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

정준극 2010. 1. 2. 05:17

11.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

 

1914년 6월 28일, 유럽의 한 구석 사라예보에서는 한방의 총성이 울렸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검은 손’(Black Hand)이라고 하는 세르비아민족주의단체의 멤버인 가브릴로 프린시프(Gavrilio Princip)라는 청년이 쏜 총탄에 목숨을 잃었다. 오스트리아제국으로서는 도저히 묵과할수 없는 사태였다. 땅을 치고 통탄한들 죽은 페르디난트 대공이 살아 돌아 올리는 만무하지만 오스트리아로서는 제국의 명예가 걸린 일이니만치 세르비아를 비롯한 제국내의 불순분자들을 즉각 징계할 필요가 있었다. 유럽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유럽은 양대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상호방어동맹을 맺고 있었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러시아를 중심으로한 범슬라브 연맹과 오스트리아 및 독일 을 중심으로한 동맹국이 대규모의 전쟁을 피할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사라예보에서의 총성으로 세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전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되었다.

 

1차 대전중 세르비아인을 총살하는 오스트리아군. 1차대전중 세르비아인은 85만명의 희생되었다. 전쟁 전의 인구의 거의 절반이 희생되었다.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유럽의 여러 강호들이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비밀리에 협상을 하고 동맹을 맺었고 그러다가 동맹을 파기하거나 다시 동맹을 맺는 일 등은 부지기수여서 복잡할 것 같아 지면상 생략키로 한다. 그러한 중에 제정러시아의 니콜라스는 어떤 정책을 내걸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우유부단이었다. 범슬라브 연맹을 생각하면 오스트리아-독일과 일전을 불사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프러시아는 제정러시아의 처갓집이기도 했다. 니콜라스는 장인이 되는 프러시아의 빌헬름 황제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번의 비밀서한들이 왕래되었다. 잘해보자는 내용이었다. 이를 ‘윌리와 니키의 서신교환’(Willy and Nicky Correspondence)라고 부른다. 윌리는 빌헬름(윌리엄)을 말하며 니키는 니콜라스를 말한다. 결국 두 사람은 평화를 위해 노력하자는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하지만 러시아로서는 범슬라브연맹의 일원인 세르비아의 위기를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니콜라스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렸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의 접경지대에 한하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은 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러시아는 부분 동원령을 내리더라도 새로운 병력을 어떻게 무장하고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에 대한 임시대책이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전면 동원령을 내렸다. 각료들과 장군들이 전면 동원령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면서 재고할 것을 요청했지만 니콜라스는 그런 요청을 묵살하였다. 니콜라스는 1914년 7월 25일 전군에 비상령을 하달하였다. 전군이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이런 비상령은 비록 전투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의 상대방을 충분히 위협하는 것이었다. 마치 러시아가 먼저 선전포고를 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알바니아로 퇴각하는 세르비아 병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