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제정러시아 니콜라스 황제

예카테린부르크의 참극

정준극 2010. 1. 2. 05:24

17. 예카테린부르크의 참극

 

1918년 7월 17일 새벽 2시 20분경, 야코프 유로브스키가 지휘하는 일단의 병사들(실은 비밀경찰)이 방을 돌며 곤하게 잠들어 있는 니콜라스와 가족들, 그리고 시종들까지도 깨웠다. 병사들은 모두에게 어서 옷을 입고 집 뒤에 있는 반지하 방으로 모이라고 말했다. 병사들은 반볼셰비키 분자들이 예카테린부르크로 진입하여 황제와 가족들이 거처하고 저택까지 밀고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위해를 가할지도 모르므로 안전을 위해서 잠시 본채에서 피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네 딸과 알렉세이 왕자는 모두 반지하의 방으로 들어갔다. 시종들 중에서 네명만이 끝까지 황제와 함께 남겠다고 하여 반지하 방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두어명은 무슨 낌새를 알아 차렸는지 저택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황제와 함께 남아 있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주치의인 유제네 보트킨(Eugene Botkin), 왕비의 시녀인 안나 데미도바(Anna Demidova), 요리사 이반 카리토노프(Ivan Kharitonov), 마부 알렉세이 트루프(Alexei Trupp)였다. 황제와 가족들, 그리고 시종들이 모인 방의 옆방에는 이미 10명의 사격분대가 비밀리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중부 유럽에서 차출되어 생페터스부르크에 온 7명의 공산주의 병사와 지방 볼셰비키 당원 3명이라고 했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헝가리 억양을 쓰고 있었다. 지휘관인 유로브스키는 이들이 라트비아 출신들이라고 말했다.

 

니콜라스는 왕자를 업고 반지하 방에 들어왔다. 왕비는 앉을 의자도 없다고 불평하였다. 유로브스키가 어떤 병사에게 의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왕비가 알렉세이 왕자를 무릎에 앉히고 의자에 앉자 갑자기 병사들이 반지하 방으로 몰려 들어왔다. 유로브스키는 니콜라스와 가족들에게 우랄지역 소비에트노동자지부의 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한다고 말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선언이었다. 놀란 니콜라스가 ‘무엇이라고? 무엇이라고?’라고 소리치면서 거의 반사적으로 가족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유로브스키가 다시한번 명령받은 내용을 말해주었다. 병사들중 한사람이 나중에 회고한데 따르면 니콜라스는 성경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그대들은 지금 그대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마지막 했다고 한다.

 

니콜라스가 본능적으로 가족들에게 몸을 돌리는 것과 동시에 사형집행인들인 병사들이 피스톨을 꺼내어 발포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가 가장 먼저 쓰러졌다. 유로브스키가 니콜라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와 가슴을 향해 여러 발의 총알을 쏘았다. 아나스타시아, 타티아나, 올가, 마리아는 첫 번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왜냐하면 드레스에 보석들을 꿰매어 넣은 것이 방탄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들의 무게만 해도 1.3 kg가 넘었다고 한다. 병사들은 총을 쏘았는데도 공주들이 죽지 않자 총검으로 여러번 찔렀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자 피스톨을 머리에 바짝 대고 쏘아 결국은 숨을 거두게 했다. 이틀후 볼셰비키는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차르인 니콜라스 2세를 총살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발표문에 따르면 반볼셰비키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예카테린부르크로 진격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노프 왕족들이 석방될 수도 있으므로 어쩔수 없이 처형했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들을 모두 처형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흩어져 살고 있는 왕족들은 니콜라스의 가족들이 생존해 있는 줄로 알았다.

 

니콜라스 2세와 가족.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올가, 마리아, 어머니 알렉산드라, 아나스타시아, 알렉세이, 타티아나. 1911년 생페터스부르크 궁전에서의 마지막 가족 사진. 모두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들의 총칼에 죽임을 당했다.

 

[불가리아의 유령]

 

로마노프 왕가에 대한 자서전 집필을 맡고 있는 어떤 학자들은 한 명 또는 두 명의 로마노프 가족들이 어떤 온정 많은 병사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져 도망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인것 같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총살집행에 참여했던 어떤 병사는 총살을 집행한 이후 지휘관인 유로브스키가 병사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서 로마노프 가족들이 입고 있던 옷에서 빼낸 보석들을 나누어 주어서 받아가지고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로브스키가 ‘아 글쎄 누군지 모르지만 겉옷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라고 중얼 거렸다고 말했다. 즉,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딸들 중에서 한명이 그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어머니인 왕비는 첫 번째 총탄으로 즉사했기 때문이었다.

