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연인: 마거릿

이루지 못한 사랑

정준극 2009. 12. 31. 17:18

4. 이루지 못한 사랑

 

마거릿은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졌다. 마거릿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마거릿은 슬픔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야 했다. 마거릿에게 신앙심마저 없었다면 슬픔을 극복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언니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되자 마거릿은 혼자 몸이 된 어머니와 함께 버킹검 궁전을 나와서 클레렌스 하우스(Clarence House)로 거처를 옮겼다. 대신에 여왕이 된 언니 엘리자베스는 클레렌스 하우스에서 나와 버킹검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때 조지 6세의 시종무관 중의 한 사람이던 피터 타운센드가 혼자 몸이 된 조지 5세의 미망인과 마거릿 공주를 돌보는 회계감사관(Comptroller)으로 임명되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마거릿으로서는 누군가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마거릿과 타운센드는 점점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타운센드는 멋진 남자였다. 예의바르고 자상한 남자였다. 마거릿의 마음이 타운센드에게 기울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런던의 클레런스 하우스.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 후 어머니인 퀸 마더와 마거릿이 함께 거주하던 저택. 타운센드는 재정감시관이었다.

 

타운센드는 1952년에 부인 로즈메리 폴과 이혼하였다. 결혼생활 11년만의 일이었다. 타운센드는 부인과 정식으로 이혼한 이듬해인 1953년에 마거릿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타운센드는 마거릿보다 16년 연상이었다. 게다가 전처인 로즈메리 폴(Rosemary Pawle)과의 사이에 아이들이 둘이나 있었다. 마거릿은 기다렸다는 듯이 청혼을 수락했다. 그리고 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이리저리 결정했으니 잘 좀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이삼년의 세월이 흘렀다. 왕실에서는 마거릿의 결혼에 대하여 아직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세월만 잡아먹고 있었다. 일찍이 1936년에 영국교회는 왕족 중에서(왕위계승서열자 중에서) 이혼한 사람의 재혼을 인정할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것 때문에도 마거릿과 타운센드의 결혼은 저항을 받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마거릿의 할머니, 즉 조지 5세의 부인이었던 메리 황후는 마거릿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손녀딸인 마거릿에게 ‘좀 더 기다려라. 모든 일이 잘 될지도 모른다’라고 말해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자문관들은 타운센드를 해외근무로 발령 내라고 권고하였다. 영어 속담에도 Out of sight, out of mind(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져서 만나지 않게 되면 없던 일로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같은 권고를 거부했다. 동생 마거릿과의 문제 때문에 타운센드를 귀양 보내듯이 해외로 보내면 사람들이 여왕을 속이 좁고 째째한 여자라고 말 할 것이므로 그런 일은 하지 못하겠다는 설명이었다. 대신에 여왕은 타운센드를 마거릿으로부터 떼어 놓기 위해 버킹엄 궁전에서 근무토록 했다.

 

1947년 남아프리카 방문중 마거릿과 타운센드 

 

영국의 내각은 마거릿의 결혼을 승인할수 없다고 나섰다. 정부의 승인이 있어야 생활비 및 복리후생 문제가 해결된다. 신문들은 연일 두 사람의 결혼을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 ‘영국 왕실에 먹칠을 하는 일’이라면서 비난성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윈스턴 처칠 수상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영연방의 수상들도 만장일치로 마거릿과 타운센드의 결혼을 거부키로 결정했음을 통보했다. 그러면서 영국 의회는 영국교회가 결혼을 인정하지 않는한 역시 같은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다만, 만일 마거릿이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면 결혼을 하던 말던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왕족의 신분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다. 마거릿과 타운센드는 사면초가의 형편이 되었다. 신문은 ‘안 될 일’이라면서 공격을 퍼부었지만 일반 백성들의 의견은 영국교회의 지침, 또는 영국 정부의 의견과는 관계없이 마거릿 본인이 결정할 일이라고 하면서 일단은 마거릿에게 동정적이었다. 결국 마거릿은 결혼을 포기한다는 성명서를 냈다. 마거릿은 만일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면 민간인 신분으로서 결혼을 할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내세우고 그렇지만 기독교인은 한번 결혼함으로서 영원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간과할수 없으며 영연방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할수도 없으므로 결혼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이러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 대한 타운센드 편대장의 끊임없는 지원과 헌신은 더욱 강화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하였다. 아무튼 말은 잘한다.

 

관습이 갈라 놓은 두 사람의 사랑. 마거릿과 타운센드. 하지만 16세 차이가 있으며 더구나 타운센드는 이혼하여 두 아이까지 있는 몸이었고 마거릿은 이제 겨우 17세 아가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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