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프러시아의 최후통첩

정준극 2010. 1. 2. 05:18

12. 프러시아의 최후통첩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셉 1세 황제는 바드 이슐에서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서에 정식으로 서명하였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피살된지 꼭 한달만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배후에 있는 독일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수 없었고 세르비아를 지원하는 러시아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국들도 참여하였다. 러시아 내에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소리가 높았다. 아무것도 득이 될 것이 없는데 왜 전쟁에 참여하느냐는 여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스는 전군에 전투태세를 명령했다. 하지만 만일 평화협상이 시작된다면 어떠한 전투행위도 일으키지 않을 생각이었다. 독일은 러시아에게 향후 12시간 내에 전군을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최후통첩을 보낸 12시간이 지났다. 생페터스부르크에서는 독일 대사가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나 세 번씩이나 철군을 요청하였으나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독일 대사는 러시아가 전쟁을 원하는 것으로 믿고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지 않을수 없다고 말하고 물러났다. 1914년 8월 1일 러시아와 독일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결과는? 러시아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 들통이 났다. 가장 잘못된 점은 러시아군에 대한 황제의 지나친 신뢰였다. 니콜라스를 비롯한 생페터스부르크 당국은 러시아군이 전통적인 스팀롤러(우격다짐) 정신으로 곰처럼 밀고 나가면 패배가 없을 것으로 믿었다. 러시아군의 전력은 정규군이 1백40만 명이지만 여기에 동원령으로 징집된 병력까지 합하면 무려 3백1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전국 동원령이 지켜진다면 수백만명의 병력이 추가된다. 하지만 숫자만 많았을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게 지급할 탄환이 아니라 식량이 부존한 것이었다.

 

독일은 철도가 잘 발달하여서 순식간에 병력을 이동할수 있었다. 하지만 철도가 부실한 러시아는 병사들이 전선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8백마일(약 1천300Km)을 열차로 가야 했다. 독일군은 러시아군보다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 러시아의 중공업은 취약하여서 군장비를 제대로 보급하지 못했다. 탄약도 턱없이 부족했다. 흑해에서의 사정은 더욱 난감했다. 러시아의 흑해함대는 독일의 잠수함(U-Boat) 때문에 속수무책이었다. 흑해의 한쪽은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은 터키가 대형 대포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의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일도 어려움이 많았다. 전선으로부터 4천마일(약 6천400km)떨어진 곳으로부터 군수물자를 수송하려니 제대로 시기를 맞출수 없었다. 러시아군으로서는 다만 하늘의 대천사가 도와 주어서 흑해가 어서 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물론 흑해가 얼어 붙는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독일 잠수함이 활동하지 못할 것이므로 그것이나마 기다려야 했다.

 

러시아군의 최고사령부는 전쟁장관인 블라디미르 수콤리노프와 역전의 야전군 사령관인 니콜라스 니콜라이에비치 대공이 서로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하면서 다투는 바람에 명령체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모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러시아군은 기어코 동부 프러시아의 독일지방을 공격하였다. 일사불란한 독일군은 곰처럼 미련한 러시아군을 완전 격퇴하였다. 얼마후의 탄넨버그(Tannenberg) 전투에서는 러시아군이 글자그대로 전멸하였다. 탄넨버그의 패배는 제정러시아의 앞날에 불길한 징조를 보여준 것이었다. 수많은 장교들이 전사했기 때문이었다. 탄넨버그 전투에서 전사한 러시아 장교들은 모두 로마노프 왕조에 충성을 맹세한 유능한 장교들이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로-헝가리군과의 전투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었고 또한 터키군도 잠시 물리쳤지만 악착같고 막강한 독일병정들과의 전투에서는 백전백패했다. 이곳 저곳에 무명용사의 묘지들만 늘어났다.

 

탄넨버그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러시아 병사들과 병기들. 19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