 

니콜라스 2세의 마지막 모습. 1917년 차레스코에 셀로에서. 뒤에는 적군들이 경비하고 있다.

 

잔인한 학살의 폭풍이 지난후 시체들은 한참동안 이곳저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매장을 할 것인지, 또는 화장을 할 것인지, 매장을 한다면 어느 곳에다 할것인지 등등에 대하여 높은 곳에서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일부 시체들은 지하실에서 옮겨 트럭에 실어 놓았으며 어떤 시체는 복도에 놓아두었고 또 일부 시체들은 현장인 지하실의 방에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던 어떤 병사가 동정심을 발휘하여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시체를 지하실의 다른 방에 몰래 옮겨 놓았는데 바로 그것이 아나스타시아이며 나중에 병사들이 시체를 옮겨서 화장할 때에 요행히 발각되지 않아서 살아서 도망갈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불가리아에서는 아나스타시아와 남동생 알렉세이가 생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953년 페터 차미아트킨(Peter Zamiatkin)의 주장이 그것이었다. 페터 차미아트킨은 제정러시아 근위대에서 차르의 측근경호를 맡았던 병사였다. 그는 자기가 차르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아나스타시아와 알렉세이를 자기의 고향인 흑해 오데싸(Odessa) 근처의 마을로 비밀리에 데려와서 숨어 지냈다고 말했다. 그후 차르 니콜라스와 가족들이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나스타이사와 알렉세이를 데리고 오데싸를 떠나 불가리아의 가바레보(Gavarevo)라는 마을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이름을 바꾸고 살았는데 아나스타시아는 엘레오노라 알베르토브나 크루거(Eleonora Albertovna Kruger)라는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1954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황태자(차레비치)였던 알렉세이도 다른 이름으로 지내다가 먹고 살기 위해 도시로 나갔는데 그후 어떻게 지내는지 자세히 알수 없었다고 한다. 가족단위의 유령들이 돌아다니나?

 

흑해 북안의 오데싸에 입성한 볼셰비키 군대. 1917년. 

[DNA 소동]

 

1979년 아마추어 고고학자인 알렉산더 아브도닌(Alexander Avdonin)이라는 사람이 예카테린부르크의 어떤 진흙탕 길속에서 두개골을 비롯한 여러 개의 뼈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는 당국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니콜라스와 가족들을 학살하고 집단 매장한 사실을 알고 있는 당국은 제정러시아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고려하여 그것이 니콜라스와 가족들의 유해인지 아닌지를 확실히 밝히지 않고 덮어 두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수행하고 유해에 대한 DNA 검사를 시작하였다. 러시아 당국은 유해들이 니콜라스와 가족들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1998년 1월에 유골들을 조합하여 다시 조사해 보니 모두 11구가 되어야 하는데 9구만 확인되었다. 네 딸 중의 한명의 유골과 왕자 알렉세이의 유골이 없었다. 유골들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러시아, 영국, 오스트리아, 미국의 DNA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검사가 끝나자 당국은 유해들을 생페터스부르크의 성베드로-바울교회에 안치하였다.

 

2008년 4월 러시아 당국은 실종되었다는 2구의 유골을 2007년에 먼저 발견했던 장소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당국은 추가로 발견한 유골들에 대하여 DNA 검사를 시행한 결과 로마노프의 가족들이 틀림없었다고 밝혔다. 추가로 발견한 유해도 성베드로-바울교회에 함께 안치하였다. 2008년 10월 1일, 러시아 대법원은 니콜라스 2세와 가족들이 정치적 희생자였으므로 신분을 복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2009년 과거의 여러 DNA결과가 보고서로서 발간되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07년에 추가로 발견된 2구의 유골은 알렉세이 황태자와 아나스타시아 공주의 것이라고 최종 확인했다. 러시아 당국은 최종적으로 2008년 4월 30일, 니콜라스와 가족 모두의 유해가 확인되었다고 발표했다. 필자의 설명은 이렇듯 간단하지만 실은 그 간에 유해와 관련하여 수많은 소문들이 분분했었다. 지면상 생략!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전문서적을 사서 읽어보면 된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보혈교회'(Church on Blood). 니콜라스 황제와 가족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집이 있던 곳에 세운 러시아정교회. 그래서 '피 위에 세운 교회'라는 명칭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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