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차르에 대한 반란

정준극 2010. 1. 2. 05:22

15. 차르에 대한 반란

 

1917년 3월 12일, 시위대에게 일부러 공포를 쏘았던 볼린스키(Volinsky)연대가 황제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어 다른 연대들도 볼린스키 연대의 반란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페터 대제가 창설한 전설적인 프레오브라옌스키 수비대(Preobrajensky Guard)마저도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무기고가 약탈을 당했으며 내무성, 육군본부, 경찰본부, 법원, 그리고 구역경찰서들이 화염에 휩싸였다. 정오쯤에 반란군은 페터-파울요새를 함락하여 요새의 대포들을 모두 장악하였다. 밤이 되었다. 반란군은 자기들의 거사를 혁명이라고 불렀다. 6만명의 병사들이 혁명군에 추가로 합세하였다. 의회(Duma)는 임시정부를 형성하고 사태를 수습코자 했으나 혁명의 불길을 막을수는 없었다. 의회는 오히려 니콜라스의 퇴위를 요구하였다. 니콜라스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퇴위하지 않을수 없음을 인식했다. 니콜라스 2세는 1917년 3월 15일(그레고리 력) 퇴위하였다. 3월 15일은 시저가 브루투스에게 살해 당한 날이었다. 3월 15일은 구러시아력으로는 2월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스의 퇴위를 이끌어 낸 혁명을 ‘2월 혁명’이라고 부른다.

 

생페터스부르크의 겨울궁전에 진입하는 반군들. 1917년.

 

니콜라스는 처음에 황태자인 알렉세이에게 양위하는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알렉세이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들의 마지막 자문을 듣고나서 마음을 바꾸었다. 니콜라스는 알렉세이 대신에 동생인 미하엘 대공을 후임 차르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미하엘 대공은 차르의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다. 생각이 깊었던 미하엘 대공은 먼저 러시아가 군주국으로 계속 존속할 것인지 또는 공화제를 채택할 것인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토록 하고 만일 군주국으로 남기로 결정하면 그때에 황제의 자리를 수락하겠다고 주장했다. 국민투표는 시행되지 않았지만 니콜라스의 퇴위와 볼셰비키의 등장으로 3세기에 걸친 로마노프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러시아가 절대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가자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진보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크게 환영했다. 미국은 모든 국가 중에서 최초로 러시아 임시정부를 승인하였다. 러시아에서는 차르의 퇴위에 대한 반응이 엇갈렸다. 기쁨과 구원과 희망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공포와 분노와 혼란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백성들은 비록 군주제를 반대하고 차르를 퇴위시켰지만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하자 군주제에 대한 일종의 향수에 젖어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러시아에서의 1차 대전에 대한 이야기와 2월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책으로 열권도 더 넘을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여러 사람의 편의를 위해 이쯤해서 설명을 마감코자 한다.

 

전선을 시찰하는 니콜라스 황제와 참모진들. 191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