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세계의 연인: 마거릿

마거릿의 트루 러브 피터 타운센드

정준극 2009. 12. 31. 17:23

참고자료

마거릿의 트루 러브 피터 타운센드

 

마거릿 공주는 여자 돈후안이라고 할만큼 수많은 남성과 관계를 맺은 경력이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피터 타운센드뿐이었다고 한다. 피터 타운센드(Peter Townsend: 1914-1995)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영국공군의 편대장으로서 2차 대전의 영웅이었으며 1944-1952년에 조지 6세, 1952-53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의 시종무관이이었다. 조지 6세의 시종무관으로 있을 때에 마거릿 공주의 샤프롱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마거릿과 가깝게 지낼수 있었으며 그것이 사랑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파운센드는 마거릿보다 16세 연상이었으며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고 더구나 전처와의 사이에 두 아들까지 있는 남자였다.

 

1950년대 말의 피터 타운센드

 

타운센드는 1914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미얀마)의 랑군(양곤)에서 태어났다. 1914년이면 1차 대전이 발발한 해이다. 타운센드는 아버지가 영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함께 와서 헤일리베리(Haileybury)학교를 다녔고 그후 1933년에는 영국 공군(RAF)에 들어가서 조종사로서의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후 처음에는 신병 훈련교관을 맡아했다가 1940년에는 편대장이 되어 부대에 배속되었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에서는 야간작전 비행대장을 지냈고 이어 스피트화이어(Spitfire)편대장이 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투기 조종사로서 부상을 당한 중에도 편대를 이끌고 작전을 완수할 정도로 책임감이 특출했다. 그는 전쟁 중인 1941년 7월, 27세의 나이에 로즈메리 폴(Rosemary Pawle: 1921-2004)이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들 길스(Giles: 1942-)와 휴고(Hugo: 1945-)를 두었다. 타운센드와 로즈메리는 1952년에 이혼하였다. 로즈메리는 곧이어 존 드 라츨로(John de Laszlo)라는 사람과 재혼했고 10여년 후에 이혼하여 1978년에 다시 캠든(Camden)후작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으니 팔자도 화려했다.

 

피터 타운센드. 1980년

 

1944년 타운센드는 조지 6세의 시종무관으로 임명되었다. 마거릿 공주와의 관계가 발전된 것은 1947년 조지 6세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를 순방할 때에 수행하고부터였다. 이때 타운센드는 마거릿 공주의 샤프롱 역할을 맡았다. 당시 마거릿 공주는 17세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가씨였다. 1951년 조지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마거릿의 언니 엘리자베스가 엘리자베스 2세로서 영국 여왕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여왕으로 즉위한지 이듬해인 1952년 타운센드를 여왕의 어머니(퀸 마더)와 마거릿 공주의 재정을 책임지는 감사관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해서 타운센드는 마거릿과 더욱 친밀해졌다. 1953년에 타운센드는 마거릿에게 정식으로 청혼하였다. 타운센드는 그 전해에 부인과 이혼하였었다. 청혼을 받은 마거릿도 타운센드와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그때부터 전세계는 마거릿 공주와 타운센드 대령간의 로맨스 이야기로 용광로처럼 들끓기 시작했다.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영국교회도 반대했다. 왕실에서도 반대했다. 여왕의 하나뿐인 동생이 이혼남과 결혼하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처칠은 타운센드를 벨기에에 공군무관으로 보냈다. 사태가 냉각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하여 타운센드는 1953-56년간 브뤼셀에서 영국대사관의 무관으로 지냈다. 마거릿은 타운센드와의 결혼이 반대에 부딪히자 결국은 포기선언을 하였다. 한편, 브뤼셀에 있던 타운센드는 마거릿이 타운센드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후 벨기에 여자인 마리-루스 자마뉴(Marie-Luce Jamagne)와 결혼하였다. 타운센드가 벨기에에서 어떤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거릿은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던지 곧이어 안토니 암스트롱-존스라고 하는 왕실 사진사의 청혼을 받아 들여 1960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세계가 관심을 보여준 결혼식이었다. 암스트롱-존스는 스노우던경(Earl of Snowdon)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스노우던경 부부는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 결국 결혼 18년만인 1978년 마거릿은 스노우던경과 이혼하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앞서서 마거릿을 집중 탐구할 때에 소개한 것이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살펴본 것이니 양해 바란다.

 

영국 공군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피터 타운센드. 1980년대. 타운센드는 2차 대전중 영국 공군의 영웅이었다.

 

한편, 타운센드는 어떻게 지냈는가? 주로 넌픽션 책을 집필하면서 지냈다. 예를 들면 그가 1950년대에 혼자서 보트를 타거나 자동차를 운전하여 세계일주를 했던 경험담을 적은 Earth My Friend(나의 친구 지구), 영국공군과 독일공군의 전투를 그린 Duel of Eagles(독수리의 결투), 1941-42년 독일과의 야간 공중전에 대한 내용인 The Odds Against(운명을 거스르며), 조지 6세에 대한 자서전적 실화인 The Last Emperor(마지막 황제),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피난선을 타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소녀의 이야기인 The Girl in the White Ship(피난선의 소녀),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다룬 The Postman of Nagasaki(나가사키의 우체부), 자서전인 Time and Chance(시간과 기회) 등이었다. 그는 단편도 상당수를 써서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였다. 타운센드는 1995년 위암으로 프랑스의 랑부이예(Rambouillet)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세였다. 그의 묘소는 생레저앙이벨린(Saint-Leger-en-Yvelines)의 교회묘지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길수 있다. 언니인 엘리자베스는 그렇게도 정숙하고 근엄한데 어찌하여 동생인 마거릿은 평생이 스캔들 투성이일까? 이에 대하여 마거릿은 이렇게 말했다.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두 자매가 있는데 한 사람은 여왕이면 여왕은 모든 명예와 모든 선함의 원천이어야 한다. 한쪽이 선하면 다른 한쪽은 그렇지 않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다른 하나는 가장  못된 일만 하는 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피터 타운센드의 묘비. 테니슨의 시 한구절이 적혀 있다. "And May There Be No Sadness or Farewell When I Embark'이다. '내가 세상 떠날 때에는 슬픔과 이별도 없으리라'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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