑하는 월리스와 결혼하기 위해 대영제국의 왕위를 동생에게 넘긴 에드워드는 영국을 떠나 오스트리아에 가서 엔체스펠드(Enzesfeld) 궁에 머물렀다. 유명한 로트쉴트 가문에 속한 저택이었다. 에드워드는 월리스의 이혼 수속이 완료되기 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며 지냈다. 이혼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섯불리 무슨 행동을 취한다면, 예를 들어 월리스와 동거에 들어간다든지 하면 세간의 비난을 받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었다. 월리스의 이혼수속은 1937년 5월 완료되었다. 유럽에서는 나치에 의한 기세가 심상치 않은 흉흉한 때여서 월리스의 이혼 소식은 별로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월리스 심슨의 이혼이 성립되자 월리스는 더 이상 심슨부인이 아니었다. 처녀 때의 이름인 월리스 워필드로 돌아갔다.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1937년 5월 4일 프랑스의 샤토 드 깡데(Chateau de Candé)에서 몇 달 만에 다시 만났다.

 

미국 라이프 잡지 커버를 장식한 에드워드와 심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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