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기적 로맨스: 심슨

세번째 결혼: 윈저공부인

정준극 2009. 12. 31. 06:30

8. 세번째 결혼: 윈저공부인

 

에드워드와 월리스는 1937년 6월 3일 프랑스의 샤토 드 깡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샤토 드 깡데는 샤를르 브도(Charles Bedaux)의 저택으로서 그는 2차 대전 중에 나치독일을 위해 많은 활동을 했던 사람이다. 그 때문에 나중에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에드워드도 히틀러를 위해 활동했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그건 그렇고 이들이 결혼식을 올린 6월 3일은 에드워드의 선친인 조지 5세의 72회 탄신일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인 메리 황후는 에드워드가 아버지인 조지 5세의 그늘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 날을 결혼식 날짜로 잡았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에는 영국 왕실에서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비록 마침내 온갖 풍설을 헤치고 결혼에 골인하였지만 평생 동안 자녀가 없는 결혼생활이었다.

 

윈저공 부부의 결혼식. 1937년 프랑스에서.

 

잠시나마 대영제국의 국왕이었던 에드워드, 그리고 그와 결혼한 월리스에 대한 왕실의 호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로 국왕이 된 조지 6세는 퇴위한 형 에드워드에게 윈저공(Duke of Windsor)라는 신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 조치는 이른바 개봉칙허(開封勅許: Letters paten)였다. 비록 국왕의 칙허라고 해도 의회와 정부의 승인이 필요한 것이다. 영연방의 정부들은 조지 5세가 에드워드를 윈저공으로 삼는다는 칙허를 만장일치로 통과하였다. 다만, 호칭에 있어서 윈저공부인이 된 월리스에 대하여는 Her Royal Highness(전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신임 국왕인 조지 5세는 윈저공부인에게 왕족의 호칭을 주는 것은 안된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에드워드와 조지 5세의 어머니인 메리 왕대비, 그리고 조지 5세의 부인으로 왕비가 된 엘리자베트(나중에 Queen Mother)의 의견도 그러했다. 왕족들은 비록 월리스가 윈저공과 결혼을 하고 윈저공부인이라는 신분을 갖게 되었지만 상대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에드워드 부부는 프랑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런던의 왕족들과 만날 일이 거의 없지만 만날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인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다만, 에드워드는 간혹 어머니인 메리 왕대비를 만나기 위해 런던에 들른 일은 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 메리 왕대비(1867-1953). 왕비로서는 1910-1936년까지 있었다. 남편은 조지 5세.

 

조지 5세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왕비(나중에 Queen Mother라는 애칭으로 불림)는 일견 대단히 온화하고 인정 많은 아줌마처럼 보이지만 시아주버니인 에드워드가 월리스와 결혼한다느니 어쩌느니 할 때에 막후에서 월리스를 대단히 비난하고 돌아다녀서 조지 5세가 국왕이 되는 것을 측면에서 지원 사격했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왕비(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어머니)는 윈저공부인인 월리스의 생존 기간 동안에 쉬지 않고 그를 비난하는 역할을 거의 자청해서 맡아 했다고 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아직도 황태자일 때 에드워드의 정부에 불과한 월리스가 마치 왕세자비처럼 행동한 것에 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였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조지 5세가 겉으로는 착하게 생긴 엘리자베스 왕비(Queen Mother)의 은근한 등쌀 때문에 일찍 소천했다는 얘기도 나돌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같은 소문들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왕비와 아주 가까운 친구인 그래프튼 공작(Duke of Grafton)은 ‘엘리자베스 왕비께서는 윈저공부인에 대하여 단 한마디도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지요. 다만,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면서 고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도 보아도 알수 있다.

 

결혼후 파리에 정착한 윈저공 부부. 그런데도 얼굴엔 우수의 그림자?

 

월리스 자신은 하마터면 자기가 될뻔한 왕비의 자리를 차지한 엘리자베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윈저공부인인 월리스는 엘리자베스 왕비에 대하여 ‘미세스 템플’(Mrs Temple)이라고 불렀다. 템플(사원)처럼 심지가 굳건하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당시 아역배우로서 인기를 끌었던 셜리 템플과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었다. 월리스는 엘리자베스 왕비를 ‘Cookie’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맛있는 과자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자기도 물론 좋아하여 잘 먹었지만 딸들인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2세 여왕)와 마가렛 공주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과자에 대하여 대단한 센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Cake(케이크)라고 불렀다. 한편, 윈저공부인인 월리스는 왕족들이 자기에 대한 왕족으로서의 호칭사용을 반대한 것을 대단히 분개해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직계 가족들마저 자기를 왕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하여도 분노를 터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리스의 시종들이나 절친한 사람들은 월리스를 왕비마마(Her Royal Highness)라고 불렀다.

 

1965년 3월 런던의 한 병원에서 눈수술을 받은 후 퇴원하는 에드워드. 심슨 부인은 런던에 들르기는 했지만 왕궁으로부터 어떠한 예우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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