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우스펜스키 대성당에서의 대관식

정준극 2010. 1. 2. 05:12

5. 제정러시아의 차르가 되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에서의 대관식

 

나약한 성품의 니콜라스이지만 피는 속이지 못한다고 전제군주의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을 거북해 했다. 그래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서서히 의회 제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지만 니콜라스는 의회 민주주의를 반대하였다. 니콜라스는 결혼 전에 영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그때 의회에서 의원들이 자유스럽게 정책토론을 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니콜라스는 자기가 황제가 되면 저런 의회 제도를 도입해야겠다고 말한 일이 있지만 실제로 황제가 되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던 것이다.

 

대관식후 사제가 니콜라스의 이마에 성유를 발라 축복하고 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

 

니콜라스가 황제로 즉위한지 얼마후 러시아 전국의 지방에서 농민대표들이 생페터스부르크로 올라와 니콜라스에게 의회민주주의를 도입하고 황실을 입헌군주제로 개혁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들은 또한 농민들의 정치사회적 생활을 개선하여 줄것을 요구했다. 대부분 농민대표들은 지방의회(쳄스트보스: Zemstvos)의 멤버들이었다. 농민대표들이 니콜라스 황제에게 제출한 탄원서는 황실 예법에 따라 작성된 문건으로 아주 완곡한 표현으로 개혁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농민들의 탄원서를 보자마자 ‘이런 버릇없는 백성들이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부족하다고 이 난리들인가? 지방의회의 사람들이 황제가 하는 일에 감히 간섭하려는가? 생각 없이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라면서 대노하였다. 그러면서 아버지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이어 받아 절대군주제를 강력히 유지하겠다고 천명했다.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니콜라스는 아직도 낡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점차 니콜라스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새로운 차르가 백성들이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으며 아울러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니콜라스의 대관식은 차르로 즉위한지 1년 후인 1896년 5월 14일 모스크바의 크렘린에 있는 우스펜스키(Uspensky)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나흘 후인 5월 18일에는 모스크바 근교의 코딘카(Khodynka) 평원에서 백성들에게 음식과 공짜 맥주와 기념품을 나누어주는 대규모 축하잔치가 열렸다. 잔치 장소를 코딘카로 정한 것은 그곳이 러시아 제국의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는 이곳에서 대관식 축하잔치를 베풀어 차르로서의 정통성을 보이고 아울러 전통적인 절대군주로서의 위엄을 보이고자 했다. 이날 잔치에는 약 50만명의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음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굶주린 백성들은 서로 음식을 차지하기 위해서 난리도 아니었다. 이런 난리 통에 1,429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최소 9천명 내지 최대 2만명의 백성들이 다쳤다. 이날의 사건을 ‘코딘카 비극’이라고 부른다. 황제로서 첫 발을 디딘 니콜라스에게는 불운한 징조였다. 아무튼 이날의 비극

으로 니콜라스는 백성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빵한조각 때문에 코딘카에서 압사한 어떤 여인을 군중들이 물끄럼히 바라보고 있다.1896년.

 

기본적으로 니콜라스의 정책은 아버지인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1896년 전국박람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여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였다. 1897년에는 이미 15년전 부터 추진되고 있던 재정개혁의 일환으로 금본위화폐제도를 정착하였다. 1902년에는 대시베리아철도를 거의 완성하였다. 이로써 극동지역과의 무역이 크게 발전되었다. 물론 미비한 점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대시베리아철도는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훨씬 일찍 완성된 것이었다. 외교에 있어서 니콜라스는 알렉산더 3세의 정책을 계승하여 프랑코-러시아 동맹을 강화하였으며 기본적으로는 유럽의 평화를 위한 정책을 유지하였다. 니콜라스가 헤이그에서의 만국평화회의를 주도한 것은 큰 업적이었다. 만국평화회의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은 우리나라의 이준 열사 등 고종황제의 칙사들이 천신만고 끝에 헤이그까지 갔으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대단한 유감이 아닐수 없다. 아무튼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서는 국가간 분쟁을 중재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해야 한다는데 뜻을 함께 했고 무기경쟁을 종식해야 한다는 데에도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강대국들간의 이해관계가 정리되지 않아서였다.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등을 파견하였으나 회의장에 참석하지도 못했다. 이들이 나라없는 울분을 참지 못하여 세상을 하직한 곳이 바로 헤이그였다.

 

니콜라스 2세의 아버지 알렉산더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