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얼어붙은 시베리아 철도

정준극 2010. 1. 2. 05:21

14. 로마노프의 종말

얼어붙은 시베리아 철도

 

제정러시아는 전쟁 중에 생필품을 생산하지 못하자 백성들의 생활을 어려워졌고 따라서 이곳저곳에서 대규모 폭동과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915년 니콜라스가 생페터스부르크를 떠나 동부 전선을 시찰하고 있을때 제정러시아의 정부는 알렉산드라 왕비가 운영했다. 그러나 사실상 생페터스부르크는 파업자들과 폭동을 일으킨 병사들의 손에 떨어져 있었다. 영국 대사를 비롯한 외교사절들은 니콜라스에게 헌법을 개정하여 입헌군주제로 만들어야 혁명을 방지할수 있다고 자문했지만 니콜라스는 듣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니콜라스는 군사령부가 있는 모길레프에서도 600km 더 떨어진 스타브카(Stavka)라는 곳에 있었다. 따라서 생페터스부르크의 궁전은 폭도들이 침범해도 무방비 상태였다. 1917년에 접어들어서 러시아는 총체적인 와해의 가장자리에 와 있게 되었다. 군대가 농민 1천5백만명을 징집했기 때문에 농촌에서는 농사를 지을 손이 부족하였다. 결국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 올랐고 서민들의 불만은 하늘을 치솟는듯 했다.

 

겨울이 닥쳐와 철도마저 꽁꽁 얼어붙었다. 그나마 열차는 석탄과 군수품을 실어 나르느라고 생필품 운송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다. 전쟁이 시작될 때에 러시아는 약 2만대의 기관차가 있었다. 그러나 1917년에 들어서서는 그중에서 7천대만이 움직일수 있었다. 객차는 50만량이었으나 17만량으로 줄어들었다. 1917년 2월, 날씨는 왜 그렇게도 추운지 7천대의 기관차 중에서 1천 2백대가 기온 급강하로 보일러가 터졌다. 이에 따라 17만량의 객차 중에서 6만량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생페터스부르크에 대한 연료와 밀가루 공급이 사라졌다. 니콜라스는 전시에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금주령을 내렸다. 금주령뿐만 아니라 술을 생산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오히려 부작용만 발생했다.

 

시베리아횡단 철도

 

1917년 2월, 생페터스부르크(페트로그라드)는 유난히 극심한 추위로 꽁꽁 얼어붙었다. 실제로 연료가 없어서 얼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여기에다가 식량난이 겹쳤다. 사람들은 상점을 부수고 빵과 생필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붉은 깃발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밴너에는 ‘독일 여자를 타도하자! 전쟁을 끝내자!’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독일 여자라는 것은 알렉산드라 왕비를 뜻했다. 경찰들이 지붕위에 올라가서 시가지를 행진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폭도로 변하였다. 수도인 생페터스부르크의 군대는 취약했다. 전선에 투입되지 못한 노병들이 주축을 이룬 군대였다. 군대도 정부의 무능에 대하여 반감을 갖고 있던 터였다. 장교들은 황실에 충성을 다해야할 명분을 찾지 못했다. 결국 군대는 시위대의 편에 섰다. 차르의 내각은 니콜라스에게 즉시 생페터스부르크로 돌아와 모든 공직에서 사임할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수도로부터 50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니콜라스는 내각을 책임 맡고 있는 프로토포포브(Protopopov)로부터 사태가 수습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뿐이었다. 니콜라스는 프로토포포프에게 만일 시위대가 폭도처럼 행동하면 가차 없이 제압하라고 지시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몽골의 고비사막을 지나고 있다. 철도 초창기에는 러시아 동부에서 서부전선으로 물자를 운반하는데 기차로 몇주일이나 걸렸다.

 

생페터스부르크의 주둔군은 그런 임무를 맡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황제에게 충성을 다짐한 노병들은 이미 거의 모두 폴란드와 갈리치아의 전선에서 목숨을 잃고 이름 모를 무덤에 묻혀 있었다. 그나마 생페터스부르크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군대는 17만명의 예비병력으로 이들은 주로 인근 시골의 노동자 계층에서 징집한 노인들이나 소년들이었다. 지휘관들은 전선에서 부상당하고 귀향한 장교들이거나 또는 젊은 사관생도들뿐이었다.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이 17만명이라고 했지만 이들은 대부분 제대로의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며 더구나 소총도 충분히 없었다. 1917년 3월 11일, 수도방어군의 사령관인 카발로프(Khabalov)장군은 황제의 지시를 이행코자 병력을 동원하였다. 카발로프 장군은 시위대를 진압하기 전에 거리에 커다란 현수막을 내걸고 자진해산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현수막에 적힌 명령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시위대가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군대가 발포하여 약 2백명이 쓰러지고 나서 부터였다. 그런 중에도 어떤 부대의 병사들은 군중을 향해 발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았으며 또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이 발포명령을 내린 장교에게 오히려 총을 겨누고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스는 진압병력을 증강토록 명령했으며 의회(Duma)를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왕실 이야기 > 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커피와 버터는 사치품  (0) 2010.01.02
차르에 대한 반란  (0) 2010.01.02
페트로그라드의 폭동  (0) 2010.01.02
프러시아의 최후통첩  (0) 2010.01.02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  (0) 2010.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