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기적 로맨스: 심슨

나치의 동조자?

정준극 2009. 12. 31. 06:31

9. 나치의 동조자?

- 2차 대전과 윈저공 부부 -

     

에드워드는 퇴위한지 1년 후인 1937년에 베를린에 가서 히틀러를 만났다. 항간에서는 에드워드가 히틀러의 도음을 받아서 왕관을 되찾으려 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영국의 일부 언론은 히틀러를 찾아간 에드워드를 나치왕(Nazi King)이라면서 비난하였다.

               

윈저공과 윈저공부인은 2차 대전 직전에 프랑스에서 살았다. 1937년, 결혼식을 올린후 두 사람은 히틀러의 특별초청을 받아 독일을 방문한바 있다. 에드워드 부부의 독일 방문은 독일 언론의 집중 관심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신문마다 대서특필하였다. 마치 영국과 독일이 단짝이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히틀러는 윈저공부인인 월리스에 대하여 일부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훌륭한 왕비가 될수 있었는데...’라면서 은근히 애석한 심경을 전했다고 한다. 에드워드와 월리스의 독일 방문은 다른 나라에서는 상당한 논란이 된 사건이었다. 심지어 월리스가 독일의 스파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미국 FBI의 1930년대 파일에 의하면 월리스가 나치 동조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되어 있다. 나치에 의해 지위를 박탈당한 독일의 뷔르템버그공작(Duke of Württemberg)은 FBI에게 월리스와 현재 나치의 핵심인물인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가 한때 런던에서 밀회를 즐기던 연인사이였다고 증언했다. 월리스와 폰 리벤트로프에 대하여는 참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월리스가 침대 탁자에 폰 리벤트로프의 친필 서명이 된 사진을 항상 세워두고 애착을 보였다는 것이며 나아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에 월리스는 영국과 비시정부에 대한 여러 정보를 폰 리벤트로프에게 비밀리에 전달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베를린에서 히틀러의 영접을 받고 있는 윈저공 부부. 1937년. 런던에서는 자기들을 쓴 오이 보듯이 하는데 베를린에서는 환대를 받으니 기분이 좋을수 밖에 없었다. 인간백정 히틀러도 이렇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던 때도 있었다.

                               

1939년에 드디어 히틀러의 야욕에 의한 2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항상 형님인 에드워드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을 약간이나마 가지고 있는 조지 5세는 프랑스에 있는 에드워드를 프랑스주둔 영국군의 고위 장교로 임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리스는 파치스트 운동에 연관한 인물들을 계속 초대하여 파티를 베풀었으며 남편 에드워드에게서 엿들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방어계획을 이들에게 흘렸다고 한다. 1940년 5월, 나치가 프랑스 북부를 침공하여 힘들이지 않고 점령하였고 영국에 공습을 퍼붓고 있을 때 월리스는 어떤 미국 기자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고 한다. 즉, 자기의 간첩행위를 간접적으로 인정한 발언이라고 볼수 있다.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자 에드워드 부부는 독일과 대적하고 있는 영국의 왕족의 일원으로서 일단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파리에 그대로 있어도 나치가 해를 입히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처음에는 비아릿츠(Biarritz)에 있었다가 몇달 후에는 스페인으로 옮겼다. 에드워드는 스페인에 있을 때에 미국대사에게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 당한 것은 프랑스의 내부가 병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드리드에 있던 에드워드 부부는 한 달 후에 리스본으로 옮겼다. 리스본의 영국대사는 에드워드 부부를 어떤 부유한 은행가의 저택에 체류토록 주선해 주었다. 실은 이 은행가는 독일과 영국에게 동시에 정보를 제공하는 2중 간첩이었다. 8월에 영국정부는 리스본에 전함을 보내어 에드워드 부부를 서인도제도의 바하마로 데려다 주었다. 조지 5세가 에드워드를 유럽으로부터 안전한 바하마의 총독으로 임명하였기 때문이다.

 

바하마 나쏘의 옛 식민지 시대 건물(현재는 아틸란티스 로열 호텔)

                         

월리스는 바하마에서 5년동안 총독부인으로서 목에 힘을 주며 지냈다. 하지만 윌리스는 실제로 바하마라고 하면 나쏘(Nassau)이건 어디건 간에 싫어했다. 월리스는 나쏘를 ‘세인트 헬레나’라고 불렀다. 나폴레옹처럼 유배되었던 곳과 같다는 의미였다. 당시 유럽은 전화에 휩싸여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으며 경제는 파탄이었다. 그러한 때에 사치를 목에 매고 사는 월리스는 미국에 자주 나가서 엄청난 쇼핑을 했다. 사람들은 영국에서는 식량을 배급하고 있고 전기를 제한송전하고 있는 마당에 영국 왕실 가족이라고 주장하는 월리스가 호화 쇼핑만 일삼는다고 비난했지만 월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월리스는 인종차별도 서슴지 않았다. 월리스는 바하마 원주민들을 ‘게으른 놈들’ ‘애들만 잘 낳는 검둥이’라면서 얕잡아 보았다. 1941년 에드워드 부부가 스웨덴의 거물사업가인 악셀 벤너 그렌(Axel Wenner-Gren)의 요트를 타고 카리브 연안을 순항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은 ‘정신 나간 소리’라면서 격렬하게 반대했다. 처칠은 스웨덴의 벤너 그렌이 친나치주의자임을 강조하였다. 영국의 기관들은 윈저공부인인 월리스가 반영국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고하며 조치를 요청했다. 월리스의 반영국적인 행동은 아마도 자기를 영국왕비의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한데 대한 반감때문이라는 해석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에드워드 부부는 바하마에서 프랑스로 돌아와 여생을 지냈다.

 

결혼기념 사진. 그래도 일단 결혼식을 올렸다. 대영제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의 결혼식이 이게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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