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피의 일요일

정준극 2010. 1. 2. 05:15

9. 피의 일요일

 

1905년 1월 9일 토요일, 게오르게 가폰(George Gapon)이란 러시아정교회 신부가 정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왔다. ‘내일 일요일에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입니다. 시위대들은 니콜라스 황제에게 청원서를 제출할 것입니다. 황제가 친히 나와서 청원서를 받음이 바람직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전갈을 받은 정부는 당장 황제에게 보고하지는 않고 모른채 했다. 장관들은 ‘황제께서 어떻게 친히 시위대들을 만나 얘기를 나눈다는 말인가? 안될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때 황제는 생페터스부르크를 떠나 차르스코에 셀로(차르의 마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반정부 시위대 대표들은 황제가 나오기 어려우면 황실의 누구라도 대신 나와서 청원서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가폰 신부는 마침내 경찰당국을 방문하여 경찰 책임자라도 시위대와 만나 청원서를 받아 황제에게 전달해 줄것을 당부했다.

 

'피의 일요일'에 시위대에게 발포자세를 취하고 있는 군인들. 1905년.

 

경찰당국은 가폰을 반정부 분자로 간주하여 그 자리에서 체포했다. 가폰 신부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전파되었다.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젊은 신부들도 시민들과 동조하기 시작했다. 새로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스비아토폴크-미르스키(Sviatopolk-Mirsky)공자는 아무래도 군대를 더 투입하여 시위를 막아 황제의 근심을 덜어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가폰 신부는 일단 석방하였다. 시골에 있던 니콜라스가 대규모 시위 계획을 보고 받은 것은 그날 밤 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별일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생페터스부르크에서는 내무장관의 지시에 따라 교외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시내로 진입하였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는 토요일 밤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조용하기만 했다. 이튿날이 되었다. 주일이었다. 어느 틈에 거리마다, 광장마다 시위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2만명이나 운집했다. 시위대의 앞에는 사회주의 사제인 가폰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갑자기 시내의 한 곳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정부군의 어떤 병사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것이다. 그러자 시내의 여러 곳에서 총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시위대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시위대는 흩어졌다. 얼마후 시가지는 잠잠해 졌다.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시위를 주도한 게오르기 가폰 신부

 

그로부터 2주일 후인 1월 22일이었다. 가폰 신부가 또 다시 시위대를 이끌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로 노동자들인 시위대는 서로 팔짱을 엮고서 행진하였다. 십자가와 이콘(聖像)과 교회의 깃발을 든 사람들도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국기와 차르의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시위대들은 행진하면서 성가를 불렀으며 그렇지 않으면 제국의 국가(國歌)인 ‘신이시여 차르를 지켜주시옵소서’를 불렀다. 시위대는 오후 2시경에 겨울궁전 앞에 모이도록 일정이 짜여져 있었다. 군대와 코사크 기병대와 제국의 경기병들이 거리의 중요지점이나 길목에 배치되어 있었다. 잠시후 시위대들이 나타나자 군대는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92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수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시위대의 앞에 섰던 가폰 신부는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선두에 섰던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다.

 

시위대는 흩어져서 시내 밖으로 쫓겨났다. 군대가 뒤따라가서 이들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했다. 이때에 무려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날을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른다. 비록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날은 러시아 역사의 전환점이 된 날이었다. 제정러시아에는 전통적으로 ‘차르와 백성은 하나다’라는 관념이 존재했었다. 총알이 성상과 깃발과 심지어는 차르의 초상화를 뚫고 지나가자 시위대는 ‘차르는 우리를 돕지 않는다’라고 절규하였다. ‘피의 일요일’에 대한 뉴스가 전 유럽에 퍼졌다. 영국 노동당 수상인 램제이 맥도날드(Ramsay MacDonald)는 니콜라스 황제를 ‘피에 얼룩진 인간, 만인의 살인자’라며 비난했다. 이어 니콜라스를 비난하는 소리가 세계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피의 일요일' 생페터스부르크에서의 학살. 19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